역사가 보여주는 것

박태균,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미군정 중위의 눈에 비친 1945~1948

by seeker

계절학기 수업을 듣던 중 선생님께서는 우스갯소리로 ‘한때 지구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던 나라들은 모두 우리나라와 같은 위도에 존재한다, 그러니 우리나라도 언젠가는 세상을 호령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이야기를 자신이 학생 때 들었지만 그때로부터 40년 후인 지금도 그럴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셨다. 다시 들어도 웃긴 이야기지만, 한편으로는 상상해 보고 싶은 미래이긴 하다. 미국과 중국이 우리나라 대통령의 눈치를 보고, 모두가 원화를 쓰고 한국의 GDP가 1순위에 오르는 미래. 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내부적으로도 아름다운 나라를 상상해 본다. 이 나라에서는 국회의원들이 기득권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국민의 미래만 생각한다. 국민도 둘로 나누어져서 싸우지 않고 서로의 의견과 견해를 존중하며, 투표 시 치우쳐지지 않고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이런 나라에서 살면 꽤 행복하지 않을까?

이런 상상 속 나라와 우리나라가 정반대가 된 이유는 뭘까? 처음 우리나라가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갈등해야 하는 운명임을 알게 됐을 때, 정치의 목적이 나라의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인들의 생계유지를 위한 것임을 알았을 때 필자는 나라가 밉기만 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이 원인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원인의 시작은 ‘해방 정국’에 있다고 생각했다. 우리의 역사는 1910년까지 왕을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1910년부터 1945년까지는 36년 동안 일본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1945년 이후, 갑작스럽게 나타난 ‘시민 중심의 사회’로 인해 우리는 수많은 문제와 혼란을 겪고 그것들은 여전히 2023년까지 이어져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사회적 문제로 드러나고 있다고 생각한다. 즉, 현재 시점에 대한민국에 나타난 문제가 있다면, 필시 1945년 역사에서부터 기인했을 것이다. 이 역사 안에서 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을 것이며, 현재 한국 사회가 직면한 정치적 분열과 같은 사회·정치적 문제들의 기원을 알 수 있으리라. 서평 도서 목록에서 이와 관련된 도서는 『버치문서와 해방정국』 하나뿐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상황에 대해 제삼자의 관점으로 서술해 주는 책이라니, 나는 현재 가지고 있는 의문들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과 함께 제시된 서평 도서 목록에서 고민 없이 이 책을 가장 우선순위로 선택했다.


『버치문서와 해방정국』에서는 해방정국 당시에 한국 정치인들을 담당하던 미군정 정치고문단 소속 ‘버치 중위’가 남긴 기록들을 가지고 그때의 상황을 총 29장에 걸쳐서 재구성한다.

1장에서는 미군정이 실패한 원인을 거시적 관점에서 분석한 버치의 생각을 제시한다. 저자는 버치의 이런 생각에 대해 여러 가지 질문을 던지고, 현재 논란이 되는 미군정 시기의 질문들을 개괄하며 앞으로 전개될 내용에 대한 힌트를 던져주는 방식으로 책의 도입부를 만든다.

이어서 2장과 3장, 4장은 여운형이라는 인물에 대해 다룬다. 2장에서 여운형이 미군정의 목적에 적합한 인물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미군정이 여운형에게 계속된 구애를 했던 이유를 추측하고, 3·4장에서 여운형의 친일 행위를 밝히고자 했던 공작과 그 결과를 다룬다.

5장부터 8장까지는 이승만에 대해 다룬다. 5장은 미군정의 이승만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평가와 이승만이 미군정의 도움 없이는 정치적으로 힘들었을 것을 보여주며 여러 의문점을 던지고, 6장부터 8장까지 전개될 내용의 도입부로서 기능한다. 6장에서는 이승만과 미군정이 서로 견원지간이 되는 과정과 이승만이 ‘분열의 상징’으로써 기능하며 미군정에는 ‘실패한 말’로 낙인이 찍히는 순간까지의 흐름을 서술한다. 7장은 돈을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이승만과 김구의 차이점을 분석한다. 8장에서는 이승만의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정치적 조언자로서 기능했음을 보여주는 문서들을 제시한다.

9장부터 11장은 장덕수에 대해서 다룬다. 9장에서는 경찰과 공무원들의 부도덕한 행태와 이들이 왜 장덕수를 지지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설명한다. 미군정에서 내각책임제의 수석 총리로 앉히려던 장덕수의 죽음의 배후를 추적하고, 그 과정에 생기는 의문점들을 10장에서 제시한다. 11장에서는 장덕수 암살 사건의 배후가 김구로 향하는 과정과 김구의 암살 사건이 계획적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

12장부터 16장은 경찰과 청년단에 대해 다룬다. 12장에서는 경찰들은 부도덕적으로 살아갔으나, 미군정은 경찰들의 존재에서 얻는 이익으로 인해 경찰들을 믿었음을 보여준다. 13장은 ‘한민당 코트’라는 용어로 이를 한국민주당이 이승만에게 참패한 이유를 지적한다. 14장은 경찰, 공무원, 그리고 청년단의 연합으로 만들어진 강고한 카르텔이 지방에서 여당을 지지하도록 만든 과정을 보여준다. 이 청년단 중에서도 특히 악명이 가장 높은 ‘서북청년단’의 배경과 활동들에 대하여 15장에서 다루고 있다. 16장에서 일제에 부역했던 사람들이 청년단을 지역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쓰면서 잃었던 권력을 다시 잡아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17장부터 21장은 사회의 상황을 보여준다. 17장에서는 ‘우익의 정치자금은 어디서 마련됐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18장에서는 한국에 나타난 인플레이션과 질병 문제를 소개한다. 나아가 19장에서는 미군정이 만들었던 한국 소개 자료를 통해 당시의 사회적 장면들을 그려낸다. 20장에서는 올림픽 복권으로 해방 후의 팍팍한 삶과 당시 사회의 혼란을 서술한다. 이때 나타났던 유명한 깡패 김두한에 대해서도 21장에서 다룬다.

22장부터 24장은 미군정이 미소공동위원회에 적극적이었으며, 하나의 정부를 만들려고 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22장에서는 여운형의 암살과 그 배후를 추적하며, 미군정이 여운형을 중심으로 조선 임시정부의 수립을 구체적으로 추진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23장에서는 미군정이 단일정부 수립을 목표로 한 노력 중 하나로 법령 초안을 보여준다. 24장에서는 남쪽에서의 공산주의 혁명을 막기 위해서 농지 개혁을 고민했던 흔적을 보여준다.

25장과 26장은 미군정의 마지막 정책들을 다룬다. 25장은 한국민주당과 독립당, 버치 사이에 나타난 갈등이 미군정에서 크게 다루어지는 것을 예시로 들며 그들에게 한국민주당이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또한 미군정의 지난 정책들이 모두 실패하면서 김규식을 중심으로 하는 정책을 펼치고자 하는 과정을 26장에서 보여주고 있다.

마지막 27장부터 29장은 이 책의 결론 부분으로, 미군정 시기에 대한 평가와 현대 사회에 대한 성찰을 다룬다. 27장은 미군정의 마지막 계획이 실현되지 못했던 이유를 분석한다. 나아가 28장에서는 버치가 총체적으로 분석한 미군정 정책 실패 원인을 서술한다. 마지막으로 29장에서 저자는 해방정국 당시의 상황과 현대 상황을 비교하며 형태를 바꾸어 여전히 남아있는 기득권자들과 현대 정치의 병폐를 지적하고, 시민사회 자각을 강조하면서 글을 끝맺는다.


이 책은 역사를 ‘재구성’한 책으로는 더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특정 인물이나 주제로 큰 챕터를 이루어 설명하는 잘 정리된 책의 구조도 좋았고, 서론과 결론이 잘 작성된 점도 좋았다. 특히 필자는 결론 부분에서 얻은 것도 많았고,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영화의 클라이맥스 부분을 보듯이 긴장감 있게 읽을 정도였다. 나아가 장마다 마지막에 질문을 던지고, 어떤 질문들은 다음 장에서 이어지는 구성도 내가 생각해 볼 수 있는 거리를 많이 만들어줘서 좋았다. 다만, 이것은 ‘재구성’한 책이어서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것 같다. 즉, 처음부터 시간순으로 역사를 천천히 설명해 주는 것이 아니라 근현대사의 기본 지식을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서술된 책이다. 그래서 평소 근현대사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해 주고 싶다. 하지만 이 책은 배울 것이 정말 많은 책이라고 평가돼 근현대사를 공부하고서라도 읽어보라는 추천을 모두에게 해주고 싶다.


해방정국은 끝내 악이 승리했다. 친일 세력과 독립운동 세력으로 전개됐어야 할 해방 정국 당시의 상황은 좌익과 우익으로 분열됐고, 친일 세력은 우익의 그림자에 숨어 살아남았으며, 일부 독립운동 세력은 좌익이라는 명목하에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친일을 품고 분단 정부를 수립하려던 이승만은 결국 승리했고, 친일을 거부하거나 통일 정부를 수립하려던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세력을 잃었다. 왜 결국 악이 승리했을까? 당시의 교육 수준은 낮았고, 거짓된 정보와 소문에 쉽게 휘둘릴 만큼 정보를 접할 수 있는 환경도 충분하지 않았다. 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고, 오로지 냉전의 희생양으로서 미국과 소련 사이에서 이념의 선택을 강요당했다. 결국 각자의 상황과 신념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좌익과 우익을 선택했고, 서로 싸우며 친일의 이력이 있는 사람들에게 손쉽게 권력을 쥐여줬다. 기득권자들은 기득권을 유지하고자 하는 욕심을 버리지 않았고, 우리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마주하고 전쟁이라는 참혹한 사태를 겪어야만 했다. 어쩌면 해방정국 당시는 악이 승리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을지도 모른다.

책을 읽기 전에 대한민국의 외교적 위치에 대해 가졌던 의문은 풀리지 않았다. 정치적 폐단의 원인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는 깨달았다. 현대 사회는 해방 정국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사회는 아직도 두 개의 정치적 이념으로 나뉘어 싸우고 있고, 정치적 양극화는 점점 심해지고 있다. 언론과 미디어의 출현으로 과거에 비해 빠르게 정보를 접할 수 있게 됐지만 ‘정제된 정보’를 보도하기에 정직하게 믿을 수 없다. 지금도 누군가는 우리가 이렇게 싸우는 사이에 이득을 취하고 있다. 세계 정세도 비슷한 궤를 가진다. 미국은 자신의 세력 유지를, 중국은 그 세력을 원하며 세계를 미국과 중국 편으로 나뉘어 놓고 있다. 약 70년 전 소련과 미국이 겨루었던 것처럼, 미국과 중국이 세계의 패권을 쥐기 위해 또 한 번 겨루고 있는 것이다.

역사가 기록되고, 우리가 그것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우리는 역사 공부를 통해 과거의 좌우합작위원회, 4·19 혁명과 같이 우리의 조상들이 지키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지, 왜 지켜지지 않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렇게 세상을 보는 눈을 길러 현대에 모습을 달리하여 존재하고 있는 기득권자들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는 것을,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사회를 끌어나가려는 것을 막을 수 있어야 한다. 나아가 과거의 분열이 국내에서도, 세계에서도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고,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질문을 던져야 한다.

어쩌면 앞서 미국과 중국 위에 대한민국이 오르는 미래를 생각했던 것은 우리나라로 하여금 새로운 기득권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며 반성하게 된다. 세계를 미국 편과 중국 편으로 나누지 않고, 김규식과 여운형이 좌와 우를 합작하려고 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이 하나의 ‘가교’가 돼 대한민국을 중심으로 세계를 통합할 수는 없을까. 다시 생각해 본다. 우리나라가 세상을 호령하는 미래는 어떨까. 우리나라는 미국과 중국을 중재하고, 각자의 문화와 이념을 존중한다. 국내에서는 ‘똑똑한’ 시민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감시하고 기득권자들은 자신의 기득권을 쉽게 유지하지 못한다. 이런 미래가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미래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