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의 사진은 김○○ 선생의 페북에서 옮겨온 것이다. 김선생님은 그림 밑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수업 시간엔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아이들도 생일잔치 놀이 시간에 무척 표정이 밝다. 이런 활동을 자주 한다면 학교도 쓸만한 곳이리라. 혼자서 하는 컴퓨터 게임보다 모두 참여하는 놀이로 얻는 즐거움이 더욱 크다.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주 나도 비슷한 것을 느꼈다. 올해는 체육전담을 맡고 있는데, 5학년 수업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공부도 못하고 운동도 못하고 대관절 삶에 의욕이 없어 보이는 아이가 있다. 보통의 아이들은 도구교과 시간엔 소극적이다가도 체육시간만 되면 눈이 반짝반짝 하는데 이 아이의 경우는 무슨 과업에든 도무지 의욕을 보이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체육수업 시간에 모두가 열심인 소집단 신체활동에도 동참을 하지 않는다. 급우들은 아이의 이러한 성향을 알고서 아예 학급의 사회적 관계망 속에서 제쳐놓은 듯하다.
그런데, 이 아이가 지난 체육 시간엔 무엇을 굉장히 열심히 하는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때는 학년초인지라 체육실에 비치된 공들이 지난 겨우내 대부분 바람이 빠져 있기에, 아이들을 모둠활동 시켜놓고 나 혼자서 공에 바람을 넣고 있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다가와서 “지금 뭐 하시냐고, 나도 한번 해봐도 되냐고?” 물어온다. 내심 믿음이 가진 않았지만 ‘밑져야 본전’이라는 심정으로 임무를 맡겨봤다.
자원봉사자에게 내 짐을 떠맡기고 모둠활동을 점검하러 한바퀴 돌고 왔는데, 놀랍게도 그 어설퍼 보이는 아이가 30개가 넘는 농구공과 배구공에 바람을 다 넣어가고 있었다. 사실 이 아이에 대한 신뢰의 문제는 끈기와 관련한 것이었다. 나는 속으로 집중력과는 도무지 거리가 먼 녀석이 과연 몇 개의 공에 바람을 넣을 것인가 하며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많은 공을 혼자 힘으로 진득하게 다 넣어가고 있는 것이다. 2학년 때부터 봐왔지만 실로 이 아이가 이처럼 진지한 모습을 처음 봤다. 순간, 어떤 깨달음이 일었다. 아이가 지금껏 무슨 활동에 소극적이고 나태한 모습을 보였던 것은 원래 이 아이가 그러해서가 아니라 아이에게 적합한 활동과업을 부여하지 않아서라는 것이다.
(바람넣기에 재미를 붙여 그 다음날에는 자기 집에 있는 공을 들고 내 집무실을 찾아왔다. 그리고 그 다음 날에도 또 다른 공을 들고 왔다. 신바람이 난 것이다. 어디 주위에 바람빠진 공 있으면 누가 이 아이에게 맡기면 서로 좋을 것 같다.)
아웃사이더들에게 교육의 이름으로 어떤 기회를 마련해줘야 한다.
공부를 잘 한다는 것은 인간이 가진 수만 가지 능력 가운데 단 하나를 잘 한다는 의미이련만 우리네 학교에선 학업성적으로 모든 것을 말하게 하는 것이 문제이다. 평소 교사의 눈밖에 벗어나 말썽만을 일삼는 아이들도 야영장에서 장기자랑 시간엔 모두를 깜짝 놀래키는 재능을 발휘하곤 하지 않는가? 학교의 일상생활에선 존재감 없어 보이던 아이들도 자신의 끼를 발휘할 무대를 만들어주면 ‘스타’로 돌변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각인이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발산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무대를 만들어주는 것이 학교가 할 일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위한 ‘일제고사’란 무대만을 늘어놓을 것이 아니라, 음악 좋아하는 아이들을 위한 딴따라 무대, B보이를 지망하는 아이들을 위한 댄스 무대도 만들어주면 좋을 것이다.
남다른 감수성을 가졌으되, 맹목적 학력 신장엔 관심을 보이지 않는 ‘잠재적 모차르트’를 ‘성적’이란 잣대로 스트레스만을 가한다면 그 아이의 예술가적 감성이 사춘기 특유의 질풍노도와 결합하여 빗나간 반항심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많다. 나아가 그 같은 반항심이 불운한 어느 순간엔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 이어질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대구지하철 방화사건, 버지니아공대 총기난사 사건(조승희 씨), 숭례문 방화사건의 경우를 보듯이, 모범생 1만명 만드는 것보다, 똑똑한 범생이 1백명 만드는 것보다 반사회적인 아웃사이더 하나 안 만들어내는 것이 사회적으로 훨씬 덕이 된다. 다시 말해, 살인적인 경쟁체제는 실상 이명박 정권이 그토록 부르짖는 ‘실용주의’ 차원에서도 해가 될 뿐이며, 오히려 소외된 영혼 하나를 덜 만들어내는 것이 국가적으로나 개인적으로도 훨씬 실용적이라는 계산법이 성립하는 것이다.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필요 없나니......!
교사의 본질은 아이사랑이며 교육정책은 만인의 행복을 위해 추구되어야 한다. 페스탈로치의 교육애와 선량한 교육정책은, 아흔아홉 마리의 온전한 양보다 그늘진 곳에서 갈 길 잃고 방황하는 한 마리의 양을 위해 베풀어져야 한다. 그럼에도 우리 교육의 현실은 정반대로, 돌봄이 전혀 필요치 않은 소수의 잘난 아이들을 위한 ‘승자독식’의 무대만을 차려놓고선 절대다수의 아이들을 들러리로 세워 바보로 만들어간다. 그 중 개성이 강하고 감수성이 예민한 아이들은 자칫 위험한 반사회적 아웃사이더로 돌변한 위험성을 늘 안고 있다. 말하자면 이들은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시한폭탄인 것이다. 이들의 억눌린 열정을 건설적인 방향으로 발산하게 함으로써 프로이드가 말하는 ‘승화’를 일궈내는 일, 이게 학교교육 관계자의 몫이다. 약간의 배려로 이들을 위한 무대를 만들어주면, 이들이 범생이들보다 사회적으로 더 유용한 일꾼으로 성장할 지도 모른다. 사실상 미래의 반사회적 일탈자와 미래의 잠재적 예술가는 동전의 양면이다.
(지난 여름 미국 시카고에서 찍은 사진이다. 그 동네에선 관공서에서 애써 무대를 만들어주지 않아도 누구나 무대를 스스로 만들어 공연을 즐긴다. 무대 위의 주인공들이나 관객들도 사뭇 진지하다. 간혹 실수가 나오더라도 환호하면서 격려한다. 무대를 통해 공동체 의식을 길러 가는 것이다. 저 아이들이 고난이도의 브레이크 댄스 동작을 익히는 것에 열정을 쏟지 않았다면 혹 이 거리가 아닌 소년원에 있을 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게 내가 말하는 '동전의 양면' 메타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