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방향의 장성
3) 결론
(1) 장성의 본질
현재의 장성과 비교하여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최초의 단일화된 장성을 건설했던 진시황제가 장성건설의 노선을 결정함에 있어서 전략적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시황제의 장성축조와 비교하여 명왕조 때의 만리장성은 중국 농부들을 보호한다는 정책상의 명분이 훨씬 더 분명하다. 명조의 장성은 황하 만곡부의 농경지를 가로지르고 수도 북경 북쪽을 감싸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진나라 성벽은 주요 도시에서 훨씬 멀리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아 중국 농경지를 직접 보호한다는 명분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진의 성벽 축조의 노선은 정복전쟁이 활발하던 전국시대의 성벽들과 동일한 전략적 논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진나라는 중국인을 유목민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비중국인 북방 부족들에 대해 공격적인 위치를 고수하며 팽창주의적 정복 전쟁의 거점을 확보하려는 것이다.
장성은 군사적 우위에서 밀릴 때는 방어용으로, 힘의 우위에 있을 때는 제국주의적 영토 전쟁의 전진기지로 활용되었다. 중국의 입장에서 장성은 흉노족과 기타 야만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방어용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민족에 대한 개방보다는 기본적인 단절과 폐쇄적 관계의 수단이다. 또한, 장성은 중국인들의 인종주의적 차별의 표현이기도 하다. 한인을 제외한 이민족은 중국과 대등한 위치에 설 수 없는 야만족이며 그들이 중화 세계의 우월성을 인정할 때에만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인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장성은 야만적 ‘오랑캐’와 ‘중화’를 가르는 물리적 장벽의 기능을 수행한다.
(2) 중국인과 중국사의 모토 ‘중화주의’
1792년 9월 26일. 영국의 국왕 조지 3세는 대영제국 최초로 통상 사절단을 중국에 파견했는데, 교역의 물꼬를 열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영국의 사절단이 황제와의 만남에 있어 외교의전이 심각한 걸림돌이 되었다. 청대 후반의 중국은 전통적인 중국식 외교관을 주장하였거니와 모든 외국인은 중국 문명에게 보태줄 것이 털끝만큼도 없는 후진적 야만인이므로 영국 사절단이 중국 조정에 대한 우월성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청나라 입장의 외교관에 동의한다는 의미로 ‘삼궤구고두’를 수용하라는 것이다. 이는 황제를 알현할 때마다 황제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 내는 필수 의전 동작으로서 무릎을 꿇고 엎드리는 절을 세 차례 하는 것이며 무릎을 꿇을 때마다 이마를 바닥에 닿도록 세 번씩 숙여야 한다는 것이다.
‘삼궤구고두’와 같은 맥락에서 수천 년 동안 부침하는 왕조와 그 지배자들이 영토방위와 안전 보장이라는 현실적 필요에 의해 축조된 성벽, 이른바 장성의 존재는 그것을 축조한 사람들의 사상을 반영한다. ‘중화와 오랑캐’ 혹은 ‘나와 너’ 천하를 수직 방향으로 단절하는 배타적이고 오만한 중국 세계관의 상징이며 중국사를 관통하는 중국인의 집단 심성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이후 지배자들은 제국을 다스려 왔다. 중국이 국내를 차지하고 야만인이 이들을 통제하며, 야만인들은 방외에 있고 중국에 복속하는 것이 항상 정상이었다. 야만인이 중국을 차지하고 제국을 다스리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 송나라의 운이 다한 뒤 북방 야만인이 중국 땅에 있다 보니 중국이 원나라에 정복되는 일이 생겼다. “우리 중국인들이 볼 때 우리가 그들을 평정하는 것은 하늘의 의지이다. 어찌 야만인이 중국인을 다스릴 수 있는가? 중국의 심장부가 너무나 오랫동안 양고기 냄새에 찌들고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지 않았나 걱정된다. 때문에 나는 군대를 이끌고 그들을 일제 소탕했다. 내 목적은 천한 몽골인을 쫓아내고 무질서를 끝장내며 백정들에게 안전을 보장해 주고 중국에서 수치를 씻어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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