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함을 이야기한다.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히틀러의 꼭두각시 중 한 명인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독일의 2차 대전 패망 이후 전범 재판을 피하려 아르헨티나로 도주해 비루한 삶을 이어간다. 그러던 중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면서 전범 재판에 회부된다. 재판이 열린 내내 아이히만은 여전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이같이 평범한 사람이 어떻게 인간 백정이 되어 그 많은 유대인을 학살했는지 의아할 따름이었다. 아이히만은 그런 자신을 변호하며 시종일관 내게 주어진 임무를 다했을 뿐이라는 주장을 되풀이했다. 그는 유대인을 학살하면서도 더 경제적이고 효과적 학살을 위해 시스템을 짜면서도 그것이 살인이나 그보다 높은 무엇을 상정하는 일이 아니라 관료로 근무했던 자신이 처리해야 할 하나의 업무에 지나지 않았다. 만약 아이히만이 자신과 동등한 생명을 지닌 유대인 한 명, 한 명을 생각했다면 그런 참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면 다른 사람의 손에 넘겨졌을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아이히만에게는 자기 일과 출세가 전부였다. 그에게 유대인은 자신과 같은 존엄한 생명을 지닌 존재가 아니었다.
기자 신분으로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한 한나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관찰하며 그에게서 악의 이면을 발견한다. 악이란 사악한 얼굴과 미치광이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니라 우리 도처 곳곳에 널려있는 평범한 사람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회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자신의 얼굴을 바꿀 수 있다. 그런 그에게서 그녀는 세 가지 불능을 마주한다. 언어의 불능, 사고의 불능, 행동의 불능으로 사고의 불능은 언어의 불능을 불러오고 언어의 불능은 행동의 불능으로 도미노를 일으킨다. 즉, 아이히만은 사유하는 인간과 동떨어진 존재이며 이 세 가지 불능이야말로 인간과 짐승을 구분 짓는 울타리이다.
아이히만은 관료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에 충성을 다했을지 몰라도 그가 저지른 학살은 끝내 인간으로서 사유하지 못하는 존재임을 드러낸다. 한나 아렌트의 지적처럼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내려진 임무를 비판적으로 수용하는 대신 출세에 눈먼 평범한 모습의 악마성을 드러내며 기껏해야 일개 전범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인한다. 그가 재판 내내 앵무새처럼 되뇌는 주장은 자신은 상부의 명령에 복종했을 뿐이라는 옹색한 변명이었다. 만일 그의 주장대로 주어진 명령에 충성을 다했을 뿐이라면 그는 왜 자신의 결백을 입증하는 대신 아르헨티나로 도주했느냐는 질문이 남는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기각되었다. 이듬해 6월 한낱 짐승에 불과했던 아이히만은 교수대 위에서 삶을 마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