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는 인간은 이성적인 존재이며 자율적인 존재이지만 동시에 인간은 고통과 쾌락을 느끼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고통과 쾌락이 우리를 지배한다고 주장하는 공리주의를 부정하며 우리를 특별하고 존중받아야 할 존재로 만들어주는 것은 이성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칸트는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라고 생각한다. 칸트가 정의하는 자유는 까다롭다. 칸트에게 자유란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고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과는 다르다. 칸트의 자유는 주어진 목적을 위해, 외부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아닌 자기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다. 칸트는 우리는 목적의 도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공리주의자와 칸트의 차이점은 철도 문제로 잘 알려진 '트롤리 문제'에서 잘 드러난다.
열차는 선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고, 선로에는 다섯 사람이 있다. 당신은 선로 밖에 서 있고, 바로 옆에는 상당히 무거운 사람이 한 명 서 있다. 다섯 사람을 구하는 유일한 방법은 옆에 서 있는 사람을 선로 위로 밀쳐서 그 무게로 열차를 멈추게 하는 것인데, 이 경우 열차는 멈추게 되지만 그 사람은 죽게 된다.
트롤리 문제에서 공리주의자들도 그 남자를 밀어서는 안 된다고 할 것이지만 이는 장기적으로 공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칸트는 그것이 남자를 밀지 말아야 할 이유가 돼서는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희생자를 행복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위와 같이 인간을 수단으로써 외부의 법칙에 따라 행동하는 것을 타율,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유롭게 행동하는 것을 자율이라고 정의한다.
그렇다면 무엇이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것인가? 이 질문에서 우리는 칸트의 까다로운 자유에서 역시 까다로운 도덕의 개념으로 넘어가게 된다. 칸트는 도덕적 가치는 결과가 아닌 동기에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옳은 일은 하는 이유는 옳기 때문이어야 하지 이면에 숨은 동기 때문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는 도덕적 가치를 부여하는 동기를 의무 동기라고 정의하고 이 의무 동기와 대조되는 나의 바람, 욕구를 채우려는 동기를 끌림 동기라고 칭하였다. 칸트는 의무 동기에 어떠한 것이 있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우리가 어떤 행동의 도덕적 가치를 평가할 때 그 동기를 따질 뿐 결과를 따지지 않는다고 말할 뿐이다.
칸트의 견해에서 가장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은 타인을 도울 의무에 관한 것일 거다. 칸트가 생각하기에 동정심에서 나온 선생은 선한 행동이지만 도덕적 가치는 떨어진다고 할 것이다. 그는 도움을 줄 때 쾌락을 느끼는 선행 동기와 의무 동기를 구별한다. 그리고 의무 동기만이 행동에 도덕적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한 이타주의자가 인류에 대한 사랑이 식어 인간 혐오자가 된다, 그러나 이 사람은 순전히 의무감으로만 사람을 돕는다. 이때 비로소 그의 행동은 도덕적인 가치를 가진다.
그럼 인간 혐오자만이 도덕적 가치를 지니는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인가 그건 아니다 옳은 일을 하면서 쾌락을 얻는다고 해서 도덕적 가치가 떨어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도덕적 가치는 그 행동이 옳기 때문이어야 한다. 쾌락을 주기 때문이면 안된다는 것이다.
칸트는 도덕, 자유, 이성을 세 가지 개념의 대조를 통해서 설명하였다.
도덕 동기: 의무 VS 끌림
의지 결정 방법: 자율 VS 타율
명령: 정언 명령 VS 가언 명령
도덕 동기에서는 도덕적 가치는 의무 동기만을 동해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의 의지가 결정되는 방식에서는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의해서 지배될 때만 자유롭다고 칸트는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행동은 외부의 영향으로 결정되는 욕구나 끌림에 연관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이에 대한 칸트의 대답은 이러하다, 우리는 자연에 속해 있기 때문에 물리법칙과 같은 외부의 법칙에 따라 행동한다. 하지만 칸트는 동시에 우리는 외부의 법칙만을 따르는 당구공과 달리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이는 이성이 가능하게 한다고 말한다.
이성이 우리가 행동하게 하는 명령은 가언 명령, 정언 명령 두 가지가 있다. 가언 명령은 이성을 도구로 활용하는 것으로 ‘x를 원한다면 y를 해라’라는 식이다. 정언 명령은 이성은 목적 자체로 바라보는 것이다. 어떤 행동이 그 자체로 바람직하다면 그때의 명령이 정언 명령이다. 칸트가 정의하는 정언 명령은 결과와 상관없고 명령의 원칙 즉 동기에 관련이 있고 행동의 선한 부분은 결과와 상관없이 정신 자세에 달려있다는 점에서 우리는 정언 명령만이 도덕적 명령 즉 도덕법이 될 수 있음을 알 수 있다.
결론적으로 이성은 정언 명령을 내려(도덕법에 따라) 우리가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자신에게 부여한 법칙에 따라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럼 우리의 행동이 정언 명령인지 아닌지 도덕법에 맞는지 안 맞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칸트는 이에 대하여 두 가지 공식을 제시한다.
첫째는 ‘당신의 행동준칙을 보편화하라’이다. 칸트가 말하는 행동준칙은 내 행동의 근거가 되는 규칙이나 원칙을 뜻한다. 행동준칙을 보편화시켰을 때 모순, 악영향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당신이 돈을 값을 능력이 없는데 친구에게 돈을 빌리고 근시일 내에 갚겠다고 약속한다. 이는 도덕법에 맞는가 정언명령인가? 이를 알기 위해서는 행동준칙을 보편화시켜야 한다. 이 예시에서의 행동준칙은 ‘돈이 급히 필요할 때마다 금방 갚겠다고 약속하고 일단 돈을 빌려야 한다. 값을 수 없는 것을 알아도 그러하다.’이다. 이를 보편화시키면 모든 사람은 돈을 빌리기 위하여 거짓 약속을 할 것이고 약속이라는 행위 자체가 무의미해질 것이다. 결국 거짓 약속을 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고 이 행동은 정언명령에 맞지 않다는 결론을 얻는다.
이러한 방법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보는 비판도 있다. 왜냐하면 이는 거짓약속에 원칙적으로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이 가져올 결과를 생각해서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칸트의 요지를 오해한 것이다. 보편화시키는 것은 정언명령인지 확인하는 공식에 불과하다. 거짓 약속이 사회에 약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도덕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진짜 이유는 거짓 약속으로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둘째는 ‘인간을 목적으로 대하라’이다. 정언명령은 자체가 목적이어야 하기 때문에 토대는 존재만으로 절대적 가치를 지녀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계속 언급해온 인간, 동물과 차별되는 인간만의 이성에 있다.
예를 들어 칸트에게 있어 자살과 타살은 같다. 살인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다. 그 희생자를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 그 사람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다. 칸트는 자살도 같은 이유로 비판한다.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끊는 것은 자신을 수단으로 취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을 존중하지 않은 것이고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외부의 법칙과 독립적으로 자율적으로 행동할 수 있고 이를 가능하게 하는 이성은 이때 도덕법에 따라 행동하게 한다. (정언 명령을 내린다.) 그럼 이러한 질문이 떠오른다. 사람마다 가치, 흥미, 성장환경 등이 다르고 때문에 서로 다른 이성적 사고를 할 것이고 서로 다른 도덕법을 주장하지 않겠는가? 어떻게 각자 자신에게 부여하는 법칙이 도덕법이라는 하나의 기준으로만 수렴한다고 할 수 있는가?
칸트의 설명은 이러하다. 자율적인 존재인 우리가 스스로에게 도덕법을 부과하게 한 것은 이성인데 그 이성은 일종의 실천적 이성이고 이는 인간 모두가 공유하는 것이다. 성장환경 생활환경을 고려하지 않는 보편적이고 동일한 능력이다. 그리고 모두에게 평등하게 존재하는 이 능력을 사용하는 일이 우리 모두를 존엄하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이성을 발휘하는 능력은 모두 같기 때문에 유일한 도덕법, 정언명령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칸트식 존중은 인간 그 자체에 대한 존중이고 우리 모두에게 비차별적으로 존재하는 이성적 능력에 대한 존중이다. 단지 인간이기 때문에 이성적인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존중받아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