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대체 원하는 게 뭐예요?”
다리를 꼬며 건넨 그녀의 말투엔 30년 전 그날의 냉기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사실 그는 이렇게까지 그녀를 만나 따져 묻고 싶진 않았다. 돈을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었다. 인생이란 정말 부질없는 것이었다. 그토록 쉴 새 없이 달려왔건만, 손가락 사이를 스치는 바람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건강, 돈, 명예도. 그나마 남는 것은 사랑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녀와의 시간은 좋은 의미로 남지 않았다.
그녀와 그는 대학 CC였다. 그는 그녀를 정말 사랑했다. 결혼까지 생각했다. 하루는 그를 걱정하는 듯한 동기가 말했다. 그녀가 동기가 필기한 공책을 빌려 가더니 복사해서 팔았다고. 복사야 할 수 있다지만, 다른 이의 필기 노트를 돈 받고 판 건 좀 아니지 않느냐는 얘기였다. 동기는 말했다.
“사소한 것 같지만, 남의 노력으로 사욕을 채우는 걸 보면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동기의 말에 그는 좀 놀랐지만, 그 일이 그의 마음을 꺾진 못했다. 가난한 집 장녀인 그녀가 한편으로는 안쓰럽기도 했다. 그녀는 심지어 그가 군대에 가 있는 내내 그를 기다려줬다. 비록 전역 후, 무릎을 꿇으며 매달리는 그를 두고 돈 많은 남자에게 떠나 버렸지만. 그녀는 그의 소박함이 숨 막힌다고 했다.
부디 행복만 하길. 그녀가 미웠지만, 그는 진심으로 그녀가 잘살길 바랐다. 그래서일까. 그녀는 승승장구했다. 어느 날, 그녀의 목소리가 라디오에서 들리더니, 또 어느 날은 TV에 나왔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 시절 그가 사랑했던 그녀의 눈매와 웃음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녀는 유명한 작가가 됐다. 그녀의 책은 어느 곳에 가도 있었다.
아무리 베스트셀러라지만 그는 도저히 그녀의 책을 읽을 수 없었다. 그녀는 손끝을 스치는 풀잎처럼 여전히 그를 베었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그녀. 그는 그녀가 존재하는 세상 속에 갇힌 듯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이 곡은 도인(盜人) 작가님의 시를 인용해 만든 노래입니다. 다시 한번 아름다운 시를 노래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신 작가님께 감사드립니다.”
또, 그녀였다. 앳된 가수는 기타를 메고 그녀의 시를, 아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언젠가 그 청년을 두고 대학생 딸이 요즘 제일 인기 있는 가수라며 말했던 기억이 났다.
“태양마저 추운 새벽, 너를 떠올리면 결국 견딜 만한 일.”
순간, 새벽 보초를 서며 떠오르는 해를 보던 군인 시절의 그가 떠올랐다. 그다음 가사도, 또 그다음 가사도 언젠가 그의 마음에서 터져 나왔던 말들처럼 너무나 익숙한 고백이었다.
‘설마… 설마 그렇게까지 했겠어.’
그는 군인 시절 내내 그녀에게 편지를 썼다. 그뿐 아니었다. 그녀에게 처음 고백할 때도, 그녀가 매몰차게 그를 거절해 떠날 때도, 그는 그녀에게 하고 싶은 말들을 늘 편지에 담았다.
한번 생긴 의심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만원인 퇴근길 지하철에서 그는 처음으로 그녀의 책을 폈다. 그가 갔던 낯선 곳의 공기, 그녀를 그리워했던 마음, 그의 삶의 철학, 그리고 그가 그녀에게 받은 상처. 그가 건넨 모든 말들이 고스란히, 어쩌면 쉼표 하나까지도 똑 닮아 그녀의 이름으로 책을 채우고 있었다.
‘남자의 마음을 수백, 수천 번 오간 듯한 작가의 필력에 경이로움을 표한다’, ‘누군가를 이토록 사랑할 수 있다면 하루를 살아도 행복할 것 같다’. 그녀의 글을 향한 수많은 찬사들. 알 수 없는 감정들이 밀려왔다. 30년도 지난 일인데 어쩜 이리 비참할 수 있을까. 잇따라 읽은 그녀의 시집과 다른 책들도 온통 그가 마음을 옮겨 적었던 고백들이었다. 그렇게 그는 몇 주를 그녀의 작품을, 아니 그의 20대를 읽으며 보냈다. 그리고 그녀를 만나고 싶어졌다. 아니, 만나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그의 앞에 있었다. 그녀의 손이 컵을 향했다. 자신만만한 얼굴과는 달리 떨리는 손과 입술. 그러나 안쓰럽지 않았다. 그녀는 스케줄이 있다며 끝내 그에게 사과 한마디 없이 자리를 떠났다. 어쩌면 도망쳤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래도 진행해야겠어.”
그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그는 변호사가 된 대학 동기에게 전화를 걸었다.
“거 봐, 내가 안 변했을 거라고 했지. 잘못된 걸 알았으면 그렇게까지 네 글로 책을 도배하지도 못했을 거다. 대학 때부터 내가 알아봤지.”
언젠가 그녀를 조심하라며 걱정했던 동기는 그럴 줄 알았다며, 그가 갖고 있는 편지들을 갖고 만나자고 했다. 그는 그녀에게 글을 쓰기 전, 항상 다른 종이에 써보곤 했다. 그녀가 볼 편지는 깔끔하고 잘 정돈되어 있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친구는 말했다. 이 정도면 저작권 위반으로 ‘손해배상 청구’에 ‘부당이득 반환 청구’도 가능할 것 같다고. 원작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저작인격권 침해’도 가능해 보인다는 말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미안하다고, 한 번 더 만나고 싶다고. 법원에서 연락을 받은 듯했다. 하지만 그는 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연달아 온 딸아이의 메시지.
“아빠, 내가 아빠가 나한테 쓴 편지를 모아서 출판사에 보냈다고 했었잖아. 근데 대박! 출판사에서 아빠랑 계약하고 싶다고 난리야. 거 봐, 아빠 같은 사람이 책을 내야 된다고. 이따 내가 자세히 말해 줄 테니까, 오늘은 집에 무조건 일찍 들어와야 돼.”
... 어안이 벙벙했다. 인생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하긴, 오래전 그녀도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내 글은 심장이 읊은 글 같다고. 비록 그렇게 말하던 그녀는 내 심장 같은 글을 자기 글로 둔갑시켜 세상에 내놨지만.
이른 저녁, 딸이 시킨 대로 그는 회식도 뒤로하고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지난 몇 달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노곤함에 눈을 감았다. 그의 머리 위로 지하철 TV 화면이 쉴 새 없이 바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지나가는 이 시각 헤드라인.
‘베스트셀러 도인(盜人) 작가, 절필 선언. 잇따른 저작권 위반 혐의는 부인.’
벗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녀의 세계, 누군가의 삶과 사랑을 아무렇지 않게 훔치던 그녀의 세계가 허물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