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할론 2. Role play - 8) Yield

생산

by 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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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 제출일, 교무실 앞 복도는 학생들로 붐볐다. 인쇄 냄새가 묻은 종이 더미가 교탁 위에 쌓였고, 성준은 그 중 자신의 대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 표지에는 ‘별주부전 – 백지장도 맞들면’ 이라는 제목과 네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드디어 끝났다.”

민수가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니, 이제 시작이지.”

예림이 웃었다.

“오늘 연극하잖아.”


점심시간이 지나자 1학년 교실들이 하나둘 불을 끄고, 각 조의 공연이 차례로 이어졌다. 성준 팀은 마지막 순서였다. 조용한 교실 안, 임시로 세운 커튼 뒤에서 네 명이 둥그렇게 모였다.

“자, 마지막으로 확인. 동선은 어제처럼.” 민수가 말했다.
“토끼는 오른쪽, 자라는 중앙, 왕들은 뒤쪽.” 예림이 손가락으로 표시했다.
“그리고 김이랑 홍삼은 바꿔 드는 거 잊지 말고.” 재훈이 들고 있던 소품 봉투를 확인했다.

성준이 천천히 숨을 고르며 말했다.
“이제 진짜로 보여주자. 우리가 뭘 하려던 건지.”

조명이 켜졌다. 커튼이 걷히자 아이들의 시선이 쏠렸다.


첫 장면, 자라의 절박한 호소와 토끼의 냉소적인 웃음이 교차했다. 처음엔 긴장으로 목소리가 떨렸지만, 점차 서로의 대사에 맞춰 호흡이 살아났다.

“우린 다르지만, 역할의 다름으로부터 배웠습니다.” 예림의 대사.
“역할의 다름은 벽이 아니라, 문이었습니다.” 성준의 대사.

그 말이 끝나자 교실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김과 홍삼 봉투가 서로의 손을 거쳐 교차되는 순간, 학생들 사이에서 작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박수가 번졌고,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 위로 겹쳤다.

“좋아요. 메시지가 정확하게 전달됐어요.”

조명이 꺼지고, 네 사람은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손끝이 떨렸지만, 웃음이 새어 나왔다. 민수가 속삭였다.
“우리 진짜 해냈다.”
“이번엔 아무도 안 틀렸어.” 예림이 말했다.
성준이 대본을 가슴에 안으며 웃었다.
“틀리더라도 괜찮았을 거야. 어차피 우리 얘기니까.”




다음날, 수행평가 점수가 게시되었다. 네 사람의 이름 옆에는 ‘100점’ 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고, 종이 하단에는 붉은 도장이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
둥근 도장 안에는 ‘완성’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민수가 도장을 손끝으로 두드리며 말했다.
“이거 그냥 점수 아니야. 우리가 진짜로 한 거잖아.”
성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건… 끝까지 노력했다는 표시 같아.”

그때 담임선생님이 교실 문을 두드렸다.
“얘들아, 잠깐만 나 좀 보자.”
네 사람은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선생님은 웃으며 말했다.

“축제 때 공연 무대가 비어 있거든. 혹시 너희 이 연극 한 번 더 해볼 생각 없니?”


순간 교실 안이 조용해졌다.

민수가 예림을, 예림이 성준을, 재훈이 민수를 번갈아봤다.
성준이 천천히 미소를 지었다.
“한 번 더요?”
“그래. 이번엔 진짜 무대에서.”

잠시 정적. 그리고 민수가 짧게 웃었다.
“좋죠, 선생님. 이제 무대는 익숙하니까.”

성준은 책상 위의 대본을 다시 들었다. 모서리에 남은 연필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지워지지 않은 흔적 위에 새로 쓴 문장처럼, 또 하나의 장면이 시작될 것 같았다.











수동적 경험이 어떻게 새로운 가능성을 낳는가?


(1) Yearn - 갈망

수동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다 보면, 단순 반복에 머무르는 한계를 자각하게 된다. 이 자각은 곧 다른 방식의 역할 수행에 대한 갈망으로 이어진다.


학생은 단순히 ‘과제를 한다’는 수준에서 벗어나 ‘내가 맡은 책임을 더 의미 있게 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게 되고, 직장인은 주어진 임무를 넘어 조직에 더 큰 가치를 주고 싶다는 열망을 느낀다. 갈망은 기존 역할이 가진 틀을 깨고 싶다는 신호이며, 새로운 가능성으로 나아가려는 내적 에너지다.

역할 속에서 생겨난 갈망은 막연한 꿈에 그치지 않고, 구체적인 작은 시도로 옮겨 갈 준비를 만든다.


(2) Initiat - 변화의 시작

갈망이 행동으로 이어질 때, 역할 수행은 비로소 다른 국면을 맞는다.


작은 변화는 현재 맡은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에 새로운 해석을 불어넣는 일이다. 학생은 발표에서 다른 접근을 시도해 보거나, 직장인은 보고 방식을 변주하여 자신만의 색을 담는다. 이는 기존의 수동적 태도에서 벗어나, ‘역할을 내 방식대로 다루어 보는’ 첫 생산적 행동이다.

작은 변화는 역할을 재해석하게 만들고, 곧 더 넓은 가능성을 바라보게 한다.


(3) Expand - 시야의 확장

작은 변화는 역할을 단일한 틀에서 벗어나게 한다.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은 ‘이 역할은 이렇게만 해야 한다’는 생각을 넘어, 다양한 방식으로 수행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학생은 책임을 수행하는 여러 방법을 알게 되고, 직장인은 다른 부서·자원과 협력해 새로운 시도를 떠올린다. 이는 역할이 단순히 주어진 틀이 아니라, 확장 가능한 장치임을 보여준다.

시야가 넓어진 순간, 개인은 이제 자신이 가진 자원을 역할 수행에 어떻게 활용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4) Leverage - 자원의 활용

역할 수행 속에서 발견한 가능성은 자원을 동원할 때 현실로 구체화된다.


자원 활용은 ‘주어진 역할을 의미 있게 바꾸는 구체적 전략’이다. 학생은 글쓰기·발표력·관계 능력 같은 자기 자원을 학급 역할에 녹여내고, 직장인은 경험·네트워크를 새로운 프로젝트에 연결한다. 이 과정에서 역할은 수동적 틀을 넘어 개인의 역량과 결합된 생산의 장이 된다.

자원을 활용한 경험은 곧 역할 속에서 더 큰 결정을 내릴 힘을 길러 주며, 결심의 단계로 이어진다.


(5) Decide - 결심

생산의 완성은 선택과 결단에서 드러난다.


결심은 단순히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는 수준을 넘어, 역할 수행을 자기 주도적으로 가져가겠다는 선언이다. 학생은 “이번에는 내가 먼저 책임을 맡겠다”고 마음먹고, 직장인은 “이 역할을 내 식으로 새롭게 만들겠다”고 결단한다. 이는 수동적 경험이 누적되어 능동적 수행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결심은 역할을 완전히 자기화하는 경험으로, 이후 더 주체적인 역할 창출을 위한 발판이 된다.











¶ 역할은 도구다 - 도장


도장은 손에 쥐기 쉬운 작은 손잡이와 새겨진 면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구조다. 잉크패드에 가볍게 눌러 잉크를 머금고, 종이 위에 수직에 가깝게 누르면 음각이 양각의 흔적으로 남는다. 힘의 세기와 각도, 잉크의 양, 종이의 질에 따라 선명도가 달라지지만 원리는 간단하다. 한 번 찍힌 표식은 쉽게 지워지지 않아 행정 문서의 확인, 개인의 서명 대체, 상품 인증 등에서 반복 가능한 동일 표식을 남기는 데 널리 쓰인다. 즉, 도장은 작은 동작으로 일관된 흔적을 남기는 도구다.


도장은 한 번의 찍힘이 작더라도 누적되면 문서 전체의 신뢰와 의미를 바꾼다. 날짜 도장, 접수 도장, 결재 도장이 차례로 더해지면 단순한 종이는 절차를 통과한 기록물이 된다. 역할도 같다. ‘확인’, ‘승인’, ‘전달’처럼 각자 맡은 작은 행위가 축적될 때 팀의 작업은 흐름을 얻고, 책임의 경계가 선명해진다. 또한 도장의 인영은 내가 책임지겠다는 표식이기에, 찍는 사람의 태도와 기준을 드러낸다. 대충 찍으면 번지고 삐뚤어지듯, 역할도 대충 수행하면 신뢰가 흐려진다. 반대로 잉크를 고르게 묻히고 여백과 위치를 맞추면, 작은 동작 하나가 전체 결과의 품질을 끌어올린다. 도장이 서명만 대체하는 물건이 아니라 절차의 리듬을 만드는 장치이듯, 역할도 창구–검토–승인의 연결 고리로서 서로를 이어 준다.


따라서 역할을 도장처럼 이해하면, 그것은 거창한 성과 이전에 반복 가능한 책임의 표시라는 점이 또렷해진다. 오늘 한 번의 정확한 찍힘이 내일의 신뢰를 부르고, 누적된 인영이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 우리는 일을 서두르기보다 잉크를 고르게 묻히고, 위치를 확인하고, 힘을 일정하게 주는 법을 익혀야 한다. 그 습관이 쌓이면 역할 수행은 단순한 ‘일 처리’를 넘어, 팀과 조직이 의지할 수 있는 지속 가능한 표식이 된다. 도장은 작지만 결과를 바꾸고, 역할 역시 작지만 반복될수록 새로운 의미를 생산하는 매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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