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팽 왈츠를 발견한 사람들
얼마 전 뉴욕에서 오랫동안 묻혀 있었던 쇼팽의 ‘신곡’이 발견됐다. 뉴욕타임스는 알려지지 않았던 쇼팽의 왈츠 악보가 뉴욕의 모건 라이브러리 앤드 뮤지엄 수장고에서 발견되었다고 보도했다. 인덱스 카드 크기의 작은 종이에 쓰인 이 악보는 48마디의 왈츠였다. 지난 봄 이 박물관의 음악 담당 학예사가 소장 자료를 정리하다가 ‘쇼팽’이라고 쓰인 이 악보를 발견했고, 박물관은 몇 달간의 검증 작업을 거쳐 쇼팽의 자필 악보가 맞다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 뉴욕 타임스는 쇼팽의 자필악보가 새롭게 발견된 것은 반 세기만에 처음이라고 전했다.
쇼팽이 20대 때 쓴 것으로 추정되는 이 짧은 곡은 피아니스트 랑랑이 말했듯 ‘폴란드의 엄혹한 겨울을 연상시키는’ 무겁고 어두운 도입부를 거쳐 포르티시시모(fff. 세게 치라는 뜻의 포르테 f가 세 개 겹친다)로 폭발한 후, 애수에 찬 왈츠 선율을 펼쳐낸다. 뉴욕타임스는 랑랑이 이 곡을 연주한 영상을 함께 공개했다. 200년 가까이 묻혀 있었던 이 곡의 ‘세계 초연’이었다.
이 악보를 발견한 사람은 음악 담당 학예사이며 작곡가이기도 한 로빈슨 매클렐런이다. 그는 수장고에서 아서 자츠(Arthur Satz)라는 저명한 음악교육자의 사후 이 박물관에 기증된 수집품들을 정리하다가 이 악보를 발견했다. ‘Chopin‘이라고 쓰인 이 악보는 그가 이전에 알고 있던 쇼팽 곡들과는 달랐다.
그는 악보 사본을 집에 가져와서 피아노로 직접 쳐봤다. 조성이 같은 쇼팽의 가단조 왈츠들을 대조해 봤지만 이 곡은 그 어느 곡과도 매되지 않았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쇼팽 왈츠의 자필 악보가 맞을까? 그는 흥분에 휩싸였다. 한동안 새로운 왈츠의 멜로디가 머릿속에 콕 박혀 계속 재생되었다고 했다.
매클렐런보다 반 세기 전 쇼팽의 자필악보를 발견한 바이런 재니스(1928-2024) 역시 이런 흥분에 휩싸였을 것이다. 바이런 재니스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의 몇 안 되는 제자로 ’제 2의 호로비츠‘라는 찬사를 들었던 미국의 피아노 거장이다. 1948년 카네기홀 데뷔 연주를 했고, 1960년 미국인 최초로 구 소련 문화교류 투어에 참가해 모스크바 청중의 뜨거운 갈채를 받았다. 뉴욕타임스는 당시 그를 ’냉전의 장벽을 허문 대사‘로 대서특필하기도 했다.
피아니스트 바이런 재니스(사진 Tully Potter Collection)
바이런 재니스는 1967년 프랑스의 투아리 성(Château de Thoiry)을 방문했다가 우연히 쇼팽의 자필악보를 발견했다. ’오래된 옷‘이라는 라벨이 붙은 낡은 트렁크에 호기심을 느끼고 열어봤더니, 그 안에서 쇼팽의 자필 악보가 나온 것이다. 쇼팽 왈츠 Op. 18과 왈츠 Op. 70 No. 1의 다른 버전 악보였다. 이 악보는 전문가들의 검토를 거쳐 쇼팽의 자필악보가 맞다는 판정을 받았다.
그리고 몇 년 후인 1973년, 재니스는 예일대학교 도서관을 방문했을 때 또 한 번 놀라운 경험을 하게 된다. 높은 선반에 있는 폴더 하나를 꺼내달라고 요청했는데, 이 안에서 쇼팽의 또 다른 자필 악보가 발견된 것이다. 놀랍게도 쇼팽 왈츠 Op. 18과 Op. 70 No. 1로 프랑스의 성에서 발견한 악보와 동일한 곡이었다. 하지만 알려지지 않았던 또 다른 초기 버전 악보였다.
한 사람이 두 번이나 ’우연히‘ 쇼팽의 자필 악보를 발견하는 일이 어떻게 일어났을까. 재니스는 스스로 자신이 쇼팽과 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자신의 경험을 2010년에 낸 <Chopin and Beyond: My Extraordinary Life in Music and the Paranormal>이라는 저서에서, 그리고 다큐멘터리 <Frédéric Chopin – A Voyage With Byron Janis>에서도 소개했다.
재니스는 평생 신체적 고통에 맞서 연주한 피아니스트였다. 11살 때 사고로 왼손 새끼손가락을 다쳐서 한 손가락의 기능을 잃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1973년 무렵 발병한 관절염으로 양쪽 손목과 손가락 전부에 극심한 통증이 찾아왔다. 통증으로 고통 받으면서도, 그는 이를 극복하며 쇼팽의 음악을 연주했다. 쇼팽을 연주하지 않는 피아니스트는 거의 없겠지만, 특히 재니스에게 쇼팽은 정말 특별한 작곡가였다.
그가 쇼팽의 자필악보를 발견한 것은 그의 음악인생 뿐 아니라 전체 음악계에도 커다란 의미를 지닌다. 그의 발견은 단순히 미공개 악보가 더 발견됐다는 차원을 넘어, 쇼팽의 창작 과정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일한 곡의 다른 버전 악보들을 분석해서 쇼팽이 그의 작품을 어떻게 수정하고 발전시켰는지 살펴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바이런 재니스는 지난 4월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이번에 로빈슨 매클렐런이 뉴욕에서 발견한 왈츠 또한 음악사 연구자들에게 큰 의미를 지닌다. 이 왈츠는 쇼팽이 젊은 시절 개인적인 용도로 작곡했으나 출판되지 않은 곡으로 추정된다. 전문가들은 쇼팽이 작은 악보에 적은 곡을 종종 친구들에게 선물했다며, 이 왈츠 또한 다른 사람에게 선물했던 곡으로 보고 있다. 이 악보에는 쇼팽의 초기 작업 방식과 실험적 아이디어가 담겨 있어, 쇼팽의 음악세계 발전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왈츠는 연주 시간 1분 남짓한 짧은 곡이다. 쇼팽의 다른 곡들에 비하면 테크닉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은 편이다. 매클렐런은 단 한 페이지 악보에 담긴 이 곡이 쇼팽을 연주해 보고 싶은 아마추어 연주자들에게도 좋은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했다. 취미로 피아노를 치고 있는 나 역시 이 곡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악보를 구해 연습하기 시작했다.
’쇼팽과 영적으로 연결되었다‘고 한 재니스 바이런만큼은 아니지만, 200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발굴된 이 왈츠를 직접 쳐 보면서, 나 역시 조금은 특별한 감정을 느꼈다. 쇼팽이 마치 얼마 전 신곡을 발표한 이 시대 작곡가인 것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악보를 선물하곤 했다는 쇼팽의 그 마음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21세기에 발견된 쇼팽의 왈츠는 나를 포함해 피아노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쇼팽이 선사한 선물이었다.
*쇼팽 왈츠 발견이라는 사건에 많이 몰두하긴 했었나 보다. 여러 차례 글을 썼다. 이 글은 방송기자클럽회보에 기고했던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