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터미널
평일 낮 고속버스 터미널에는 사람이 많다. 지난 주 까지 회사원이었던 영철은 터미널 가운데 전자시계가 잘 보이는 곳 근처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다. 그의 옆에는 사놓고 한번도 쓰지 않아 새것 티가 나는 대형 케리어가 있다. 한참 점심먹고 커피 마시면서 사무실로 복귀 하기 싫어서 마주치고 싶지 않던 시간, 한 시반 이었다. 온세상 사람들이 나 빼고 다 바쁘게 어디론가 향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차에 버스가 왔다. 직장-집-직장-집 무한의 수레바퀴를 타던 기분으로 살았던 자신의 모습이 플랫폼에 차를 잠시 정차했다가 10분만에 떠나가는 버스와 같다고 생각해본다.
영철, 만으로 서른 아홉, 노총각. 소개팅 프로그램에 나오는 악질 케릭터 예명과 같은 영철이다. 그는 편의점에서 캔커피를 계산하고 나오다가, 로또 명당이라고 현수막이 붙어 있는, 사람들이 구석에 앉아 컴퓨터용 사인펜으로 마킹을 하는 것을 본다. 그 장면은 수능시험 보던 날, 뒤에 앉은 불량학생이 의자를 발로 툭툭 차며 답안지를 보여달라고 위협해서 시험을 망쳤던 것을 떠올린다. 벌써 이십년 전 일이지만, 영철은 수능에 미끄러진 이후 인생이 풀리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다. 별거없는 대학생활은 재미없게 끝나고, 따뜻한 살냄새를 맡으며 뜨거운 연애 한번 못하고, 대학교 4학년 취업전선에 뛰어든다. 취업경기는 바닥이었고, 대기업 공채는 씨가 말랐었다. 누가 나같은 지잡대 문송한 사람을 뽑아줄까? 이력서를 고치며 스스로 자문해볼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그 당시 IT 강국 코리아니 뭐니 하면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수강료 환급 과정을 듣고 자격증 몇 개를 획득한 후 학원 소개로 IT 외주 하청 업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리고 각종 갑질과 꼰대문화를 오롯이 체득한, 세월의 풍파를 정면으로 맞은 그는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바퀴벌레같이 질기고 과중한 업무에 치이고, 앞에서 웃으면서 등뒤로는 칼을 꽂는 사내 정치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랬던 그가, 월,화,수,목,금,금,금, 야근 이었던 그가 4월의 따뜻한 봄날, 손에는 호텔예약앱을 통해 예약한 바코드 티켓을 들고 살면서 경험하지 못했던 두근거림을 안고, 어딘가로 갑자기 떠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집에서 나오면서도 정확히 어디로 갈지 정하고 나온 것은 아니다. 막연히 바닷가에 가서 파도소리를 듣고 바람을 쐬고 싶을 뿐이었다.
지하철을 타고 무의식적으로 바라본 스마트폰 영상에서 평소 구독하던 여캠 유튜버의 여행 피드가 올라왔다. 한달 살기를 하면서, 산과 바다를 여행하고 맛있는 것으로 차려진 산해진미를 그 깡마른 몸 위에 흡입하는 것을 보며 좋아요를 누른다.
“그래, 여기로 가보자.”
그렇게 재미없는 영철의 일상의 작은 변화가 갈라진 벽틈 사이에서 삐져나오는 한줄기 빛처럼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