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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씨앗티즌 Dec 27. 2022

여우별

덴의 짧은 소설

그 사람을 만난 것은 단순히 우연이었다. 늘 그렇듯 맞지 않는 일기예보와 더불어 변덕 부리는 날씨에 재수 없이 걸린 피해자가 나였을 뿐, 다른 것은 없었다. 쏟아지는 비는 그칠 줄을 몰랐고 사람들은 비를 피하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바빴다. 그리고 나 역시도 우산이 없었기에 그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처지였다. 다만 나는 비가 싫었고, 싫은 것을 피하고자 자주 가는 카페에 들어갔던 것이 전부였다. 비가 와서 그런지 카페 내부는 평소보다 어두웠지만, 오히려 그 부분이 마음에 들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받아들고 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창밖을 바라보니 이제껏 없었던 것이 새로이 생겨 눈길을 사로잡았다.

‘캔들 공방…? 저 자리엔 원래 칵테일바가 있지 않았나?’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누군가 문을 여는 도어벨 소리에 무심코 시선이 그곳으로 향했다. 시선이 도착한 곳에는 꽤나 키가 크고 단정한 옷차림을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쓰고 온 우산을 접어 빗방울을 털어내더니 이내 카페 안으로 들어왔다. 주머니와 가방에서 무언가를 거듬거듬 꺼내든 그는 카페 직원들에게 다가가 밝게 인사를 하기 시작했다.

“안녕하세요, 바쁘실 텐데 죄송해요. 다름이 아니라 건너편에 캔들 공방을 오픈했거든요, 앞으로 자주 올 테니 선물로 받아주세요.”

직원과 카페 사장님께 공손하게 인사하는 남자를 보고 참 실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명함까지 건넨 것을 보면 분명 홍보가 목적일 텐데, 굳이 단골손님 외에는 사람이 잘 오지 않는 후미진 골목 카페에까지 온 남자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또한, 자주 오겠다니? 말만 번지르르한 사람이 어디 한 둘이던가, 나는 오늘을 끝으로 남자가 절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이 광경을 보며 이런저런 생각들이 오갈 때쯤 카페를 나가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 젠장.’

속으로 그렇게 외쳤다.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을 텐데 속으로 그 사람에 대해 깎아내리고 있었던 것이 문제였을까? 거짓말을 들킨 아이처럼 흠칫, 놀랐다. 이런 나를 눈치채기라도 한 것인지 그는 이쪽으로 성큼성큼 걸어오고 있었다. 그런데 다가온 남자가 나에게 웃으며 말을 건넨 이유는 뜻밖에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저 때문에 많이 놀라셨나 봐요. 제가 뒤를 돌다 실수했네요.”

“...네?”

갑작스러운 사과에 어안이 벙벙해져 남자가 걸어온 곳을 바라보자 우산꽂이가 쓰러져 있는 것이 보였다. 이런 식으로 오해를 했다니 차라리 나로서는 잘된 일이었다. 변명을 생각하는 것도 상당히 머리 아픈 일이니까. 그는 내가 당황해서 아무 말도 못 한다고 생각했는지 나에게도 명함과 더불어 작은 상자를 함께 건네었다.

“죄송해서 드리는 선물이라고 생각해주세요. 그리고 바로 건너편에 있는 공방이니까, 시간 되면 한번 구경하러 오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어색해하며 조심스럽게 물건을 받아들자 그는 싱긋 웃으며 말하고는 널브러진 우산꽂이와 우산들을 손수 정리했다. 가지런하게 정리를 끝낸 남자는 문을 열고 언제 비가 왔냐는 듯 맑게 갠 하늘 아래로 발을 내디뎠다. 그가 나간 모습을 확인한 후, 테이블 위에서 상자를 풀어내자 꼭 바다를 담은 듯한 푸른 빛 젤 캔들이 햇빛과 함께 반짝거렸다.

“예쁘긴 하네…”

툭 튀어나와 버린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속으로 뒷말을 삼켜내었다.

‘그래봤자 다시 마주칠 일은 없을 거라고.’


***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역시 사람은 단언하면 안 된다고 했던가, 아니면 인생에는 언제나 변수가 존재한다고 했던가. 그렇게 확신을 했건만 3일도 아니고 하루 만에 다시 만날 수 있는 건가 싶었다. 우리나라의 인구 수가 오천만 명이 넘는다는데 확률이 그렇게 쉽게 극복되는 거였나 하는 왠지 모를 회의감도 밀려왔다. 모른 척하고 지나가면 좋았겠지만 하필이면 그 남자는 기억력도 좋았다.

“어? 어제 카페에서 뵈었던 분 맞으시죠?”

“아…. 맞아요. 이곳에서 공방하시는 건가 봐요.”

마음속으로는 연신 욕을 내뱉었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하며 말을이어나갔다. 이 의미 없는 스몰토크가 어서 빨리 끝나길 바라는마음으로 말이다. 그렇지만 내 바람과는 다르게 그는 넉살이 좋았고 나와 달리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바쁘지 않으시다면 들어와서 구경하지 않으실래요? 아직 정식

오픈일까지 며칠 남았거든요.”

‘다시 봐도 정말 나와 다른 사람.’

한편으로는 그 사람이 나와 너무 달라 대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와 가까워지기엔 비슷한 구석이 전혀 없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쥐고 있는 사람은 한눈에 알아보는 것처럼 그는 아무런 상처도 없어 보였고, 나는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사람과 어울리고 싶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필요 이상의 관계를 만들고 싶지도 않았다. 삶을 지속하면 할수록 책임질 영역만 눈덩이처럼 늘어나는 것 같이 느껴졌다. 사회가 요구하는 책임의 무게는 감당하기 힘들만큼 무거웠고, 구해줄 사람 하나 없는 망망대해 속에서 의미 없는 발버둥을 치며 허우적대는 사람이 바로 나였다. 언제 잠겨 죽을지 모르는 채로. 그냥 누가 나를 알아달라는 심정으로,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고 싶다는 심경으로, 원래라면 거절했을 법한 그 사람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소한 다정함에 이끌려 공방 내부로 들어오자겨우 그를 본지 두 번째였지만 이곳 역시 참 그 사람 같은 느낌이 들었다. 따스하게 느껴지는 원목과 하얀색의 조화가 딱 그와같은 결이었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도 잠시였을까? 그 고요함을깬 것은 당연하게도 그 사람이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통성명도 하지 않았죠? 저는 유한울이라고해요. 나이는 31살.”

“아… 저는 결다솜이요.”

31살? 외모를 보고 추측한 것보다는 조금 많은 나이였다. 이렇게통성명도 했으니 당연한 것이었을까? 나는 이제 그가 나를 데려온 이유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기막힌 타이밍 인 것인지, 아니면 독심술이라도 하는 것인지 싶을 정도로 한울은 내가 묻기도 전에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풀어냈다.

“다솜이라…. 순우리말인가요? 좋네요. 제 이름도 순우리말로 우주라는 뜻이거든요. 사실 제 공방 앞에서 다솜 씨를 마주쳐서 참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오픈이 3일 전인데 마땅히 와서 보고피드백해줄 사람이 없지 뭐예요? 그래서 두 번 마주친 게 전부인데도 다솜 씨가 부탁을 들어주셔서 정말 고마웠어요.”

‘고맙다’라는 한마디가 뭐라고, 감정을 솔직하게 표현한 그 한마디가 뭐라고. 진심 어린 다정함에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아니, 나도 모르게 이미 눈물이 흘렀다.

후두둑-.

정말 갑작스레 벌어진 일이었다. 나만큼이나 놀란듯한 그 사람이 토끼 눈을 한 채 재빠르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다솜 씨 왜 울어요?! 아.. 아니지, 그냥 소리 참지 말고 마음 풀릴 때까지 울어요. 마음껏 울어도 괜찮으니까….”

살면서 만난 사람 중에 가장 이상한 사람. 단 두 번 만난 사람에게 이렇게까지 친절할 수 있는 이 사람이 신화에 나올법한 어느 괴물보다도 더욱 요상하게 느껴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아니 평생을 살아오면서 들었던 얘기는 진심 어린 말보다 나락으로 밀어 넣는 말들이 훨씬 많았다.

‘다들 그 정도는 참고 살아.’

‘이런 것도 못 해서 일하겠어요?’

‘그거 해서 뭘 할 수 있겠니? 남들 좀 봐. 재능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지금 네 나이가 몇인데? 이제 꿈이 아니라 현실을 살아야지.’

‘좋아하는 것만 하지 말고 다른 것도 해야지.’

처음부터 이렇게 살았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지금보다 어릴 때의 나는 항상 도전하는 사람이었고 꿈이 많던 사람이었는데 왜 이렇게 되어버린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봐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스쳐 지나가는 기억들과 무례한지 모르고 멋대로 내뱉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벌써 스스로를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아마 자각은 한 상태였을 것이다. 계속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된다고, 내가 죽을 거라고. 단지 애써 외면하려 했던 사실을 그에게 들킨것만 같아 수치스러웠다. 겨우 감정을 추스르고 벌어진 상황을 깨닫자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죄송합니다.”

힘들게 입 밖으로 꺼낸 말이었다. 상대를 곤란하게 만든 것이 사실이기에 이미 한 소리를 들을 각오 정도는 당연히 되어있었다. 그런데 좋은 사람인 것을 각인이라도 시키려던 것일까? 한울은 나에게 아무런 책임도 묻지 않았다. 그저 정말 빛나고 따듯한 사람이었다.

“이게 죄송할 일은 아니죠. 저는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이제라도 다솜 씨가 조금이나마 감정을 표현할 수 있어서요. 저는 다솜 씨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알지 못하고, 어떤 무게를 지고 있는지, 어떤 아픔이 있는지도 몰라서 함부로 이해한다고 말씀드리지 않을 거예요. …다만, 어떤 일을 하든지 자신을 포기하고, 잃어가며 감내해야 하는 일이라면 한 번쯤은 무엇으로도 압박하지 않을 테니 마음가는 대로 해보세요. 때로는 그게 정답이니까.”

한울의 말을 듣자마자 머리가 멍했다. 이 사람은 대체 뭐길래 이런 말을 할 수 있는지… 어쩜 그렇게 내가 정말 듣고 싶었던… 꼭 필요했던 말을 해줄 수 있었는지. 단순히 대단한 사람이라고 밖에 표현하지 못할 정도로 경외심이 들었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자 그는 배려해주는 것인지 자세를 낮추고 계속 나와 눈을 맞추며 이야기했다.

“머리 복잡하죠? 감정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제 시간도 늦었네요. 데려다줄 테니 같이 나가요.”

“아! 아뇨…! 그렇게까지는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그래도…”

“아녜요, 실례가 많았습니다.”

이미 추태를 부려도 한참 부렸다. 더 이상의 결례를 스스로도 용납할 수 없어 허둥지둥 의자에서 일어나 그의 공방에서 벗어나려 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뎌 공방의 문을 열자 한울은 급하게 내 이름을 불러 나를 멈춰 세웠다.

“다솜 씨!

..또 와요, 언제든지.”

그의 인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천천히 목례를 한 뒤, 가게를 벗어나자 벌써 하늘에는 별빛이 아름답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한 하늘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끝까지 배려심 넘치는 사람.’


***


그날 이후 한울의 공방에 다시 갔느냐고 물어본다면 확실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절대 가지 않았다고. 그럼 하루하루가 달라졌냐고 묻는다면 그 역시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매일같이 일하고 공부를 하고 쳇바퀴처럼 굴러가는 일상을 버텨내며 살았다. 다만 달라진 게 있었다면 한울이 내게 해준 말이 뇌리에 깊이 새겨진 채 맴돌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말을 들었음에도 차마 내 자신을 보듬어줄 용기도, 내 마음 가는 대로 실행할 각오도 서지 않았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이치일지도 모르겠다. 3년? 5년? 10년? 아니, 그보다도 더욱 오랜 시간 동안 내 자신을 미워하며 살았다. 그렇다고 해서 그 공방에 찾아가 한울과 다시 마주할 자신 역시 없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내겐 그곳에 가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다. 다시 회상해도 창피한 일이지만 울면서 한울

에게 받았던 손수건을 그대로 쥐고 집으로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아차’ 하는 마음에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손수건을 깨끗하게 세탁한 것은 이미 몇 날 며칠이 되었건만. 왜 이리 결심이 서지 않는 것인지, 스스로도 내 자신이 참 답답했다. 그러나 용기와 별개로 그곳에 다시 돌아가지 않는다면 평생 후회할 것 같다는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 이번이 마지막이야. 꼭 얼굴 마주할 필요도 없잖아. 공방 문고리에 걸어놓자.’

나름대로 고심한 끝에 나온 최선의 방법이었다. 한울의 얼굴을 다시 보기에는 자신이 없었고 무턱대고 가져와 버린 손수건은 돌려주어야 했으니 남은 선택지는 이것뿐이었다. 굳게 마음먹고 조그마한 쇼핑백에 한울의 손수건과 달콤한 간식들을 함께 넣어 열심히 포장했다. 모든 것을 준비했음에도 고민되는 게 있었다면 고이 써둔 손편지를 전달하는 일이었다. 대단한 내용을 써낸 것도 아니었고 ‘그동안 감사했습니다.’라는 말을 담은 한마디였는데 의무가 아닌 진심으로 상대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일은 생각보다 더욱 어려웠다. 아무래도 보잘것없는 나란 존재를 정성 어린 시선으로 대해준 사람이 그가 처음이어서 표현하기 더욱 어려운 것만 같았다.

‘이걸.. 넣어, 말아…?’

두 손에 편지를 들고 일각 동안 집안을 서성이며 고민했지만 결국 편지는 넣지 못했다. 그것이 현재의 내가 할 수 있는 용기의 크기 전부였다. 저녁 시간이라고 하기에는 조금 늦은 시간에 집밖을 나섰지만, 여름인지라 아직 해가 길었다. 서서히 져가는 노을과 함께 한울의 공방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냥 가볍지만은 않았다. 자주 가는 카페 덕에 찾아가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내가 벌인 일을 생각하면 걱정만 가득했다. 버스 정류장 앞에서 버스를 탈지 느긋하게 걸어갈지 갈등했지만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고 싶어 걸어가기로 했다. 서서히 자연스러운 빛들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이보다 환한 인위적인 빛들이 거리를 가득 채울 때쯤이었다. 그렇게 15분 정도 걸었을까 원래라면 한산했을 거리가 사람들로 일파만파를 이루고 있었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니 여름 축제를 한다는 현수막이 크게 걸려 있었다. 사람이 많은 장소는 질색하는 편이라 그 모습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까?’라는 왠지 모를 귀소본능도 들었으나 걸어온 것이 아까워 꾹 참았다. 이제 겨우 5분, 말 그대로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가득한 인파에 한숨부터 나왔지만, 이곳을 지나야만 목적지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억지로 사람들을 비집고 들어가 길을 통과해 가는데 한 부스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축제에 오는 그저 그런 부스중 하나였겠지만 그곳에서 팔고 있는 우산이 걸음을 멈춰서게 했다. 나도 모르게 그 우산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주인분께서 웃으며 말을 거셨다.

“그 우산 예쁘죠? 숲속, 야생화, 설원, 여우별 다양하게 있으니까 편히 보다 가요.”

“아…. 그럼, 저 여우별 우산으로 한 개만 주세요…!”

평소라면 예뻐도 쓰기 아깝다며 사지도 않았겠지만, 오늘만큼은 내가 사용할 것이 아니었기에 선뜻 구매할 수 있었다. 겉으로만 보기에는 단순히 검은 우산이었지만, 우산을 펼쳐보면 별빛으로 가득 찬 우주의 모습이 드러났다. 그 사람의 이름도 나처럼 순우리말이었고 그 뜻은 ‘우주’ 였기에 잘 어울릴 것만 같았다. 주인아주머니께서 손수 포장해주신 우산을 받아 한울에게 줄 쇼핑백 안에 고이 넣어두었다. 선물을 넣으며 보았던 손목시계의 바늘은 벌써 8시 30분을 지나치고 있었다.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급히 아주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나는 서둘러 한울의 공방으로 달려 나갔다.

“하아.. 하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도착했지만 야속하게도 공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등불까지 꺼진 것을 보면 이미 그가 퇴근한 것은 분명한 듯했다. 이곳에 오기까지는 어려운 일투성이였는데 막상 이곳에 도착하자 복잡미묘한 감정들이 느껴졌다.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 다시는 한울과 마주하지 말자고 다짐하며 오랫동안 문 앞에 서서 혼자만의 작별인사를 했다. 더는 마음이 흔들리고 싶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진심을 내보이는 순간 무너질 것만 같아서, 단단히 꼬여버린 실타래를 들키고 싶지 않아서, 또 다정함을 기대했다가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난 그렇게 또 도망치려고 했다.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려 가져온 쇼핑백을 문고리에 살며시 걸었다. 내심 편지는 넣을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감도 밀려왔지만 되돌아오지 않을 일이었다.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다솜 씨?”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뒤를 돌아보지 않아도 누군지 알 수 있었다. 세상에 정말 신이 존재한다면 나를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대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할 정도였다. 쉽사리 용기를 낸 것도 아니었고 다시 보지 않겠다는 다짐 역시 무엇하나 쉬운 것은 없었다. 그러나 가장 어려운 것이 있었다면 한울의 말처럼 자신을 잃어가면서까지 모든 것을 감내할 필요 없다는 것, 이를 통해 스스로를 사랑한다는 법이 내게는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다솜 씨, 여기서 이러지 말고 잠깐 같이 들어가요.”

“...아뇨, 오늘은 이것만 전해 드리려고 온 거예요. 지금까지 감사했습니다.”

그는 나를 붙잡았으나 더 이곳에 남아 있는다면 그 사람에게 또 기댈 것만 같았다. 또한, 지금 뒤를 돌아 한울의 얼굴을 보면 울컥 올라오려고 하는 눈물을 참을 수도 없을 것만 같이 느껴졌다. 내가 그에게 서둘러 쇼핑백을 손에 쥐여주고 도망치려 했으나 그의 손이 한 발 더 빨랐다.

“...다솜 씨, 잠시면 되니까 들어와요. 지금 다솜 씨 혼자 보내기엔 상태가 너무 안 좋아 보여요.”

한울의 손에 단단히 붙잡힌 팔을 뿌리치려면 충분히 뿌리칠 수 있었다. 또한, 내가 돌아가겠다고 억지를 부렸다면 그는 강요하지 않고 충분히 놓아줄 만한 사람이었다. 그러니 이를 거절하지 않은 것은 순전히 내 선택이다. 한울을 거절하지 못하고 공방으로 함께 들어가니 어두웠던 공방이 차츰차츰 밝아지기 시작했다. 다시 와도 따스하고 왠지 모를 위로도 받을 수 있게 느껴지는 포근한 곳이었다. 그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각자 의자에 앉아 공간과는 대비되는 고요한 침묵만이 맴돌았다. 한울을 바라보니 내게 할 말을 고르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여기까지 온 이상 더 이상은 회피할 수도 없어 그에게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어보았다.

“.. 한울 씨는 제게 왜 잘해주세요…?”

무거운 정적을 내가 깼다는 사실에 놀란 것일까? 그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바로 잡더니 한울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다솜 씨가 혼자 아파하지 않았으면 해서요.”

“...왜요? 저랑 한울 씨는 이제 겨우 세 번째 보는 거잖아요. 저에 대해 뭘 아신다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한울 씨가 해결해줄 수 있는 문제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희망 고문하시는 건데요?”

그의 말은 무척이나 듣고 싶었던 말이었기에 꽂히도록 마음속에 사무치는 말이었으나, 무너진 지 오래였던 내겐 동시에 역효과였다. 조금은 쏘아붙여 말했나 싶었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에게 분풀이를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타인에게 입은 피해를 아무 잘못 없는 애꿎은 사람에게 똑같이 언행 하고 있으니 따지고 보면 내 자신을 혐오하게 만든 사람들과 나는 다를 바가 없었다. 나아갈 용기도 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맞서 싸울 강인함조차 없었다. 그저 약자라고 생각되는 죄 없는 사람을 괴롭힌 또 다른 강자였을 뿐이었다. 내가 아프다고 해서 남에게 함부로 상처를 입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쉼 없이 그에게 비수를 꽂는 말들을 멈추지 못하고 내뱉었다. 그렇게 내가 모든 말을 퍼부을 때까지 그는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묵묵히 나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진짜 별난 사람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한울이 나의 구조요청을 눈치채주었으면 하는 것은 이기심일까? 더는 기대할 수 없게 차라리 화를 내주었으면 하는 마음도 역설적으로 들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진짜 별종이었다.

“.. 왜.. 냐고 물어보셨죠? …다솜 씨가 옛날의 저 같아서요. 자기혐오로 뒤덮인 제 옛날 모습이요, 그렇다고 해서 다솜 씨를 동정한 건 아니에요. 얄팍한 동정심이 얼마나 상처가 되는지 잘 알고 있으니까 그렇게 대하고 싶지 않았어요. 제가 다솜 씨보다도 훨씬 어릴 때 저는 죽고 싶을 정도로 제가 싫었어요. 몸이 약해서 병원에 누워있는 것 외엔 제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지금이야 다행히 잘 회복해서 이렇게 공방 일도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아팠던 시간이 길어서 또래들은 이미 스스로 하는 것들을 저는 그제야 배우기 시작했거든요. 그래서 놀림도 많이 받았어요. 너는 그런 것도 못 하냐고. 제가 들었던 말들을 스스로 인정하고, 그들의 말대로 나를 평가하던 비교가 시작이었던 거 같아요. 내가 싫어졌던 게.”

아픔, 상처, 고통이라고는 단 하나도 모를 것 같은 사람이었는데. 나와 비슷한 아픔을 겪고 이렇게 덤덤할 수 있다는 사실이, 자신의 치부를 남에게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해졌다는 사실이 가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복잡한 심경이 표정으로 드러난 건지 그는 오히려 내 눈을 더욱 지긋이 바라보며 차분히 말을 이어나갔다.

“자기혐오로 뒤덮여 점차 사람도 만나지 않고 집 밖으로도 나가지 않으니까, 걱정되신 어머니께서 저를 강제로 봉사활동에 보내셨는데 저는 그게 참 싫었어요. 봉사활동을 가도 나를 놀리고 괴롭히는 아이들은 항상 있었으니까요. 그런데 어느 날 봉사활동 담당 선생님께서 바뀌셨는데 저를 엄청나게 도와주시는 거예요. 놀리는 아이들도 따로 혼내고 교육도 해주시고요. 한 번도 그런 어른이 없었는데 진짜 이상하더라고요. 다솜 씨도 저한테 이렇게 느꼈겠죠? 아무튼, 그 선생님께도 마음을 열기가 무서워서 매번 도망 다녔는데 선생님께서는 항상 숨어있는 저를 찾아내시더라고요. 그렇게 3개월을 도망 다녔나? 도망치고 잡히고를 반복하다 보니 선생님께 결국 마음을 열고 말았죠. 그래서 선생님께 여쭤 봤어요. 선생님은 왜 나 같은 아이를 찾아주는지에 대해서. 그런데 선생님은 대답 대신 다른 말씀을 해주셨어요. 다솜 씨가 선물해준 우산에 이름인 ‘여우별’에 대해.”

쇼핑백 안 선물의 이름은 또 언제 본 것인지….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말을 이어가는 한울을 보며 다시 그의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했다.

“여우별은 궂은날 구름 사이로 잠깐 났다가 사라지는 별이래요. 다솜 씨와 제 이름처럼 순우리말이기도 하고요. 선생님께서는 별에게도, 사람에게도 삶을 살아가면서 수많은 궂은날이 다가온다고 하셨어요. 그게 나로 인한 것이든, 타인으로 인한 것이든지요. 하지만 궂은날에 가려져 있을 뿐 내 자신의 반짝임이 보이지 않아, 내가 죽을 만큼 밉고 싫어도 단지 보이지 않을 뿐이지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라고. 여우별이 궂은날에 반 짝일 수 있는 것처럼 궂은 사람들로 인해 내 빛은 절대 사라지지 않고, 지금 내가 아프고 힘든 이유는 궂은날에도 반짝일 수 있는 여우별이 되기 위한 여정이라고 생각하라고 하셨죠. 그러니 중요한 것은 잠시 쉬어가더라도 계속해서 별로써 빛을 내는 일이에요. 그러면 반드시 아무도 모를 것만 같은 나의 노력과 아픔을 진심으로 이해해 주고 앞을 함께 빛내줄 환한 달과 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고, 내가 너의 달이 되어주겠다고 선생님께서 제게 그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저는…. 세상에서 제가 가장 미울 때 저의 달이 되어주신 선생님 덕분에 궂은날을 이겨낸 여우별로 살아갈 수 있었어요. 그리고 이번에는.. 제가 선생님께 받았던 것처럼 여우별인 다솜 씨의 달이 되어주고 싶어요….”

한울의 말을 끝으로….

나는 모든 감정을 터뜨리듯 소리를 내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앞으로 내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모르지만, 이제는 정말 나아질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을 하며 말이다.






- 작가의 말 -


안녕하세요. 씨앗티즌 프로젝트를 통해 ‘여우별’이라는 작품을 펴낸 작가 ‘덴(Den)’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작품의 끝을 지켜보신 여러분들이라면 눈치채셨겠지만, 이 글은 “타인의 부정적인 말을 반복적으로 듣고, 이를 스스로 인정하고 비교할 때 자기혐오가 시작된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 작성된 글입니다. 열린 결말로 이야기를 끝마쳤기에 원하는 종장을 보지 못해 아쉬운 분들이 계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열린 결말이기 때문에 앞으로의 한울이와 다솜이가 나아갈 길은 한가지로 국한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상상이 곧 정답이 될 테니까요. 작 중 등장인물처럼 ‘자기혐오’는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꼭 겪게 되는 일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해결방법도 모두가 다를 테고요. 하지만 지금 이 글을 읽고 계시는 여러분이 자기혐오를 겪고 계신다면 ‘여우별’이 가지고 있는 뜻처럼 궂은날을 이겨내고 빛날 수 있는 날이 꼭 올 거라고, 항상 좋은 날이 있다가 오게 된 나쁜 날이 단지 지금이었을 뿐이라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의 현재가 좋은 날이라면 궂은날을 이겨내고 빛을 내려고 하는 여우별들의 노력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궂은 날에 가려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노력은 보이지 않을 뿐 결코 없어진 것이 아니니까요. 여러분들은 언제나 제2의 다솜이가, 제2의 한울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시고 살아가셨으면 좋겠습니다. 한울이가 자기혐오를 선생님의 도움을 통해 이겨내고 성장해나간 것처럼 누군가에게 이 작품이 성장하기 전 쉬고 갈 수 쉼터가 되었다면 저는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다만 작가로서는 개인사정으로 인한 시간 여건 부족으로 급하게 써낸 글이라 아쉬움이 남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겠지만요. 하지만 그 덕분에 퇴고 과정이 길지 않아 제 고뇌가 가장 솔직하게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조심스레 가져봅니다. 사실 주인공인 다솜이의 성격은 저와 다른 점이 많아 잘 표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이 많았는데, 지인분들께서 많은 도움을 주셔서 작품을 잘 끝마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표지 작업을 맡아준 제 친구에게도 이 글을 통해 심심치 않은 감사 인사를 전하며, 세상의 많은 혐

오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러분들의 내일을 응원합니다.



E-mail : sn.sd.oib.orbita.3689@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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