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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걸불

by 문이

여행가신 부모님은 해가 저물도록 오지 않았다. 미주는 처음으로 아궁이에 불을 떼서 밥을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만씨가 돌아오면 배가 고프고 지쳐서 사그라들었던 잉걸불이 살아나올지도 모른다. 일순씨가 밥지을 때 미주는 옆에서 그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 온 가족의 손길이 닿은, 직접 농사지어 저장해 놓은 생명같은 쌀이다. 뒤주에서 퍼온 쌀 위에 물동이의 물을 한 바가지 퍼붓고는 손으로 쌀을 휘저으며 문지르면 쌀들이 서로 부딪히며 경쾌한 소리를 내었다. 바람 소리, 비 소리, 햇빛에 영그는 소리가 삶 속을 파고드는 소리였다.

쌀에 섞인 불순물을 조리개로 몇번 돌린 후 깨끗하게 걸러진 쌀을 가마솥에 붓고 손을 넣어 물이 손등 정도에서 찰랑거리면 윤기나고 적당히 찰진 먹기좋게 부드러운 밥으로 알맞게 계량이 되었다.

소나무 마른 잎 불쏘시개에 성냥불을 붙이면 작은 불의 씨앗 하나가 열매를 주렁주렁 매달듯 순식간에 연기를 내뿜으며 큰 불을 만들어 낸다.

달큰하고도 쌉싸름한 송진 향이 퍼진다.

그 불꽃 위에 검고 마른 삭정이 가지들을 듬성듬성 올려주면 산소를 머금은 불은 날개를 닫고 활활 타올라 생쌀을 밥으로 만드는 요술을 부렸다.


정만씨 몸속 그늘진 곳 어딘가에는 어린시절부터 쌓아올린 불안, 초조, 걱정, 두려움, 억울함, 분노, 외로움 같은 온갖 꿈틀거리는 것들이 다 타서 재가 되지 못하고 언제라도 터져나올 태세로 도화선만을 기다리는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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