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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ug 09. 2021

우리집 냉장고는 말을 한다

쿠오오왁꾸워어으라왁

식구들이 다 잠든 밤, 옅은 진동과 함께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 도대체 시공을 어떻게 했길래 다른 집의 괴이한 소리 진동이 벽을 타고 오는거냐고 구시렁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층간소음이 아니었다. 열네 살 먹은 냉장고가 하는 말이었다.


“이이우웅퐈꽐꺼롸..쿠오오왁꾸워어으라왁..”


푹,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어르신, 저도 좀 도와드리고 싶은데 방법이 없대요.


작년에 기사님이 한번 오신 적이 있는데 방법이 없다고 했다. 컴프레셔를 바꾸면 조용해지긴 할 텐데 2008년생 냉장고한테 굳이 그럴 일 까진 아니라고. 기사님이 가신 후 거짓말처럼 다시 조용해져서 인공지능 냉장고라고 칭찬을 가득했었다. 그러다 1년이 못돼서 다시 시끄러워진 거다. 작년에는 그저 진동음이 좀 센 수준이라면 지금은 무슨 유언을 남기시는 것 같다.


아니다. 유언이라고 하기엔 냉장, 냉동 기능이 젊은이 못지않게 발랄하다. 기능으로는 청춘이다. 다양한 유언을 내뱉으실 때는 마음의 준비, 아니 통장 준비를 하다가도 돌덩이가 된 아이스크림을 꺼낼 때면 아직은 때가 아니구나 싶다. 그래도 이렇게 늦은 밤에 굳이 사람을 거실로 불러낼 때면 기능이고 뭐고 확 바꿔버리고 싶어 진다.


경력도, 사회적 지위도 젊은이 못지않게 짱짱한 사람들이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이 시끄러울 때가 있다. 확 바꿔버리고 싶은데 아직 짱짱해서 감히 건드릴 생각은 못한다. 본인들은 알까. 그 지껄임에 동의돼서 고개 숙인 게 아니라 잠깐만 피해 있는 거라는 것을.


멀리 갈 것도 없다. 나와 아이들도 그럴지 모른다. 조선시대는 자식이 부모 뜻을 거스르면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지만 지금은 아니다. 내가 아직 짱짱하다는 이유로 아이에게 “이이우웅퐈꽐꺼라” 를 늘어놓으면 어떻게 될까. 지금이야 듣겠지만 내 기능이 쇠하면, 아이가 내 기능이 필요 없을 만큼 자라 버리면 뒤도 안 돌아보고 떠나버릴지 모른다. 냉장고처럼 아예 교체할 수는 없으니 본인이 관계를 끊어버리겠지.


모든 관계는 유기적이다. 존중받지 못함을 느끼면서 계속되는 관계는 없다. 새벽녘 예고 없이 치고 들어오는 냉장고의 꿍얼거림에 화들짝 놀라다가도 내가 누군가에게 이렇게 예고 없이 치고 들어가서 그를 놀라게 하지 않았는지 생각한다. 방학이라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한없이 늘어지는 애들에게 한 번씩 “쿠오오왁꾸워어으라왁!”을 해버리니 말이다.


우리집 냉장고는 말을 한다. 니가 아직 짱짱하다고 해서 아무 말이나 내뱉지 말라고. 상대방이 니 말에 동의해서 가만히 있는 게 아닐 수도 있다고. 너의 쓸모가 쇠하면 너의 관계도 쇠할지 모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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