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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ug 10. 2021

죽을 거면 내일, 오늘은 안 돼

세탁기 청소

며칠 후가 이삿날이었다. 갖가지 경비 처리로 들숨에 출금, 날숨에 마이너스인데 세탁기가 갑자기 멈췄다. 죽을 거면 이사 다 끝나고 죽어! 오늘은 안 돼! 이미 최대치로 끌어다 쓰고 있는데 세탁기까지 감당할 수는 없었다.


고객센터 페이지에 셀프 점검이 있다. 뭐를 열고 얘를 청소하고 쟤를 다시 끼워주랜다. 뭐를 열었다. 시커먼 덩어리를 울컥하고 뱉더니 물이 계속 나온다. 이 작은 공간 안에서 이 많은 물이 흐르지 못하고 고여 있었구나 싶다. 고이면 고통이 된다.


고인 고통은 진한 냄새로 확인된다. 다용도실이 거대한 꼬린내에 휩싸였다. 쇼생크탈출 주인공 에디가 이런 냄새를 뚫고 탈출했구나 싶다. 황급히 창문을 열어놓고 다용도실 밖으로 나와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후우웁.    


문 닫았는데도 왜 냄새가 나지? 했더니 가지고 나온 뚜껑이 있다. 뚜껑에 트랩 같은 게 뻗어 나왔고 그 트랩 사이사이에 뭉친 덩어리들은 흡사 에어리언 알 같다. 조금 있으면 외계인이 튀어나와 주방을 점령할 거 같은 느낌. 방치했던 락스를 꺼내왔다. 락스의 유해가스? 이 뚜껑에 비하면 락스는 다우니 엑스퍼트다.


오소희 작가님이 '본질을 찾아'라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소희 작가님의 글쓰기 살롱에서는 글쓰기를 하지 않는다. 아니, 쓰긴 쓰는데 글에 대한 이야기는 안 한다. 대신 작가님이 글을 보고 사람을 말한다. 본질을 피해 나 쓰고 싶은 걸 쓰면 귀신같이 알아내고 이렇게 말한다.


본질을 찾아.
너의 가장 깊은 곳에서
해결되지 않은 그거.
그게 해결되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어.


해결되지 않은 채 깊숙이 박혀 있던 삶의 트랩을 꺼내는 순간 악취가 진동했다. 작가님의 솔루션은 강력한 락스가 되어 덕지덕지 붙은 때를 조금씩 불려 떼냈다. 본질을 뒤집는건 피곤하고 때론 긁어부스럼을 만드는 일 같았지만 결국에는 말갛게 되는 지점을 봤다.


고인 물을 빼고 트랩을 청소했더니 세탁기가 다시 작동했다. 13년이 지났어도 드럼통 내부 광택이 살아있길래 다 괜찮은 줄 알았다. 가장 밑바닥, 작고 냄새나는 이 덩어리가 해결되지 않으면 저 광택도 소용없음을 이제야 안다.


이사비용 할부 끝날 때까지만 좀 버텨라 했던 세탁기는 이사 후 1년 반이 지났는데도 쌩쌩하다. 보름에 한 번씩은 트랩을 청소한다. 이젠 락스도 필요 없다. 물로 휘휘 헹군다.


소희 작가님이 그랬다. 네 안에 고인 뭔가가 너 전체를 막아서게 하지 말라고. 수시로 들여다보고 깨끗하게 유지하라고. 그래야 자꾸 쌓이지 않을 거라고. 사람과 세탁기가 이렇게 닮을 수도 있다.   


세탁기 트랩을 돌보듯 나를 돌본다. 쌓이지 않도록, 악취를 풍기지 않도록. 원인은 여기 있는데 괜히 멀쩡한 세탁기를 통째로 바꾼다고 통장을 텅장으로 만들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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