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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ug 12. 2021

이젠 죽어도 되는데 왜 안 죽니

니가 꼭 나 같아서

쓰던 세탁기에 건조기를 설치하려면 앵글을 따로 짜야한다. 세탁기가 명을 다하면 앵글도 같이 쓰레기가 된다기에 안 샀다.


세탁기에게 이사비용 할부 끝날 때까지만 버텨달라 읍소했는데 너무 읍소를 했는지 무려 사계절을 한 바퀴 돌고서도 여름까지 왔다. 이리도 짱짱할 일인가. 이젠 죽어도 되는데 왜 안 죽니.


건조기 사용자가 공통으로 찬양하는 건 화장실 수건이었다. 건조기 돌린 옷은 때로 줄어들 때가 있는데 수건만큼은 한 시간 만에 뽀송뽀송하게 나온다나.


회사도, 학교도 셧다운 돼서 모두 집에 있으니 제일 먼저 늘어난 건 수건 빨래다. 건조'' 터줏대감이 된 수건들을 보며 건조'기'가 간절해졌다.


호텔 고급 수건도 드럼 세탁기에서 한번 돌고 오면 초록 수세미처럼 뻣뻣해진다. 하물며 수건이야 말해 뭐해. 세수하고 물기 닦다가 수건한테 뺨 맞는다. "맞기 싫으면 내게 건조기를 대령해라"라고 수건이 말을 하는... 건 아니겠고 그냥 내 마음의 소리다.


세탁기를 버리고 세탁기와 건조기 세트를 살 수도 있다. 그런데 '세탁'이라는 본연의 임무를 완벽하게 하고 있는 얘를 내치는 건 내키지가 않았다. 내가 나를 내치는 거 같아. 응? 왜?


성공학, 자기계발 등의 이야기가 요즘만큼 호황일 때가 있었나 싶다. SNS에서 기록적인 조회수를 내는 건 "이것을 알면 입금액 뒷자리에 0이 더 붙습니다" 식의 이야기. 사업을 확장하기 위한 마케터적 글쓰기 등, 성공의욕을 고취시키는 글들이 쏟아져 나온다.


우리 집 세탁기가 '세탁'이라는 본질을 충실히 수행하고 있는 것처럼 나 역시 본질로 지키고 싶은 '쓰기'를 충실히 수행하고 있다. 단지 세탁기가 건조기와 세트를 이루지 못했듯 나의 쓰기도 마케팅이나 성공과 세트를 이루진 않는다. 세탁기를, 나를 아예 새걸로 바꿔버리지 않는 한 세트가 될 일은 영영 없을 것이다.


폐가전 수거업체 전화번호를 검색하다가 창을 닫는다. 니 본질을 충실히 지키고 있으니 나도 널 배신하지 않으마. 우리 되는 데까지 같이 가자. 수건이 뻣뻣하면 좀 어때. 물을 흡수한다는 본질은 잘 지키고 있잖아?


언젠가 세탁기가 수명을 다해서 새로운 세트를 산다고 해도 "이렇게 쉬운 월 천 수익을 왜 안 해요?" 식의 글과 내가 세트가 되는 날은 안 올 것이다. 그래도 일단은 토닥이며 같이 가보려 한다. 우리 삶에 '멋지게 살기'가 의무이진 않을 테니. 그냥저냥 살아있어도 살아있으므로 소중한 삶일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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