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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ug 16. 2021

마시는 자, 그 무게를 견뎌라

채우기

척, 갖다 대면 와라락, 나오는데 동그랗고 예쁘단다. 투박한 네모 모양이 아니라서 더 대접받는 느낌이라나. 신형 정수기 얘기다. 우리 집 정수기는 얼음은커녕 시원한 물도 안 나온다. 시원하게 마시려면 물통에 물을 채워서 냉장고에 넣어야 하고 얼음 트레이도 확인해야 한다.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아이들의 새로운 모습을 봤다. 얘네는 '내가 마지막 남은 물을 마셨으니까 채워야지'라는 생각을 못했다. 빈 물통을 아무렇지도 않게 식탁에 턱 올려놓고 제갈길 갔다. 그 '턱' 소리에 내 이성의 끈도 '턱' 끊겼다.


"먹었으면 채우라고!! 너네가 할 수 있는 건 스스로 해야 되는 거라고오오오오."


자매품 "얼음 트레이를 돌려도 얼음이 안 나와!"도 있다. 간신히 이어 붙이려던 내 이성의 끈을 홱  돌려버린다.


"이 집에서 나만 얼음을 안 먹는데 왜 그걸 나한테 말하냐고오오오오."




나의 우아함을 지키는 건 역시 아이템빨! 하며 쇼핑창을 촤라락 열었다. 동그란 얼음 그거 내가 사고만다!


엄지와 눈동자의 불꽃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다. 살림의 어원은 '사람을 살리다'에서 왔다는데 돈 발라서 해결하는 게 맞나. 새 정수기를 사면 쓰레기를 만드는 건데 살리는 살림을 하겠다고 지구를 죽이는 일을? 식의 꼬리물기. 쇼핑창을 닫았다.


아이들에게 살림을 조금씩 가르쳤다. 자취 포함 20년 살림을 한 나도 가르치면서 배운다. 기계적으로 했던 살림에 작은 허들이 무수히 많다는 것을. 살림을 가르치려면 생각보다 아주 작은 단위로 쪼개야 한다는 것을. 그 작은 단위에는 '눈앞의 이걸 지금 하자'도 포함이라는 것을.


자기주도학습이 별거냐 싶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미루지 않고 그냥 해버리는 것, 그게 시작이지 않을까. 하버드 무슨 연구에서도 어릴 때부터 집안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아이들의 학업성취도가 높다지. 무슨 상관관계가 있을까 했는데 살림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무수한 허들을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촘촘한 허들을 큰 힘 들이지 않고 처리하는 감각, 꼭 학습까지 가지 않아도 그냥 삶 자체에 필요한 감각이다.


이제 이 집에서 마시는 자는 그 무게를 견딘다. 아니, 견디는 줄도 모르고 그냥 해버린다. 아이들의 살림력이 그렇게 한 뼘 자란다. 나의 살림 퇴직이 그렇게 한 뼘 가까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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