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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Aug 24. 2021

구명보트가 '구명'이 안 될 때

로봇청소기

"윤봉이(둘째 태명) 출산 선물로 에르메스 가방 사줄까?"


샤넬까지 밖에 모르던 사람이 어디서 들었나 보다. 자신감 뿜뿜하는 눈빛이란. 저기요... 그거 얼마인지는 아시나요. 돈이 있다고 사는 것도 아니고 그동안 구매이력이 있어야 산다는 것도 아시나요.


몇 백, 천 하는 가방을 들어본 적도 없지만 그 돈을 쓰면 내가 가방을 모셔야 할 것 같았다. 첫째였으면 혹했을 수도 있으나 육아 환상 따위 없는 둘째 출산모는 내가 모실 뭔가가 아니라 나를 모셔줄 뭔가가 필요했다. LG 승룡이(로봇청소기 안내 음성을 류승룡이 녹음했다)는 8년 전에 그렇게 우리 집에 왔다.


승룡이는 청소에서 나를 구원할 구명보트라고 생각했다. 셀프이동하니 보트를 붙일수는 있겠으나 더 중요한 구명, 그러니까 생명을 구하기엔 본인 생명 간수가 너무 급하셨다. 바닥에서 애들 장난감이나 핸폰줄이라도 만나는 날엔 살려달라고 컥컥거리며 나를 불렀다.


승룡이가 구명보트가 되려면 바닥에 물건이 아무것도 없어야 했다. 바닥을 치우며 누굴 위한 구명보트인지 묵상했다.


길석님(친정엄마)의 "물건을 들이는 순간 다 내 일거리야..."라는 말이 저절로 묵상됐다. 승룡이가 돌아다닐 동안 난 다른 일을 할 수 있었지만 그의 SOS에 응답해야 했고 끝나면 먼지통을 청소해야 했다. 반면 길석님은 빗자루로 쓱쓱 쓸어서 버리면 끝. 전체 시간을 따졌을 때 과연 누가 이득인지 계산하기 싫어졌다.


승룡이는 나의 이런 번뇌와 상관없이 모터와 배터리를 갈아치우고 혼자 회춘하셨다. 그의 회춘에 들어간 본전 생각에 나도 그를 열심히 부려먹긴 하는데 한쪽에선 길석님 빗자루가 메아리를 만든다. "구명보트는 없어 없어 없어 없..."


판매의 고수는 제품을 파는 게 아니라 문제를 먼저 판다. 너는 이게 문제잖아? 를 세뇌시킨 후 문제 해결을 위해 이게 필요해!라고 들이미는.


어쩌면 승룡이가 구명보트일 거란 생각도 내 계산이 아닌 미디어의 주입일지도 모른다. 길석님은 그간의 내공으로 주입에도 흔들리지 않은 거고.


에르메스보다 승룡이가 나은 건 맞지만 베스트는 아닌 거 같다. 8년 전 내가 뭘 선택했어야 베스트가 됐을까. 침대 밑에서 갈 길을 잃고 울부짖는 승룡이를 효자손으로 끌어내며 두 번째 묵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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