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고 가장 많이 시간을 쏟는 것들은 나만의 고유한 아이템이 되는 시대라고 한다. 나의 시간을 가장 많이 쓰는 것? 살림이다.
그럼 살림을 좋아하나? 아니다. 살림 노동자로 십 년 넘게 살았지만 십 년 내내 살림은 ‘빨리 해치워야 할 무엇’ 이었다. 누구는 살림을 하다보니 인플루언서가 됐다지만 내게 살림은 그저 인플루엔자였다. 끝없는 반복에 나를 가두는 바이러스 같은 존재.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했던가. 십 년이면 무생물이 생물이 되는 날이 온다. 십 년 넘게 나와 함께 한 살림들이 그랬다. 십 년까지는 의뭉스럽게 아무말 없이 있다가 십 년이 지난 어느 순간부터 한마디씩 툭툭 던진다.
어쩌면 얘네는 우리 집에 온 그날부터 내게 말을 걸었을 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그걸 듣는 귀가 없었을 뿐. 왜냐면 우리 집에 들어온 신입 살림들도 오자마자 떠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가 들을 줄 아는 사람이란 걸 신입들도 아는 모양이다.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도 한번 물꼬 튼 사람에게 계속 하게 된다. 앞뒤 설명없이 그냥 편하게 말할 수 있으니까. 살림들도 그래서 내게만 시끄러운 거 같다. 이 살림들과 함께 사는 우리 집 다른 세 명에게는 조용한거 보면 말이다. 나의 살림들은 시끄럽게 침묵중이다.
그들의 수다가 온몸을 촘촘히 묶어버리는 듯한 기분이 들 때가 있다. 딱히 보이게 묶은 건 아니어서 풀어버릴 수도 없는, 그럴 때마다 해독 주술을 외우듯 글을 썼다. ‘이거 먹고 떨어져라 이것들아’ 하는 마음이었다. 주술은 꽤 효과적이어서 살림들은 난감한 표정으로 나를 풀어주곤 했다.
누구는 말한다. 나이가 몇인데 아직도 의인화 놀이를 하냐고. 그건 애들 동화에서나 나오는 이야기 아니냐고.
맞다. 사물이 말을 거는 건 4학년도 유치하다고 코웃음을 칠 이야기다. 4세까지 내려가야 그나마 좀 먹힐라나? 그러니 40살 넘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다. 하지만 유치한 의인화가 삶의 보석같은 답을 툭 던진다면 현대판 연금술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연금술사까지 아니어도 좋다. 어떤 심호흡으로도 헝클어진 마음이 자리를 찾지 못할 때 이들의 말없는 수다로 마음의 윤곽을 가다듬을 수 있다면, 그래서 반나절의 방황으로 끝낼 수 있다면 그걸로 족하다.
그런 살림들의 수다를 나눠보려 한다. 유치한 사물 의인화 이야기가 될지, 마음의 윤곽을 다듬어 줄 지, 보석같은 답이 될지는 이제 읽는 사람의 영역으로 넘어갈 것이다. 어느 영역에 있든지 최소한의 다정함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