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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음감 May 10. 2022

건조대를 접는 가장 빠른 방법(건조기 아님)

공간을 내어준다는 것은

우리 집 세탁기는 꽉 채운 열네 살이다. 언제 명을 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세탁기 위에 장을 짜서 건조기를 올릴 수는 없었다. 건조기 생각은 접었고 건조대는 접지 못했다.


친정엄마는 빨래를 말릴 때만 건조대를 펴고 빨래 정리할 때 건조대도 같이 접어서 넣어버린다. 건조대가 없는 친정 거실은 항상 정갈했다. 나도 그럴 줄 알았다. 친정엄마의 빨래는 2인분이고 우리 집 빨래는 4인분이라는 변명으로 나의 예상이 빗나갔음을 변명해 본다.


일단 빨래 정리를 끝내지 못했는데 다른 일이 치고 들어왔다. 치고 들어오지 않으면 내가 지겨워서 끝까지 못했다. 날이 더워지면서 다음 날 빨래가 또 생겼다. 건조대를 접을 날은 내 복근이 선명해지는 날처럼 결코 오지 않을 거 같았다.


어느 토요일 아침, 시부모님이 오신다는 전화를 받았다. 코로나와 장거리 운전 못함과 기저질환의 콜라보로 두 해 동안 미뤄온 집들이가 세 시간 후에 시작된다는 신호탄이었다. 침대에서 멀리뛰기하듯 일어난 나는 제일 먼저 건조대의 빨래를 소파에 던져놓고 건조대를 접었다.


파삭한 봄햇살에 빨래는 이미 다 말라있었으나 건조대가 거기에 있으니 토요일의 나처럼 빨래들도 그저 거기에 누워있을 뿐이었다. 시부모님의 행차는 반년 넘게 한 번도 접지 않은 건조대를 3분 만에 접게 했다. 소파에 빨래를 쌓을 수 없으니 얘네도 본인들 서랍으로 발길을 돌렸다.   


건조대를 접으니 그 밑의 매트 먼지도 닦고 그 옆의 창틀도 닦았다. 갑자기 거실이 넓어졌다. 이게 이 집 거실이었구나. 두 해 동안 매일 본 거실이 달리 보였다. 내친김에 나는 다용도실을, 남편은 안방 베란다를 청소했다. 50리터짜리 쓰레기봉투가 꽉 찼다.


주말 아침에 며느리가 분명 늦잠을 잔다는 걸 아는 시어머니는 점심으로 같이 먹자며 김밥을 한가득 싸오셨다. 어머님 텃밭에서 혼자 자란 별꽃 나물도 무쳐오셨다. 별꽃은 알고 있었지만 꽃 피기 전에 나물로 먹을 수 있다는 건 몰랐다. 이게 먹는 거였어요? 라며 김밥 하나에 별꽃 나물을 수북이 올려먹는 나를 보며 시어머니는 별꽃처럼 웃으셨다.    


웃는 시어머니 뒤로 광활한(건조대를 치운 몇 시간 동안은 거실이 광활해 보였다) 거실이 펼쳐져 있었다. 당연해서, 필요해서 건조대가 거실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다른 생각을 한 적이 없는데 접어 놓으니 이리도 광활해진다. 당연한 건 없었다. 친정처럼 수시로 접고 펴는 쪽이 당연하게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마음 한쪽을 차지하는 건조대를 생각했다. 누구를 향한 원망, 아쉬움은 그가 내게 준 당연함이니 한쪽에서 그렇게 자리를 차지해도 괜찮은 줄 알았다. 시간 지나면 자연히 없어질 구조물쯤으로 여겼다.


건조대를 접어서 넣어놓지 않으면 거실 한쪽을 점령한다. 마음속 구조물도 내가 의지를 갖고 접지 않는 이상 마음 한쪽에서 터줏대감이 되어가고 있었다. 설사 또 펴야 할지라도 한번 지나갔으면 착착 접어서 넣어놓아야 했다. 백 평의 한 평은 내어줘도 괜찮겠지만 열 평의 한 평은 지분이 크다. 백 평이 못 될 거면 있는 평수라도 넓게 써야하지 않겠는가.


넓은 거실에서 시어머님과 둘째는 공기놀이를 했고 아버님은 그 옆에서 초저녁 잠이 드셨다. 낮은 코골이와 공깃돌의 챕챕 소리와 혼자 떠드는 텔레비전의 도란도란이 썩 잘 어울리는 토요일 저녁이었다. 이게 다 건조대를 접어서 생기는 일 같았다. 게으른 며느리에게도 별꽃 나물을 챙겨주는 시어머니의 다정함에서 생기는 일 같았다.


시부모님이 가셔도 건조대를 수시로 접어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건조대를 접으며 내 안에 방치된 그 무엇도 같이 접어버려야지 했다. 하루 지나 금방 또 펴질 걸 안다. 그래도 접힌 동안의 광활함을 수시로 누리고 싶다. 그래야 자리 차지한 그것들에게도 조금 너그러워질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건조대는 접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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