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쓰는 창세기_13
물 끓는 소리에 묻힌 숨결을 삼키며, 아브람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불 위에 남은 향은 기도를 닮은 연기처럼 천천히 피어올랐다. 그 밤, 그는 단 한숨도 자지 않았다. 별이 뜬 산허리를 바라보다, 새벽이 되자 조용히 이삭의 이름을 불렀다.
“이삭아.”
그 목소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사래는 부엌 문턱에 서 있었다. 그가 부르는 소리를 들은 순간, 사래는 눈을 감았다. 그녀의 어깨는 떨렸으나, 끝내 무너지지 않았다. 아브람의 목소리에 떨림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 사래는 신이 이긴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진 것이라는 걸 알았다.
산길은 생각보다 가팔랐다. 아브람은 짐을 지고 앞섰고, 이삭은 뒤를 따랐다. 말이 없던 둘 사이에 바람만 드나들었다. 이삭은 물었다.
“왜 오늘은 우리 둘만 가요?”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러 가는 길이다.”
“제물은요?”
“산에서 준비될 것이다.”
이삭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금세 다시 아버지의 얼굴을 훔쳐보았다. 아브람의 등은 평소보다 조금 더 굽어 있었고, 걸음은 꾸준했지만 무거웠다. 그 무게는 노쇠함이 아니라 마음의 것이다.
산에 다다른 것은 해가 중천에 오른 뒤였다. 아브람은 장작을 올리고 제단을 쌓기 시작했다. 돌 하나하나를 올리는 그의 손은 마치 무덤을 만드는 자의 손 같았다.
“아버지, 제가 도울게요.”
이삭은 돌을 들어 올렸다. 그 돌을 제단 위에 얹으며 웃었다.
“이렇게 하는 거 맞죠?”
그 미소에 아브람은 숨이 막혔다. 이삭은 이제 더 이상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키는 이미 아브람을 넘었고, 어깨도 넓었다. 그러나 그 미소만은 여전히 아버지를 신뢰하는 아이의 것이었다.
아브람은 칼을 꺼내 손끝으로 쥐었다. 손은 떨리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신의 뜻을 따르려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산 아래를 향해 있었다. 마치 마지막으로, 그 여인을 떠올리는 듯했다.
사래는 천막 안에 앉아 있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수를 놓던 바늘도, 찻잔도, 장부도. 그 어떤 도구도 사래의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녀는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고요하지 않았다. 심장은 귀 뒤에서 뛰었고, 목 뒤는 젖어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마른 울음이 등줄기에서 끓어올랐다. 발끝부터 무너지는 그 감정은 무너지면서도, 끝끝내 ‘믿음’이라는 이름을 붙잡고 있었다.
제단 위에 장작이 쌓였고, 이삭은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아브람은 칼을 들고 그 앞에 섰다. 손은 여전히 떨리지 않았다. 하지만 이삭은 아버지의 눈을 보며 문득 그 무언가를 눈치챘다.
“아버지… 왜 그러세요?”
아브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이삭의 이마에 손을 얹었다. 그 손이 너무나도 조용히, 부드럽게 내려왔다.
칼이 번쩍였다.
그것은 번개의 형상을 닮은 찰나였다.
아브람의 손은 이삭의 목을 향해 정확하게 내려가고 있었다.
산의 공기가 갑자기 얇아졌다. 피 냄새도 없고, 울음소리도 없었다. 시간이 숨을 참았다.
이삭의 눈은 아버지를 향하고 있었다. 그 눈에는 공포가 없었다. 믿음과 의심, 이해와 분노, 모든 감정이 한데 얽혀 있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하게 자리한 것은 하나—“사랑”이었다. 그 아이는 마지막 순간에도 아버지를 믿고 있었다.
칼끝이 이삭의 목덜미에서 반 뼘쯤 떨어진 순간—
“멈추어라, 아브람.”
그 목소리는 뇌가 아니라 뼈에 울렸다. 산 전체가 무너지는 듯한 울림이었다. 공기 중의 모든 입자가 정지한 채, 그 한 마디만을 기억했다. 칼은 허공에서 멈췄고, 아브람의 손이 덜덜 떨렸다. 떨림은 손에서 팔로, 어깨로, 온몸으로 번져갔다.
아브람은 무릎을 꿇었다. 그의 이마가 차가운 바위에 닿았다. 눈물이 아닌, 진액처럼 쏟아진 무언가가 그의 얼굴을 적셨다.
“아니되노라... 아니되노라... 그 아이는 너의 믿음이 아니라, 나의 선물이다...”
신의 음성은 바람이 되어 아브람의 등을 밀었다. 아브람은 그제야 칼을 내려놓았다. 손에서 칼이 떨어질 때, 마치 손가락 하나가 부러져 나가는 듯한 통증이 따라왔다. 그 고통은 해방이었다.
이삭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의 숨결은 얕고 불안정했지만 살아 있었다. 살아 있었다.
“아버지…”
아브람은 아들을 끌어안았다. 칼에 피가 묻지 않은 대신, 두 사람의 살은 서로의 떨림으로 흠뻑 젖었다.
이삭은 묻지 않았다. ‘왜 그러셨냐’는 말은 없었다. 아브람은 대답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므로 그 침묵은 오래 남았다.
산 아래로 내려가는 길 동안, 아브람은 단 한 번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신이 요구한 것은 제물도, 죽음도 아닌, 그의 전부였다는 사실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사래는 상단 입구에 서 있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그녀를 향해 길게 늘어졌다. 이삭은 달려가 사래의 품에 안겼고, 아브람은 한 발 늦게 다가왔다.
사래는 아브람의 눈을 보았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목소리를 묻지 않았다. 다만 그 눈빛 속에서 이미 다녀온 길의 고통과, 끝내 이루지 못한 명령의 흔적을 읽었다.
“가장 높은 자는 가장 낮은 데서 무릎 꿇는 자라는 걸…”
사래는 중얼이고, 아브람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밤이 왔다. 그 밤은 오래도록 타는 불 같았다.
꺼지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은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