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누구인가 지난해에 봄에는 동학사을 갔는데 날씨가 바람이 불고 비가
나는 누구인가 지난해에 봄에는 동학사을 갔는데 날씨가 바람이 불고 비가 오고 다시 내려왓다
부탄에 다녀왔을때 그때 혹시 하는 생각이 든다. 그때 나에게는 두명의 어머니가 있었던 것은 아닌지?어쩔때는 날카롭게 이야기하시고 어쩔때는 부드럽게 아무말씀이 없으셧는데 나에게 하소연 하듯이 이야기 한적 도 있다.
어느 날은 느닷없이 나을 키운 값을 계산한다고 하시고 어쩔때는 어머니가 어떤 남자가 있는데 알고 보니 여자가 네명이고 여자들이 각자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소연을 했다.
나는 부탄에서 돌아와 처음에는 피곤해서 잠만 잤다.그런데 엄마가 청소을 하신다고 밤에 안들어고 어버지는 건너방에서 자시고 ....
내가 왜 돈이 생기면 쌀부터 사고 식료품을 사두냐면 어머니가 우리 어린시절에 안양으로 이사을 가셔서 어려운 시절은 보내셧는데 그떄 가지고 있던 옷을 가지고 나가서 쌀을 바꾸셨다고 한다. 그런데 아무리 돌아다녀도 그옷을 준다고 해도 쌀을 주지 않았다고한다. 그런데 어느 한 쌀가게에서 총각 한사람이 쌀은 준다고해서 쌀을 받아와 집에서 밥을 해서 우리 식구들을 챙기셨다고 한다.
옛날에는 쌀값이 지금처럼 싸지 않고 비쌌다고한다. 대전에 인동 쌀가게 곡물가게가 있는데 그옆에 대전 3.1운동 기념비가 세워져있다. 혹시 일정시대에 가뭄은 들고 쌀가게 하는 사람들이 쌀을 주면서 이자을 많이 받고 해서 그들이 일본사람과 손을 잡고 있었던 지주들이 아닌가 싶다.
그당시에는 러시아에서 문학이 들어오고 음악이 들어와서 지식인들이 혹시 사회주의 생각을 하고 농민운동의 단초가 된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그당시에 소련에 볼세비키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안되었던 시점이다. 우리의 역사는 좀 왜곡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든다. 일정시대에는 쌀값이 비싸고 콩값이 싸기에 교도소에 들어간 사람들은 콥반쌀반해서 콩밥을 먹었으니 충분한 영양에 감옥생활을 지탱한 것이 아닌가 생각도 해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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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어머니는 그당시에 우리에게 밥을 먹이시고 아버지는 일을 하고 오시면 항상 우리을 무릅에 앉히고 머리삔을 사가지고 오시면 양쪽에 꽃아주셧다고 한다.어머니와 나는 동생들과 같이 방에서도 이야기을 했지만 주로 부엌에서 이런저런 이야기을 햇다.
어머니의 첫사랑이야기며 아버지을 만났을때하며 그리고 나에게 무엇이든 해보라고 하셧다. 되든 안되든 끝까지 밀어부치라고 말이다.
그리고 동생들이 잘못하시면 나에게 책임을 물었다.너가 첫째로서 모범을 보여야지 너가 잘못하니 동생들이 잘못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나을 떼리셧다. 동생들 보는 앞에서 말이다.
언젠가는 나을 때리시고 나에 누워계시니 머리을 쓰다주시며 약을 발라 주셨다.그리고 아버지을 할머니가 잘못키웠다고 너는 반드시 양부모밑에서 자란 사람에게 결혼을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을 하셧는데 나는 그것을 어기었다. 그때 상황이 묘하시다.
내가 만난 사람이 어머니 한분이엇는데 왜 자꾸 만나라고 했었는지? 밤중에 오는데 안나가려고하니 그래도 나가서 만나야 한다고 하고 아버지와 연애시절을 이야기 해 주셧다.아버지가 오면 여관에서 만났다고도 이야기 하셧다. 한밤중에 오고 나중에는 날씨가 기상이변이 있어서 눈이 온다고 하자 어두운 밤에 운전하기 힘이든니 나에게 돈을 주면서 나가보라고 했다.다음날 낮에 부산으로 내려가라고 말이다.
애아빠는 점점 말이 없어졋고 이상하게 밤에 왔다. 애아빠을 만나는 도중에 엄마가 선을 보라고 햇다. 선을 봤는데 나는 별로 맘에도 안드는데 나가보라고 하고 말이다.그사람은 몇번 안만나고 연락이 끊겼다.
느닷없이 어머니가 애아빠을 만나지 말라고 난리가 났다. 여동생이 애아빠에 대해서 조사을 해보니 안좋다고 말이다. 애아빠는 느닷없이 인천에서 전화을 햇다. 인천에서 일을 하게되었다고 기숙사에서 전화을 했었고 그리고 애아빠와 부산에서도 만났을때 .....
롯데 시네마에서 본 영화가 생각이 난다. 어떤 사람이 일을 하는데 있는 집애들이 부모와 달리 행실이 안좋은데 그 사람의 앞을 막는 이상한 영화 였는데 외국영화였다.그리고 나에게 옷을 사준다고 해서 거절했다. 왜 데이트을 하고서 옷을 사준다고 하는지 이해가 안갓다.
첫만남도 대전에서 만났는데 내 핸드폰을 보더니 느닷없이 핸드폰을 사주겟다고 중앙로에서 핸드폰을 사준다고 하는것이 아닌가 ?거절했다.남녀간에 데이트에 무슨 선물이라는 생각을 햇다.
우리때 1980년대 1990년대 데이트는 남자가 데이트비용을 다 되기는 한다. 나는 남자애들이 사는 것을 다 잘먹어 주었다.지금처럼 남녀가 공동으로 돈을 내는 것이 아니었다. 데이트을 할려면 남자는 돈이 있어야 햇다애기가 . 여자는 잘 차려입고 나가고 말이다.
나는 외국을 다녀오고 주로 대전에서 도서관을 오가고 일을 하기도 하고 조카들을 보아서 요즘사는 이야기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우리집은 조카들이 있으면서 티비는 아버지가 보시고 저녁식사을 한 이후에는 다른 방으로 가서 조카들이 책을 보거나 학교숙제등 공부을 해서 그것을 봐주느라 티비을 볼수없엇다.
나는 이나이가 되도 티비 리모콘을 잘 다루지 못한다. 아버지 살아계실때는 아버지가 텔레비젼 리모콘을 다루었고 어머니가 계실때는 어머니가 리모콘을 다루고 그다음에는 딸이 리모콘을 다루었지만 우리는 티비을 많이 보는 편이 아니다. 어미니가 분가을 하셔도 우리집에 자주와서 있었다. 낮에는 그래서 돈도 필요햇지만 어머니가 우리집에 오셔서 신문도 보고 텔레비젼도 보셨다. 여동생이 내려오기전에는 자주 집에 오셨다.어쩔때는 밥을 드시고 가시고 어쩔때는 그래서 차을 타서 드리고 했다. 커피잔을 태평시장에서 사서 그 찻잔에 딸 친구가 오면 차을 타주고 어머니에게도 다양한 차을 타주었다.
한데 이상한 일을 저쪽집에서 한 말도 있고 했는데 이집에 오셔셔 무슨일인지 자꾸 싸우시고 서로 욕을 하셧다. 또 이상한 점은 내가 애을 낳고 대전에 왔을때 애가 필요없다고 난리가 났다.나을 데리고 대전에 온 사람은 어머니와 아버지다. 그리고 연락도 없던 여동생도 집에 와 있고 다들 나에게 멀리하는데 큰 남동생 아들이 내옆에 와서 누웟다. 애기가 자면 내 옆으로 왔다. 그러면 나는 이 남자 조카애을 데리고피시방에 가서 한시간있다가 왔다,그리고 어머니가 하도 힘들게 하고 애아빠가 전화도 하고 하다가 애아빠가 나을 데리려 왔다. 애아빠는 그랫다. 자기 어머니가 곰국을 끓여주고 하실거라고..부산에 가닌 왠걸. 나는 애을 데리고 버려진 것이었다.
이웃집에서 그런 이야기을 햇다. 서울에서 어떤 여자가 와서 곰탕을 먹고 갔다고 말이다. 애아빠는 처음에 나을 만나면서 자꾸 애가 혼수품이라고 이야기하며 무슨말이 오고 갔는지 ...애아빠는 게임을 잘해서 게임대회도 나갔다는 이야기을 햇다. 게임을 몇개나 할 줄 아냐고 부탄에서 물어온 사람이 있었다.
내가 부탄에서 공항에 도착했을때 이상하게 어머니가 안나오시고 아버지가 나오셔서 계속어먼니욕을 하시며 기차을 타고 내려왔었다. 어머니는 집에서 잠을 안자고 있었고 일을 하신다며 나갔다가 아침에 들어오셔서 나는 빵을 먹고 싶은데 주구 장창 미역국을 끓여대셧다.그리고 어머니가 어떤일이 있엇는지 모르겟지만 집에 어머니가 검정백이었는데 내가 아는 어머니는 백을 드시지 않으셧다.그리고검정 고급스웨터가 있었다.그리고 남동생이 갑자기 세단을 몰고 나타났다.
코바 후배가 마산인가 어디에서 UNV에 대해서 알고 싶다고 올라와서 대전고속버스터미널에서 만나는 데 느닷없이 막내남동생이 검정 세단을 끌고 나와서 그자리에 앉게 되었다.그리고 나서 남동생은 이혼을 하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사업을 한다고 하면서 다른 여자도 만나고 하더니 자기딸을 우리집에 데려다 주었다. 그때 만나는 여자을 집에 데려왔엇는데 키가 상당히 컸다. 그러다 동생이 큰집에 들어갔다. 정황상 다른 여자을 볼일이 없엇는데 어머니는 동네사람들의 진정서도 받고 해서 남동생이 형을 받았다. 남동생은 나에게 억울하다고 했다.그리고 대구에서 왔다는 여자는 웃고 있었다.
나중에 대구에 가서 보니 대구에는 염색공장등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많이 들어와서 일을 한다는 것이다.막내 남동생은 대전 근교에 가구만드는 공장에 외국인 노동자가 들어와 있다고 이야기 하고 어느날은 배을 움켜지고 들어왔었다.
나는 교차로에서 빈들교회에서 외국인들에게 봉사활동할 수있는 사람들을 모집한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갔다.평상시 일요일에는 그곳은 중국인들이 대다수였고 그교회에서는 중고옷을 창고에 쌓아두고 외국인들에게 나누어 준다고했다. 그교회는 어덕배기 비슷한 곳에 있었던 것 같은데
신탄진에 공장 기숙사에 산다는 외국인 노동자을 만나러 가는데 같이 가자고 햇다. 키가 작았다. 키가작은 목사였고 저녁때가 되서 신탄진의 어느 공장에 가니 우즈배키스탄 사람이 먼저 나중을 나와서인사을 하고 방문했다가 다음에는 목사인가가 주택가에 사는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만나러 갓다. 한명이 아파서 누워있고 주택가에 방이 세개였는데 한사람이 한방에서 사는 것인지 늦가을이었나 집안공기가 너무 차가웠다. 밖에 나가서 과자와 빵을 사다주고 나왔다.
문제는 그다음이였다. 그 다움주인가 빈들교회에 갔는데 그 외국인과 일을 하시는 분이 전화통화을 하는데 경찰과 통화을 해서 나는 노이로제가 걸렸다.외국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목하에 그들을 감시하는 것은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빈들교회에 안간것은 나는 1990년대 초만 생각을 해서 외국인 근로자들이 힘들것이라고 생각을 햇는데 그곳에 대부분 중국인이나 연변교포들 같았는데 나보다 더 잘 입고 자동차을 타고 왔다 갔다 하고 있었다. 오히려 나에게 안좋을 것 같아서 안갔다. 나는 그당시에 대화동에 빈들교회을 갈려면 대전역까지 가서 버스을 갈아타고 가는데 말이다.
이때가 1998년과 1990년대 이야기다.그리고 그당시에 용두동에 남동생이 이혼을 하고서인가 자기가 사는 집을 오라고 해서 갔는데 주택가에 침실하나에 부엌과거실이 연결된 방이었다.그리고 집에서 하는 큰 러닝메이트기계가 있엇다. 집주위에는 중국인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지나해에 부동산분양임대때문에 용두동을 돌아보았는데 그들은 중국인이 사는지 모른다고 햇다.ㅣ
방글라데시 아카데미에서 그때 우리만 방글라어을 배운것이아니다. 그때 잠깐 어떤 사람이 인사을 했다. 그때 우리을 가리키던 무자디드 샤햅이 자기가 방글라언어을 가르치는 중국인 기자라는 것이다. 신화통신이었든가 잘 기억은 나지 안는다,. 같은 동기중에 하나는 다카대학에서 방글라언어을 배우는데 북한사람과 같이 배운다고 했다.
우리가 방글라데시 봉사단에파견이 된 초장기에1993년에 방글라데시 대사관에서 방글라데시정부에 영문레터을 담당하는 방글라데시 보좌관이 있었는데 그사람은 그전에 북한대사관에서 일을 햇다고 한다.
그리고 방글라데시에서 돌아와서 인가 여동생이 나에게 이런말을 햇다. 기차안에서 중국인을 만났는데 사람이 좋앗다고 말이다.여동생은 내가 방글라데시에 있을때 연락이 왓었다. 자기 일본에 가서 일본어 연수을 받는다고 ...
그리고 내가 서울에 갔을때 여동생과 같이 살았는데 여동생이 을지 외국어출판사에서 어학교재을 만들고 있었다. 하지만 여동생은 내가 만드는 9개국여행회화책과 여행정보집은 만들지 말라고 충고을 햇다. 제3세계언어책은 상품성이 없다고 말이다. 실재로그당시에 을지서적에 한 기둥에 맨 아래칸에 인도네시아어회화책은 위에 먼지가 쌓여있었다.
그래도 교보문고에 외국어 서적에 가면 콜린스나 론리 플랫같은 책들은 자꾸 나을 해도 된다고 얘기햇었다. 방글라데시에 첫 코디네이터인 이문호씨는 네팔에서 양잠을 햇는데 론리플렛방글라데시 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이야기도 한적이 있다.이문호코디는 대사관에서 봉사단이외의 일을 시킨다고 나에게 이야기 햇다. 그때는 무슨 말인지 알지을 못했다.
한마디디로 나는 나을 보호해줄 조직과 스폰서가 없이는 외국에 안나간다는 것이다. 국내도 웬지 모르게 어려운 위기을 많이 넘기었다.
내가 부탄에서 돌아와서 힘든 순간에 김치만 먹고도 버티면서 인터넷방에서 세계월드퍼럼인 다보스포럼을 동영상으로 듣고 세계지식포럼을 대전에서 들으러 가면 어머니는 그당시에 천원한장을 내미셧다.나는 어쩔떼는 동전을 가지고 가지고 햇다. 벌써 30년이 다되어 가는 이야기다.
부탄에서 처음에 와서는 한밭도서관에 가고 그곳에서 꼬마애들에게서 이메일에 아이디을 만드는 것을 배웠다. 그당시에 한밭도서관에 컴퓨터 룸은 햇빛이 잘드는 곳에 있었고 국민학교애들이 많이 와서 컴퓨터을 햇다. 나는 이곳에서 각종회사와 단체, 국제기구등을 검색했었다. 그리고 내가 인터넷을 검색할때마다 나오는 웹주소을 처음에는 그냥 넘어가다가 노트을 사서 하나하나 적었은데 그노트가 완성이 되고 사라졋다.그리고 그다음에는 작은 수첩같은 노트에 웹주소을 적었는데 그 주소도 사라졋다.그리고 그당시에 한밭도서관에 컴퓨터을 검색할때 혹시 인쇄한것은 아닌가 의심도 한다. 아니겟지 하지만 혹시나 싶어서...그리고 그때 누군가가 지켜보는 듯한 느낌이 들떼가 있었다. 그러다가 정부에서 근로사업을 펼치는데 혹시나 싶어 지원했더니 임업연구원으로 되엇다. 그곳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외에 다른 팀에서 오라고 해서 상사에게 이야기 했는데 연결이 안되어 대전으로 내려왔다. 그곳에서는 어느 길다란 사무실에서 혼자 일을 하는데 충남대 출신이라고 사람들이 와서 인사을 하고 갔다.나중에 알고 보니 FAO한국사무실이 임업연구원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부탄에 있을때 서울대 연구팀과 부탄에 임업연구원이 공동 연구 논문을 쓴다는 소식을 들엇다. 활엽수인가 ? 아무튼 참 힘든 시간을 보냈다.
여동생이 서울에서 수술을 받고 내려와서 어머니을 요양보호사을 부르게 했다.어느날은 가니 어머니가 중국식 양말이라는 것을 신고 앉아있엇다.나는 어머니에게 죽기전에 조산원에 대해서 글을 써달라고 햇다.
텔레비젼에서 예전에 오래전에 방영이 되었다. 프랑스에서는 애기을 수중분만하는데 가족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애가을 집에서 낳는다는 내용인데 다쿠멘터리로 방영이 되었다. 조산원이 애기을 프랑스가정에서 애기을 낳는 과정이 생생하게 보도가 되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20여가지 질문에 한자도 글을 안쓰셨다.그리고 1년뒤인가는 2녀뒤인가는 글을 쓸 힘이 없으셧다.
식당에서 일을 하다가 크레버대게나라에서 킹크랩에 대한 식자재을 검색하다가 알레스카에서 킹크랩잡은 이야기와 국제기구협약을 둘러보다가 제안도 햇다. 러시아와 일본과 미국이 북극개발에 을 같이 하면 어떨까 하고 ..그리고 쇄빙선이 개발이 되어 야한다고 이야기 했다.
일본에서는 예전에 만화을 보니 얼굴이 희고 연어등의 생선을 먹는 사람이 북쪽에 사는데 일본에서는 천민이라는 것이다.그리고 11세기아랍에서는 백인을 노예로 부렸다는 이야기가 책에 나온다는 것이다.예전에 친구에 의하면 미국에서는 백인다름에 흑인 그리고 황인종이라고 인종차별에대해서이야기 했다. 아랍은 아프리카와 가깝다. 오델로에는 흑인 장군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아이더반호인가 흑기사인가 영국의어느 왕에 대한 이야기는 십자군을 배경으로 하던가 흑인장수와 고향으로 돌아와서 보니 다른 사람이 왕이 되어 있었다.
나는 딸에게 이야기 한다. 아이패드 두고 소설책도 읽고 하라고 말이다.나는 딸을 키우며 잠이 오지 않는 밤에 책을 읽었다. 밤을 꼬박새우며 옆에서 자는 딸을 바라보며 ...
여동생은 이야기했다. 언니와는 너무 다르다고 ....
나는 어머니가 너무 달라져서 어머니가 비슷한 사람으로 바뀐것은 아닌가 생각을 햇다. 그리고 내가 방글라데시 글을 딸을 위해서 쓰기 시작하자 딸은 너무 좋아햇다. 딸은 고양이을 키우더니 환경문제에 관심을 갖고 국제기구에 대해서도 알고 나에 대해서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처음에는 코로나 로 아프고 나서 매일쓰다가 식당에 나가면서는 일주일에 한편씩 썼다. 나는 이미 오마이 뉴스에는 오랜세웰이 흘렀다. 방글라 소요사태가 나고 부동산분양을 하면서 노은동농수산물시장에 갔다가 우즈베키스탄사람을 만났다. 대전에 모스크가 있다고 웃으며 이야기햇다..2000년도 초에 한국해외봉사단 홈페이지에 카페에서 우즈베키스탄에 단원 홈페이지에 가입했다.그때는 우크라이나와 우즈베키스탄을 혼돈했다, 우리나라 조선왕조 순종의 아들인가가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우크라이나 여자을 만나서 결혼에서 한국에 와서 살았다고 한다. 한 십년을 살다가 애가 없엇던가 해서 무슨일로 이혼을 햇다고한다. 나을 부탄에서 챙겨주던 여자는 우크라이나 여자다.그때 잘 생각이 안나서 우즈베키스탄에 홈페이지에 썼다. 그녀는 러시아에가서 의학을 공부하고 그곳에서 아프리카 남자을 만나 시에레온으로 갓다고 한다.
대전 중구 오룡역에 러시아어을 가르치는 곳이 있었다.노은동 농수산물시장에는 여러명의 외국인들이 일하고 있다. 열악한 환경에서 ....그런데 돈은 어떻게 관리하는지 모른다.
대전이슬람센터을 찾아서 이맘도 만났다. 그리고 내가 정식으로 외국인들을 위한 일을 한다면 먼저 대전시내에 교회나 천주교의 허락이 필요한 것은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가만히 보니 교회등에서 선교사업을 하면서 이권이 개입된 것 같았다.
그전에 코바에서 충남대전세종커뮤니티 모임을 하는데 주로 일반 식당에서 모이다가 이길송씨가 대표을 할때는 느닷없이 대전 만년동에 새로나교회에 꼭대기 커피숍에서 모임을 하면서 코바에서 새로 만들어진 정관을 가져와서 돌렷다. 어느새 코바 정관은 두꺼워 져 있었다. 내가 볼려고 하니 다시 달라며 가져갔었다.
그리고 모임장소을 은행동쪽에 대전예식원자리 근처에서 햇다.회의실을 대관하는 곳에서 하고 옆에 중국집에서 회식을 햇다. 한데 느낌에 그 중국집은 화교가 아니었나 싶다.
중간에 남자한 명이 대표을 했는데 그때는 나을 그다지 환영을 안하고 가라는 식으로 살쌀맞게 굴었다. 그리고 나는 집에 애가 어려서 회식까지 참석하기가 집에 저녁을 차리기도 해야 해서 집에 일찍 들어오고 코바에서 어른을 찾는다면 미얀마을 다녀온 권오현씨을 소개 했다. 그분은 꾸준히 각종 체육대회나 각종 국제대회에 봉사활동을 하고 계셧다.
대전에서 열린 세계조리사대회에 자원봉사을 버스에서 홍보판을 보고 지원했는데 그때 호텔에서 안대부스에서 영어통역을 하는곳에서 배정받아서 일을 하는데 그곳에서 그분을 만났다. 그전에는 서울에 양재동 코이카 한국해외봉사단 밤인가 코바 20주년 행사인가에 갔다가 그분을 알게 되었다. 미얀마에 체육분야로 갔다왔다고 자신을 소개 했다.
커뮤니티 대표들이 부산에서 모여서 회의을 계속 했고 나중에 자기들끼리 단체을 따로 만든다고 햇다. 커뮤니티모임은 내가 생각한 모임대로는 안갔지만 그들은 그들나름대로 대전에 유학생들 모임봉사활동도 하는것 같았다. 페이스북에 올라오던 것이 지금은 안올라온다. 그리고 내가 모임에 안나갈려고 하면 이길송씨가 전화을 계속했었다.그러면 이런 저런 이야기을 햇고 그녀는 천안에서 계속 대전오로 오가며 모임을 주도 했다..
그러나 우리 때 와는 좀 다르고대전유학생들의 모임에 봉사활동하는 것은 포항공대을 나온 코바 3기가 대덕연구단지에서 일하면서 알게된 단체에 소식을 접하면서인것으로 안다.
내가 2025년도인가 서울소재 코바에 문의해 충청코바모임을 만들려고 서대전역에 라바자라는 커피숍에서 모임을 할때 그때 6명인가 나왔는데 우의전선배을 처음으로 뵙고 인사을 드렸다. 택시 운전을 한다는 인도네시아 6기도 참석하고 몇명이 모여서 이야기 하다가 헤어졌는데 ,모임이 잘 안되었다. 내가 연애중인것도 있었지만 부산에 내려가서도 일을 추진하기 위해서 올라왔었따. 대전역앞에 국제교류센터에서는 모임장소로 흔쾌히 허락을 해주어서 그곳의 컴퓨터로 충청지역의 코바회원들에게 이메일을 보냇다. 300명정도가 된다. 그당시에 국제교류센터는 사무실이 거의 비어있다 시피 했다. 간간히 모임이 열리고 그러다 나중에 10년정도 지나서 인터넷신문사에 다니면서 보니 외국어 강좌도 하고 대전지역외국인 학생들 교육도 하고 그러더니 대전외국인주민센타로 탈바꿈햇다.신안과 맞은편에 있고 그 일층에는 하나은행이 있었다
어느 산부인과에서 나을 자르면서 자꾸만 농협 말고 하나은행계좌을 요구하고 일이 일파만파 커졌다. 그리고 내일을 시작하면서 빈들교회에도 인사을 해야 하겟다 싶어서 은행동에 빈들교회일것으로 추정해서 가니 낮에 다 닫혀있었다.
대화동에 빈들교회을 27년민인가 찾으러 가는데 횡단보도 앞에서 어던 여자들이 정장을 입었는데 웃으며 지나갔다. 장소을 찾기 어려웠고 그 지역에 다가구주택이 들어서고 그 교회가 있던 자리에는 큰 요양병원이 들어서 있었다.
빈들교회 다음에 서울에 갔다가 대전여성신문다닐때 대전일보인가를 보고 다시 대전대화동에 한글교실을 찾고 그곳에서 일하던 윤전도사을 통해 서울에 라파엘클리닉을 소개하고 그 윤전도사는 그일을 추진해서 대전 은행동 대우당 약국 2층에 대전외국인 근로자무료병원이 세워졌다 그당시에 봉사하겟다고 온 사람중에는 중동아시아에 평화유지군으로 다녀온 사람도 있어서 아랍에 대한 이야기도 좀 들었다.
무엇이 평화인지 봉사인지 이제는 좀 생각을 해본다.다만 내가 이야기 할 수있는 것은 UN은 종교와 지역과 인종을 떠나서 일해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을 들어보니 유럽쪽에서는 귀족들이 많이 지원하다늗 것이다.
유럽등에서는 전쟁이 나면 왕들이 기사들과 싸우는데 우리나라는 싸움이 나면 도망간다. 싸우지 않는다. 조선조에서는 ..
인도에 놀이중에 하나가 유럽으로가서는 체스가 되고 중국을 넘어서 한국으로 와서는 장기가 되었다고 한다. 체스을 배워볼까하고 체스 레슨을 받았다. 외국에 나가기전에 한 지역지에 체스을 소개한적이 있다. 어려서 부터 집에서 놀이기구을 가지고 논기억도 있고 장기도 두고 해서..
채스레슨을 받으로 가니 약속한 선생대신에 꾜마애가 앉아 있었다.가만히 꼬마 앞에 앉았다. 내가 체스을 가지고 만지작 거리고 하자 꼬마가 알려주었다. 이건 이렇고 저건 저래요. 그래서 따라 했더니 그다음에 선생이 와서 체스두는 법에 대한 복사지을 내밀며 자신이 만든것이라고 내밀었다.체스판의 말이름을 하나하나 알려주고 그 교본대로해보라는 것이다. 몇수만에 따라하라는대 잘 안되었다. 영화에서 보니 말을 놓고 타임벨을 울리었던가?외국에서는 국제포럼을 하는데 주어진 시간에 발표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마이크가 커진다.
체스판에서는 여왕이 비숍도 기사도 다죽인다. 한데 장기판에는 왕을 보호하고 기사와 말들이 나가서 싸우고 왕주위에 어떤 것은 항상 움직이며 왕을 보호한다.
동양과 서양이 만나면서 우리는 무엇을 하는 것인가.현재 FAO는 중국인이 대표다. 농산물의 공급망이 흩트러지고 있다. 독일에 어느 전문가는 프로젝트 사업을 설명하는데 농산물 판매가 아니라 산속에 집한체에 사는 리모트 에어리어에 있는 한집에 사는 여자들을 결혼시키위해 길이 필요하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서 놀랫다.
애는 그냥 길러지는 것이 아니다 . 나의 선배중에 하나는 왜그랬는 지 나보고 온실속에 잡초라고 한 사람이 있었다.그러나 영국에 열대책에는 잡초을 무엇이라고 정의햇냐면 망고나무과수원에 구아바는 잡초라고 했나 잘 생각이 안난다. 방그라데시에서는 겨울에 감기가 걸리면 이 구아바을 먹으면 감기가 낳는다고 이야기 해주었다.그리고 어느 대학선배는 나에게 뭐라고 내 연습장에 연금술사라고 이야기 했고 나보 고 멋진 사람이라고 평했다. 한명은 써클 선배고 한명은 과선배다.
나에게 두명의 엄마가 있을수도 있고 없을수도 있다. 어머니는 가끔씩 내가 임신햇을때 이야기 을 해주신다. 삼학도에서 죽을 려고 했는데 어떤분이 달래주셧다고 한다.
나는 지하철에서 애기을 업고 죽을 려고 했다. 그러다 지하철역사에서 울다가 나왔다.애 그런생각을 했는지 ....그러나 살아야 한다.그리고 애을 교육시켜야 한다는 생각도 든다.딸은 내가 누워 있으면 일으켜세운다.
방글라데시의 치타콩을 통해서 물건들이 고속도로을 타고 부탄으로 인도의 아샘으로 네팔로 물건이 이동한다.
엄마의 집에는 방글라데시에 쇼올이 있었다. 그리고 안다. 남녀의 관계도 구두와 같다는 것을..
새신발은 빡빡하다. 중고는 신던 신발은 발이 잘 들어간다.신발이 딱맞으면 발뒷꿈치가 벗겨진다.
가죽은 늘어난다. 호르몬에 따라서 중년이 되면 살이찌고 날씬하다.외국에서는 다이어트운동으로 생각을 한다고 한다. 남녀관게에서 키스는 감기의 면역력을 키워서 감기가 덜들게 한다고 한다.
]중국에는 방중술이 있다. 굳이 운동을 안해도 운동이 된다는 것이다. 부부간에는 말이다. 눈이 다르다.여자는 발이 작아도 가죽과 같을 수있다. 나는 화려한 구두을 좋아하지 않는데 애아빠는 화려한 구두을 사주어서 얼마 안신었는데 구두가 사라졋다. 애기 신발도 산적이 있는데 애기 신발도 사라졋다.애아빠가 이마트에서 샌들을 사주엇는데 밖에 나갔다 왔더니 그신발의 굽이 반동강이 나있었다.그리고 국민은행에 ETF제안을 모바일 폰으로 하는데 내 주민번호을 첬더니 내나이가 1958년인가 10살이 더 많게 되어있는 것이 아닌가?그리고 사진에 다른 여자가 올라와있고...국세청에 확인하면서 내정보에 내가 고려대로 나와있는것으로 되어있고 카드가 롯데카드는 없는데 롯데카드가 나오고 또다른카드도 나와잇었다.여러가지 사정으로 유추해석해 검찰에 가서 신고을 하기도 했다.그러나 그때 나보고글을 쓰라고 한사람이 사라지고 내가 글을 써서제출할려고 하자 다른 여남자가 앉아서 처음에 거절을 햇다.
그리고 대전에 어디를 갓더니 대전아파트을 몇억짝리가 그냥 넘겨주고 한다는 것이다.처음에는 사람들이 왜 이상한 말을 하는지 그냥지나갔다.나에 대한 정보가 잘못되어 있는 것같다. 나는 아들이 없다. 딸 하나다.어떤 사람은 나보고 딸이 세명이냐고 물어왓다. 아니랴고 했다. 나느 술도 못마시고 대학에 선배나 후배들도 알고 예전에 직장 돌료들도 잘 알고 있을것으로 안다. 나는 친구들이 술을 마시러 가면 내 안주거리을 사가지고 다니기고 했다. 그렇다고 난 나을 부른 술자리에 빠진적이 없다. 대학다닐때도 직장 다닐때도 ....대학때 써클 모임에 가서는 항상마지막까지 자리을 지키다가 술깨는 약도 사다주고 정리을 하는 편이었다.난 코바 동기들이 술자리을 할때도 자리을 지키었다. 직장에서도 빠진 적은 없다. 그러나 그들도 안다. 내가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것을,..구랴소 주로 차을 커피을 마시고 노래방에서 노래을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그렇다고아무나 가적은 없다. 모르는 사람과는 안가도 부탄을 갓다온후로는 조카들을 보고 하면서 간적도 별로 없다.
서울에서 직장생활에 풍토가 바뀐적인지 직장에서도 예전과 달이 회식도 별로 안하고 술자리는 버더군다 안하고 주로 서울에서 주간지 기자간담회을 가니 점심때 이루어지고 있었다.술도 잘 안마신다.
그런데 대전은 낮에 기자 간담회하면서 20년전에는 술을 마시고 했지만 난 술을 안마시고 음료수을 마셨었다.충남일보에서보니 여자도 술을 마시며 남자기자의빰을 만지는 것을 보고 놀랜적이 있다. 아마 유럽 여성들도 그럴까?서울의 장안평에는 남자호스트들이 있엇다는 이야기을 들었다.우리나라 여성들도 많이 변한 것일까?부탄에서도 여자들끼리 모임에 초대을 받았는데 못갔다. 저녁에 이동하려면 자동차가 있어서 ..지금생각해보니 돈이 있든 없든 자동차을 삿었어야 한다.
부타에서는 여자의 귄위가 남자을 능가한다.사크나라에서는 ..어쩌면 여성의 지윈가 낮다고 하는것은 하류층이나 배우지 못한 여성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애아빠는 처음과는 달리 나중에는 조심했었다. 나을 알아서인지 웬지 조심했다.전화상으로 잘모시겟다고 까지 했다. 일하는 여자라고도 이야기 한적이 있엇다.일이야 어찌되었건 교육은 중요하다.
체스대회가 있엇서 대전컨벤션센터에 가니 어떤 여자가 있엇다. 꼬마애들의 체스대회였다.유럽등에서는 저학년때 체스와 축구을 한다는 것이다. 거리에는 커다란 체스판도 있다고 하고 말이다.내가 중세시대이야기을 햇다. 여왕을 보호한다고 하는데 중세시대는 길드전쟁으로 여자들을 빼앗고 주고 받고 햇따고 하니 한다는 말이 여자가 상대방의 애기을 갖으면 다음에 그아이가 대표가 되는 것이라고 말이다.웃으며 이야기 했다.그러면서 다른나라에서는 체스을 많이 한다고.우리나라는 영업사원들이 회사에서 장기와 바둑을 많이 두었는데 유럽은 어떠냐 포카와 체스을 많이 두냐 했더니 그렇다는 것이다.집에 와서 그냥 누웠다.하지만 나는 갱년기가 되면서 내가 둘째을 유산하고 애아빠가 음료수을 사서 갖다주어서 너무나 밉다. 부산은 그조산원옆에 외과병원이 있었는데 그외과병원에서 여성들에게 유산을 시키고있었다.아이에게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동생을 유산했다고 했지만 갈수록 밉다. 그리고 기자생활을 할 때는 몰랐다. 그러나 식당에서 일을 하면서 보니 다들 남편이나 아들과 사업을 한다. 분식집도 남편과 햇고 수라면옥은 그 식당을 인수중이었는데 큰 아들과 식당 일을 했다. 남편이 의사라는데 KAIST 전문의 라고 했다. 작은 키엿다. 그 여자의 아들읜 한밭대학교을 나왓다고 했나 ?너무 피곤해 보엿다. 우너 주인인 할머니는 자기 딸의 아들을 돌본다면서 식빵을 사면서 나에게 식빵을 사주기도 하고 자신의 이야기을 간간히 했다.한데 새식당주인여자는 나보고 그 할머니가 내 흉을 본다며 상종을 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계속일을 해야하는데 자꾸 와서 말을 시키고 해서 좀 힘들었다. 그할머니에 대해서 이애기 저얘기하며 ..할머니는 아들이 식당일을 물려받아서 햇엇던 것이 아니라 KOICA에서 일을 햇엇다고 한다.내가 수라면옥에서 일을 할때는 아들이 정기적으로 와서 일을 하고 할머니가 쉬었다. 사장말로는 아들에게 이식당을 해주었었는데 경험이 없이 큰 가게을 차려서 망해서 여자주인이 인수을 하는 것이라 햇다,.인수하는 여자주인도 좀 이상한데 구두와 가방이 자주바뀌고 햇다.그리고베트남 전쟁이야기을 하며 미국이 잘못했다고 나보고 뭘 모른다고 이야기 했다.자기는 충남대 독어과을 나오고 유럽으로 유학도 다녀오고 자신의 가족은 자매가 여럿이 되고 대화동에서 애들을 봐주는 봉사활동도 했다고
그러고 나보고 다른 사람들에 배해 성실하다고 계속일해주었으면 햇고 다른 식당과 달리 그 식당은 처음에 주민등록등본을 가져오라고 했는데 나중에 보니 세금을 신고을 어떻게 햇는지 나는 일주에 네번나가고 어쩌다 일요일에 낮에 잠깐나가서 일을 했는데 나중에 세무서인가에서 연락이 왔다. 돈을 나에게 준것도 달리 신고했었나 보다. 그 여자주인은 나보다 한살 많다고 했는데 그 식다에서 아들과 자면서 어쩔때는 장부을 들고 나왔었다.그리고 부엌에는 어쩌다 한번 들어오면서 주로 서빙을 해서 인지 귀걸이을 하고 말이다. 한데 사업을 해도 괜찮다는 생각을 한적도 있다. 킹덤이라는 부페집에 한식조리부에 주방보조로 가니 여러명의 여자들이 분야별로 나누어서 일을 하는 것이 회사 생활과 같았다. 단지 힘이 든것은 주말인 토요일과 일요일 일을 하는 것이고 일찍 나가야 한다는 것이외에는 말이다. 그리고 열시정각에 아침도 먹는다.딸에게 센트리아오피스텔 20층에 뷔페집을 내도 좋겟다고 했다.킹덤에는 요리사들이 바뀌어가고있었고 나보고도 사람들이 조리사자격증을 따라고 했다.그리고지배인인가 총주방장이 잘 해주었다. 내가 나중에 모임장소로 하기위해서뷔페을 물어보러 일츨에 예약실을 갔는데 젊은 애들이 너무 불친절하게 대햇따.그것에 비해 만년동의 베스타 부페의 일층에 직원은 친철하게 안내을 해주엇다.그래서 고민하다가 코바모임장소에 모임공지을 안했던가? 대전유성구에 신성동에 자린고비는 바깥에 작은 정원에서 차도 마시고 그 옆에 바에서 칵테일이나 와인도 할 수있다. 그리고 주방장이 직원들에게도 따스한 음식을 준비해서 주방직원들과 식사을 한다. 2층에는 그전에 예술활동을 했었던지 갤러리가 있었다.내가 어찌 모른채을 할 수있었겠는가?화답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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