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호텔로 외국관광청과 협력해 대전에 각국의 방갈로와 이주민들이 후세 교육위한 리츠제안.연락이 내가 안오면 내가 추진해 볼것임. 대전도시공사에 칠년전에 도 가고 이번에 다시 제안
26.02.24 22:53l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몸은 쇄약해지고 면역력이 약화되어 몸이 신호가 왔다고 한다.
아직 어머니을 절에 모시지 못했다. 전기호롱불을 키어야 하는데 일이 손에 안잡힌다.난 노인이된 어머니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평택에 아산만 공사을 위해 우리집을 비시고 나중에 아버지가 하청일을 받은것이 돈만 들어가고 공사대금을 못받아 막내고모의 돈과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못갚고 잠적하던 일이 생각난다.
큰돈을 벌었을때 친척들에게 사업체을 맡겨 말아 먹었다고 한다. 광화문에 중국집은 아버지 외사촌 열용이 형님이라고 햇다. 재산을 친척들이 다 말아먹엇다고 한다. 그때 아버지는 나에게 육영수여사 장례식도 보여주고 전라도 해남도 가고 많이 돌아다니셨다. 한 구굿가게가서는 아는 분들인지 계속 화토을 치기도 하고 ....아버지는 무슨이야기인지 기억이 안나는데 기다리고 나중에 지루해 하는 나에게 초코렛을 사주셨다..
그리고 아버지가 집을 비우고 어머니는 집안살림만 하다가 아이들 네명을 키우기위해서 정말 열심히 사셨다.우리는 어느날은 분유한통에 네그릇에 분유을 타주어서 식사을 하고 어느날은 집에 말려두었던 옥수수을 삶아서 먹기도 햇다. 커더런 자수정반지는 내과외비로 쓰신것 같다.
어느날 해남에서 둘쩨고모님이 오셔서 우리집에 장남인 큰 아들 병준이을 데리고 내려가셧다. 그런데 무슨일이 있었는지 애가 변해서 왓다. 성질이 안좋아졋다고 어머니가 그러셨다. 해남고모님은 아들없이 딸만 여섯이었다.해남에서 보험도 하고 여성단체 회장도 했다고 한다.예전에는 중학교가 6년제였다고 한다. 고모님은 중학교을 나왓다고 하셧다.고무부가 돌아가셧다고 해서 해남을 가니 세개상조회사에서 나와서 일을 하고 고모님집에 가니 국가유공자집이었다.고향을 지키느라 힘이 많이 드셧을 것으로 안다.
어미니가 우리을 돌보기 위해서 큰 반지도 빼고 남의 집에 가서 일을 하셧다고 한다. 어린 동생들은 어머니의 이종사촌 시어머니가 놀이터에서 나와서 종종 남동생보는 것을 지켜보았따고 한다. 이종사촌 남편집은 트럭을 운전한다고 했다. 그집에 경복이라고 야간 상고에 다니던 언니가 있었는데 동네 애들을 잘 돌봐주었다. 동네 애들을 데리고 서울대 옆에 관악산까지 버스을 타고 가서 과자따먹기 놀이도 하고 말이다.나와 같은 또래에 최미경이라고 있는데 서울 관악구 동사무소에서 일하는 공무원이 됐다고 한다. 같은 날에 나의 친구 또다른 친구도 최미경이었는데 그 아이는 여의도로 이사을 갓다,.
국민학교 3학년때 반이 배정되었는데 우리반 선생님이 임산부라 학년도중에 반애들이 뿔뿔이 흩어졋다. 우리 친구들은 선생님이 애을 낳고 집에 있다는 소식을 접하자 국민학교 3학년이었는데 돈을 모아서 분유을 사들고 주소 하나 들고 선생님집을 찾았다. 봉천동 어느 집에 단칸방이었다.지금 초등학교 선생님들 신혼집은 보통 24평 아파트 일것이다. 1970년대 후반에는 단칸방이었나보다. 우리는 그길을 걸어가면서 웃고 떠들고 한쪽에서 남자애들도 왔었는데 선생님 집에 찾아가서 분유한통을 전달 하고 온 것은 우리들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니 그아이들이 기억이 안난다.
보라매공원 건너편에 공군사관학교 건너편에 당곡국민학교 .뒷산에는 바위산도 있어서 애들과 그산에 놀러도 많이 갔다. 어떤 친구아버지는 군장성인가 되고 ...어떤 친구는 울보라 내가 지켜주었다. 어머니가 일본인이고 아버지가 한국인인데 집에서 뜨게질이나 살림을 조용히 하고 그 친구는 발레을 다녔다. 어느날 학교 운동회 연습을 하는데 놀려서 내가 지켜주었다.왜냐면 집에 오는 길이 같았다. 학교에서 파하고 집에 오는 길에 그애 집앞에서 그애에게 인사하고 나는 집으로 왔다.
아버지가 소식이 끊어지고 우리가 살던 이층집에 윗집의 안방을 주인집에 내어주고 우리는 작은 방에서 같이 잤다. 그러다 대전에 오고 아버지와 제회을 하고 서울과 대전을 왓다갓다 하다대전을 왔다.
나에게 분유한통은 많은 의미가 있다. 2024년 6월에 대전 시내버스안에서 계속 뱅갈리 말을 하던 애기을 안고 있던 부부가 생각이 나서 한참후에 대전시공무원들에게 문자을 보냇다. 방글라데시 정치적 소요사태도 어려움에 처한 뱅갈리 돕자고 분우,기저귀등을 사는데 돕자고 문자을 보내고 대전이스람센터의 이맘 연락처와 여성기도실에 붙어있던 국민은행계좌번호을 적어 보냈다.
그리고 홈플러스에서 내가 먹으려고 분유을 한통 샀다가 갑자기 꿈에 깨어나 대전이슬람 센터을갔다.지난해 3월에 대전이슬람센터을 가니 이맘선생님에 이드모바록 행사에 초대했었다. 저녁6시에 ..내가 못간다고 하고 ..당근에서 어떤 사람이 관심있다고 연락이 와서 시간과 장소을 알려주었다.
나는 지난해 너무 몸이 아파서 어찌 할바을 몰랐다. 병원도 제대로 가지 못하고 페이북에 나의 상황을 올렸다. 차비가 없어도 움직였다. 삼성생명에서는 4월에 입과하니 다른 입과생들에게 하이패승르 준다기에 시내버스비도 주냐고 했다고 짤렸다. 예전에 친구가 1990년에 삼성생명에 대학생레이디에 입과을 햇는데 하루만가면 만원을 주었다고 한다..5월에 DB생명을 가니 그냥 출석하고 3일뒤에 시험을 보라고 해서 별교육도 안받고 교재도 신한은행에 갓다가 잊어버렸따 그다음날 찾고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시험을 보고 오니 합격이 안됐다고 하고 갑자기 나을 보자더니 신용상에 문제가 있어서 안된다는 것이다. 삼성카드 연체가 있었다. 그쯤인가 그전인가 삼성카드 연제을 청주지점에 할부로 나누어 내고 있다. 같이 시험보기로 한 여자들은 시험장에서 보지 못했다.한명은부탄에서 만낫던 메던과 너무 비슷해서 놀래고 다른 한명은 청주에서 왔다는데 새마을 금고에서 일하던 여자와 비슷했다.
지난봄에 고소장을 검찰에 내었는데 나중에 기각이 되었다.그리고 SGI신용정보가 둔산동삼성생명빌딩에 몇층이 있어서 놀랫다.
대전이슬람센터에 이번에 이야기하니 KT&G빌딩에 뱅갈리 게더링을 갔는데 그 버스안에서 본 부부가 안보였다. 나이가 든 커플 같았다. 애기도 걱정이 된다. 우리 딸은 집에서 노을리라는검정과 흰색의 고양이가 집밖을 나가서 걱정하느라 ....어제 밤에는 포스터을 붙였다.
동기중에 언니엿던 분에게 이런저런이야기을 하니 아니 방글라데시만 정치적소요사태가 있느냐 스리랑카. 네팔등 다 그렇다. 걱정하지 말고 네갈길 가란다.
2024년 5월에 교동면옥에서 일할때 기침만 해도 오줌이 나와서 패드을 찾고 일하고 크래버대게나라에서 일하면서 킹크랩 조리법과 대게등을 조사하고 북극해국제기구도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대덕사이언스 밸리에서는 실험동물의 영혼제을 일년에 한번씩 한다고 해서 혹시 버려지던 킹크랩과 대게의 껍데기을 보며 쓰레기 제활용, 및 영혼제가 필요하다고 제안을했던가 ?회사 홈페이지가 사라졋다. 그래서 지난 번에 전주에 김영주에게 크레버대게이야기을 하며 전주에 본점이 있고 일본에서는 킹크랩이나 대게을 작게 잘라서 판다. 우리는 찜으로 팔지만 홈페이지가 없어져서 그러니 제안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전주에는 모스크도 있고 경기전에 큰 카톨릭 성당도 있다.. 그리고 그 가게에서 해독쥬스을 사고 잘리고 ...
방글라데시 파견30주년 쓰던 글도 엉망이 되었고 책도 못내고 ....아프고 그때 설사을 3개월이상을 했는데 병원갈 생각을 못햇다
남동생이 집을 팔앗다고 했는데 이사가라는데 오늘 집주인과 문자로 통화을 햇는데 그집주인이 문정은인가로 되어있었다. 주소는 유성구 한진오피스텔 215호인가 316호인가로 되어있었다.
남동생은 아버지가 있는 대전추모공원가는길에 정림동에 땅을 사두었다고 했다. 집을 지어서 가족들이 그곳에 살게 하겠다고 말이다.
그런데 괘곡동 땅이라는 처음보고 듣고 못한땅이 91제곱미터엿는데 이것이 빌미가 되어 집을 문정은인가하는 사람에게 등기 이전되었다고 하는데 이상하지 않은가?
등기이전에2025년 2월 15일인가 19일이다. 보일러가 겨울에 안되어서 내가 다리가 아팠는데 더 아팠다. 2월초에 열린정형외과에 가서 진찰을 받으라고 해서 받으니 퇴행성 관절염이엇고 집에 압류가 들어왓는데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는데 집에 열 어 준사람이 없는데 누가 들어온것인지
딸은 아무말도 없었다.남동생에게 뭔가 고쳐 달라고 하면 누나가 고쳐서 쓰라고 했다.
지난해에도 보일러가 고장났다고 했다. 딸이5월에 일부 돈을 해주어서 보일러을 새로 고쳤다. 교차로에 전화을 하니 유천동에서 보일러을 현금 할부로 해준다고 했고 나중에 배재대쪽에 보일러가게 에서도 해준다고 했는데 가까운 곳에서 해주었는데 나중에 보니 모델이 한참 지난것이고 현재 나비움 조절기가 고장나서 올해 겨울은 정말 따스하게 살았다.
남들은 패딩을 추운 밖에 나기기 위해서 샀지만 나는 집에서 글을 쓰고 보도자료을 오르려고 패딩을 헌옷가게에세 7만원을 주고 샀다. 브랜드라 비싸단다.
몸은 더 아프고 따스한 물이 안나오니 설거지도 잘 못하고 지난 한해가 죽었다가 살았다.올해 국세청에서 연락이 왓다 .내가 내 일자리을 찾다가 사업자등록증을 냈는데 일반과세자로 국세청에서 사업자등록증을 보낸것이다. 지난해에 아무일도 안했는데 누가 내 사업자 등록증을 쓴 것일까 생각을 하다가 대전세무서도 갔다. 가만생각해보니 대전인텨넷신문 다닐때 공무원 명함을 받았던 것에 뱅갈리 돕자는 문자을 보내고 대전이슬람센터에 연락처와 국민은행계좌을 넣엇는데 답장이없어서 공무원들이 우회에서 눈치을 주는 것이 아닌가 해서 요근래에 대전이슬람센터을 갓다. 이번에는 나는 여러일을 한꺼번에 추진하고 있다.
부산에 내려가기전에 유엔브이 귀국모임을 위해 외교부에서 전화명단을 받고 한국봉사단 충청비부 명단을 서울본부에서 받았다. 한국관광공사 대전클럽, 대화동 어느 교회 한글교실 자원봉사등을 하면서 충청대전외국인노동자 무료진료소을 태동하게 하고 부산에 애아빠을 만나러 갓다가 을 낳고 올라왔다. 대전검찰청에서는 고소을 기각했다.
그리고 내가 목표가 아니었다. 외국에서는 나을 도우려고 햇다. 그들은 국제결혼을 하면서 협력을 하는데 내가 그때는 어려서 그냥 한국으로 왔다.국제혁렵은 이론이 아니다. ...대전 충남농대에 외국인 커뮤니티을 잘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들의 목표는 내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엿다. 옛날에 육이오이후 피난을 다녀오셧
는데 그릇이 다 없어졋다고 한다. 지금 나이들어 생가해보니 그릇뿐만아니라 이불, 모든 것이 없어졋다면 시골의 여관은 일어서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일반 여관이 아니다. 가족은 산골로 다 픝어졋다. 난 아버지가 가지고 계시던 그 청자백자와 같은 큰 접시가 돈이 되는 골동품이라고 생각햇다.
그골동품이 나을 박물관로 이끌었다. 인사동에 가면 다기 그릇이 그당시에 20-30만원했다.1990년대 이다. 지금은 대전시청에서 다기세트을 8만원해서 사고 싶어서 왔다갓다 했다.
친구가 몇해전 롯데백화점뒤에 명태조림을 사준다고 갓는데 그 명태가 그 접시에 담겨나왓다. 나는 가만히 봤다. 그리고 명태을 먹었다. 아버지가 그 애기 중기하던 접시가 생선그릇이라니..
티비에서 보니 안동지역에서 민어을 조리하는데 커다란 생선을 조리 햇다. 어쩌면 안동에서는 그 음식을 보여 주고 싶엇던 것은 아닌가 말이다. 나의 러닝메이트가 아니라 말이다.
나 아버지가 고등학교을 졸업하고 사업을 하면서 권총을 차고 다녓다는 술취한 소리에 반신반의 햇다.내가 일본어을 공부하다가 대학원을 못가고 일본어 어학연수을 떠날려고 하니 도와달라는 말에 내눈에 흙이 들어와도 안된다고 해서 얼마나 설득을 했는지 모른다. 그리고 30만원을 받아 유학원에 주엇다. 그런데 어학연수는 안갓다. 서울에서 지역지에서 일하는 것이 너무 바빠서 일본어을 공부하기도 어려웟다. 상왕십리에서 21세기 외국어학원에서 새벽반을 다니기도 했지만 일본에 유학을 못갔다.
어머니는 왠지 아버지을 업신여겻다. 그리고 어머니 외가인 최씨 문중의 음식이 대단한 것이냥 이야기을 햇다. 그러나 나 고2떄 해남에서 고모가 오셔서 육전을 가르쳐 주고 갔다. 나이들어 보니 그 육전은 가게 음식이다. 집안에서 돼지고기을 잘게 쪼았서 동그랗게 밀가루을 씌워 계란물을 입혀 그동그란것을 프라이펜에 지진다. 그러나 고모은 돼지고기와 계란물을 섞어서 그냥 후라이펜에 한다.
앴날의 지역여관은 작은 여인숙이 아니다. 유량극당이 오며 그 유라극닥의 배우나 광대들이 묵어가고 일본인도 장사꾼도 ...어느 책를 보니 옛날 지역의 여관은 규모가 컸다고 한다. 그리고 아침까지 고객들에게 주었다고 한다. 친할머니는 음식을 달다고 뭐라고 하고 햇지만 그엣날에 더운집안에서는 설탕이 에너지 원이었을 것같다. 우리나라도 그전에 기후변화도 날씨가 더웟던 것은 아닌가?친할머니는 설탕을 많이 사욯햇다고 한다. 우리 할머니는 국수에 설탕과 간장을 기름등을 넣어서 먹이고 내가 잠시 할머니와 살때 달걀찜을 해주었는데 달걀찜도 달았던 것같다.
덴마크코펜하겐 청자백자 우리 조선것입니다. 우리의 한국자기와 행남자기가 일반 도공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유학갔다온 사람들은 외국의 자기을 사가지고 왔습니다.
아버지 환갑을 위해 광주로 해서 해남으로 순천을 돌아 대전에 왔습니다. r국제연합봉사단 나가는 것을 뒤로 미루고 아버지 환갑잔치도 보고 나는 부탄에 국제연합봉사단을 다녀왔다.2년 후에 집에 돌아왓을때 분위기가 이상했다.막내남동생이 살던 용두동 집주위에 중국인들이 많이 산다고 했다. 아버지 동창은 해남에 오래된 국회의원이라고 고모가 이야기 해주었다. 예전에 중학교에는 나이가 지금처럼 같은 것이 아니라 나이차가 많이 난 사람들이 공부을 같이 햇다고한다. 아버지는 집이 부유해서 친구에게 도시락을 싸다주기도 햇다고 한다. 말썽쟁이기도하고..지주계급비슷햇나보다.. 고모님이 아버지떄문에 속상해 햇다고 한다. 아버지의 첫사람은 순천에 여관집 딸이란다.
우리나라 기업사을 보니 남해에는 야쿠자가 있어서 버스 운행이 쉬운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우리 고모는 시집을 갔는데 순천에 알아주는 집안이었따고 한다. 일본에 유학까지 갓다왔는데 마약을 하셧단다. 아들을 한 명 두고 그집에서 나왓다고 한다.
고 박정희가 경제께획을 하면서 외교을 하면서 종묘을 재건했는데 바쁘셨는지 종묘에 담벼락에 담은 시멘트로 이으셧다. 전통방식이 아니라....
열용이 삼촌과 해남에 가면 그릇과 이불들을 가져간 사람들을 찾을 수 있을까? 아니 그당시 여관사진이나 여관에 관련 자료을 구할 수있을까?아버지에 청화백자 그릇이 생선그릇이엇구나 하고 왜 아버지가 그 그릇을 어이가 없어 하며 몇년을 보냈다.
난 해남에 가서 한정식과 목포에 한정식과 안동에 가서 민어요리을 먹어 볼 수있을까?
예전에는 요에서 관청과 궁에만 그릇를 만들어주어 일반인들에게는 안만들어 주진 않았을까?
교동면옥에서 일하다가 큰 도자기을 보고 깜짝 놀랫다. 그렇다면 목표등에서 중국의 큰 접시가 팔리는 것은 아니었을까? 왜 중국식당을 햇을까?
대전에 킹덩부페에 뷔페접시는 아랍에미레이트인가에서 만든 큰 접시 을 사용한다. 우리집은 경찰과 그 주위에서 살았다.일본은 우리의 여관관리을 가져가 자기들 문화로만든 것은 아닐까?
판소리의 대가인 박동진옹도 해남에 오면 할아버지 여관에서 묵으셨다고 한다. 아버지는 드라마보다 사극과 스포츠 정도 뉴스을 듣고했다. 드라마는 피비을 안본 것이 옛날 배우는 유랑극단 출신이라고 햇다. 일본은 연애인가문이 왠 귀족가문으로 거듭나고 있다.
우리어머니는 집에서 계절별로 담근주는 담는데 집에서 손님이 온적은 없었다. 우리가 자라는 동안에 말이다. 술은 담는데 아버지가 들고 나가서 밖에서 누구와 먹었는제 빈통으로 집에 왔다. 남동생들 결혼식때도 여러통의 술을 푸셧다. 소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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