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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제경 Feb 19. 2024

사랑해요, 양희씨

윤제경 에세이

<다음 소희>라는 영화가 있다.

나는 이 영화를 아주 감명 깊게 봤다. 그때 나는 군인이었고, 영화를 본 건 첫 휴가 때였다. 평생을 흔들어놓는 영화가 있다듯 나는 이 영화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다음 소희>라는 제목도 좋고, 내용도 좋고, 연출도 좋고, 감독도 좋고 촬영지도 좋다. 무엇보다 주인공이 정말 이쁘다. 장난 아니다. 만약 어떤 잡지사에서 내게 한줄평을 요한다면 우주에서 가장 두꺼운 볼드체를 수소문해 ‘우주 최강 영화’라 할 거다. 나는 이 영화에 미쳐있다. 객관성 같은 건 개나 줘버린지 오래다. <다음 소희>는 내게 그런 영화다.


아무튼 그때 극장서 있었던 일이다.

내 앞에는 한 중년 커플이 앉았다. 그들은 서로 많은 부분이 달라 보였다. 남자는 세련됐고 여자는 촌스러웠다. 남자는 매너가 있었고 여자는 조금 시끄러웠다. 남자는 극장이 익숙해 보였고 여자는 극장이 신기해 보였다. 그들은 아주 잘 어울려 보였다. 뭔가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여자는 엄마가 떠올랐고 남자는 누구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게 좀 슬펐다.


그래서 양희씨가 누구냐면 우리 엄마다.

그녀는 다 같이 못살았던 70년대 표본 같은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3자매 중 장녀였다. 풍족지 못했지만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아버지와 가족의 기를 위해서라면 누구든 맞서는 어머니가 있었다. 두 동생은 철이 좀 없었지만 언니 말이라면 꼼짝 못했다.


그녀는 가장이었다. 그녀는 공부를 잘했다. 사실인지는 모르겠다만 행실까지 바른 엄청난 모범생이었다고, 이모가 그랬다. 얼굴도 이뻤다. 이건 아버지가 그랬다. 역시 사실인지는 모르겠다. 무튼 그녀는 그 좋은 머리와 바른 행실로 상고에 진학했다. 명문대에 가 멋진 스포츠카를 타는 야타족 선배와의 로멘스보다 월급날 통닭 두 마리를 사들고 가는 상상이 더 행복했다. 그녀는 졸업 전 대기업에 취업했다. 그런 그녀 덕에 막냇동생은 대학을 가고 유학도 갈 수 있었다. 근사한 사람이다.


나는 그런 그녀가 싫었다.

대단한 잘못이나 갈등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냥 좀 구렸다. 몇 백원 싼 계란을 사러 먼 마트를 걸아가는 것도. 평생 브랜드 옷이라곤 아울렛 할인코너에 정착되어 있는 것도. 미의 기준이 90년대에 정체되었는지 비장의 무기라며 바르는 새빨강 립스틱도. 새끼들 학원비는 펑펑 쓰면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에 벌벌 떠는 것도. 사업 실패 후 집이라도 지켜야 한다며 이혼하자는 아버지 말에 너무 쉽게 설득당한 것도. 최고의 일탈이 겨우 640ml짜리 맥주 한 병인 것까지. 그냥 다 구렸다. 궁상을 자처하는 게 꼴보기 싫었다. 그녀와 반댓길을 가는 것에 어떤 우월감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기만 했음 다행이었을 텐데, 폭력적인 말들을 배설하기도 했다. 엄마도 다른 집 아줌마들처럼 좀 꾸미고 돈도 펑펑 쓰면 좋을텐데. 저 티비에 나오는 푼수 아줌마처럼 속없이 살면 좋을 텐데. 그래도 될 텐데. 엄마는 왜 패배주의에 절어서. 왜 피해의식에 절어서. 엄마는 아직 젊은데… 그러면 엄마는 나갔다. 그러곤 640ml짜리 맥주 한 병을 사들고 1시간 만에 집에 온다. 1시간이 걸린 것도 아마 집 앞 슈퍼는 비싸다며 한참을 걸어 마트서 사왔을 거다. 그래서 더 싫었다. 구렸다.


얼마 전 엄마가 면회를 왔다. 물론 구치소가 아닌 군대다. 훈련소 수료 후 이제 막 자대배치된 아들내미를 보러 온 거다. 엄마는 또 내가 지겨워하는 치킨 한 마리와(우리 집은 치킨집을 한다.) 정성스레 싸놓으면 잘 먹으면서 항상 툴툴대는 김밥을 싸왔다. 살짝 심기가 불편해져 엄마를 봤다.


엄마가 너무 늙었다.


내가 배설했던 폭력적인 말들이 불과 몇 달 전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엄마는 늙었다. 얼굴에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곳곳에 버짐도 폈다. 우리 엄마는 할머니가 아닌데. 내 동생은 아직 고등학생인데. 그러면 아직 학부모라는 건데. 이건 뭔가 앞뒤가 안 맞는 거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는 이미 늙어있었다. 처음으로 엄마가 좀 어색했다. 초등학교 입학식에 왔던 30대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는데, 내 불효를 정당화시키기 위해서였을까. 아니면 정말 그냥 그날따라 갑자기 늙은걸까. 엄마는 거기 있던 그 아줌마가 아니었다. 나는 엄마가 늙었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머리로만 알던 엄마 나이가 뼈를 관통했다.


생각해보면 엄마는 늙을 만했다. 50살이 넘었고 최근 들어 사건사고도 많았다. 5년 전 아버지 사업실패로 이혼을 했고 그로 인해 가족행사 때마다 홀로 청문회에 서거나 숨어야 했다. 수입은 기하급수적으로 줄었고 아들내미는 대학에 딸내미는 고등학교에 갔다. 아들내미는 말을 더럽게 안 듣고 딸내미는 걸어다니는 중소기업이다. 와중에 지인들은 하나같이 다 잘 나갔다. 1년 전 아버지와 극적으로 재결합하며 사정은 좀 나아졌지만 혼인신고 날 그녀의 아버지가 죽었다. 한 달 뒤 아들내미는 군대에 갔다. 이건 뭐 세계 동안 대회 우승자가 와도 폭삭 늙겠다. 이런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었다니 씨발 나는 얼마나 구제불능인건가. 면회실을 뒤로하고 사관실로 가는 10분 남짓한 시간에 많은 생각이 오갔다. 다 내가 잘못한 건데, 그런데. 벌은 엄마가 다 받은 거 같다. 코끝이 쫌 찡했다. 하마타면 울 뻔했다. 보는 눈도 많은데다 뻔한 이등병의 클리셰라는 알 수 없는 아집에 울지는 않았지만, 어찌 됐건 좀 슬펐다.


그때부터 엄마가 보였다. 양희씨가 보였다.

양희씨는 여리다. 책임감은 투철하지만 그만한 깡따구는 없다. 그래서 늘 혼자 운다. 아들내미 입대날에도 양희씨는 울지 않았다. 내가 들어간 뒤에도 울지 않았다 한다. 아마 또 어디서 혼자 울었을 거다. 또 거실에서 640ml짜리 맥주 한 병을 땄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하면 이제는 조금 슬퍼진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즐거운 일이다.

영화나 책에 나오는 추상적인 장면이나 글귀에 공감하게 되고, 내 주변에서 벌어지는 많은 것들을 점차 이해하게 된다. 최근 들어, 우연치 않게 엄마를 소재로 한 영화나 책을 자주 접한다. 장면을 보며, 글귀를 보며 점차 엄마를 알아간다. 아껴야 했고 침묵해야 했으며 그것 외에는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는 것을. 구리다 생각한 것들에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이제는 점차 알아간다. 지금껏 나이를 거꾸로 먹어온 거 같다는 부끄러움과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이 상충된다. 지금 생각을 가진 채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말 그럴 수 있다면. 재입대라도 하겠다. 이게 영화라면 나는 너무 악역이고 엄마는 너무 비참하다. 너무 늦게 이해하고, 화해하고, 만회하는 식으로 귀결되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지 않다.


다시 내 앞에 앉았던 중년커플을 회상해 본다. 여자는 오랜만인 나들이에 신이났고 그래서 나름 비장의 무기라며 모셔둔 새빨강 립스틱을 발랐고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폐를 끼치는 걸 몰랐다. 남자는 그걸 알았고 나는 그걸 몰랐다. 폐를 끼치던 말던 오랜만인 나들이에 신나 비장의 무기라며 새빨강 립스틱들 바른 여자에 누가 화를 내겠는가. 그건 후레자식이거나 직언에 심취해 보기 딱한 밥맛 없는 인간이다. 라는 생각에 살가운 아들이 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든다.


친구들과 술자리보다 당신과 밥 한 끼가 우선이고, 당신이 모르는 것들을 차근차근 알려주고, 당신이 입은 옷과 화장에 하얀 거짓말을 할 줄 알고, 당신이 벌벌 떠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가끔 사오는, 그런 살가운 아들이 되고 싶다. 되고 싶다. 되고 싶다로 끝나지 않는 아들이 되고 싶다.


그래서 말인데, 그러니까.


사랑해요, 엄마.


시랑해요, 양희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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