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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명작가 Mar 29. 2024

우리는 모순 속에 살고 있다.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을 가끔 스스로에게 던져보는 것은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큰 놀라움을 선사한다. 이를 테면,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릴 적의 나 자신은 내가 살아간다는 행위를 이렇게 정의 내린 적이 있었다: 목표가 있어 그것을 이루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것. 아마 그 당시엔 목표 의식 없이 하루를 이리저리 떠돌며 시간만 낭비하는 사람들을 너무 고깝게 여겼던 듯하다. 그렇다면, 명확한 목표 의식이 없어 뭘 해야 할지 모르며 항상 주어진 일만 처리하는 사람들은 정말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그 뜻을 이루어 고군분투하던 자신에게서 벗어나 드디어 삶을 편하게 누릴 때가 온 사람들에겐 뭐라 말해야 하겠는가? 그 자들에게 있어 다음 목표가 그저 여생을 편히 즐기는 것이고 그것을 위해 고군분투하는 중이라고 해석해야 하겠는가?


   스스로에게 정의 내린 각자 개개인의 삶의 방식, 추구하고자 하던 방향은 있을 것이다. 위 예시는 그저 필자의 경험이었을 뿐이다. 이제 한 번 질문을 스스로에게도 던져볼 차례다. 과연 내가 이전에 내렸던 그 삶을 추구해야 하는 방향과 정의들은 옳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다. 그저 타협점 따위 일절 존재하지 않던 문제였을 뿐이다. 필자 또한 어릴 적 나 자신이 세운 저 정의를 보고 틀렸다 생각한 적이 단 한순간도 없다. 단지 그 정의는 나 자신을 위한 것일 뿐이다. 그러니 누군가에게 대입하는 순간 그릇되어 보이는 정의가 되는 것이다.




   오래전 만난 친구가 한 명 있었다.

   평소 놀기를 좋아하고, 공부를 뒷전으로 두었으나 항상 나름 괜찮은 성적을 유지하던 한 친구가 있었다. 비결이 궁금하다면 스스로의 마음가짐을 새로 하길 바란다. 요지는 이 친구의 삶에 대한 정의에 있다. 그녀에게 있어 삶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루하루를 최대한 만족스럽게 즐기는 것이었다. 덧붙이자면,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하고 괴롭게 하는 것에서 멀어지는 것도 포함될 것이다. 거기에 그저 공부가 포함되었을 뿐이지만 결코 놓진 않은 것처럼, 이 또한 쉽게 타협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들은 그녀의 가치관을 반영했으며, 또한 서로 간 확고한 입지를 주장했다.


   누군가 비슷한 가치관을 지녔다면 읽으며 아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또한 어떤 어색함도 느낄 겨를이 없었을 터. 또 누군가는 저런 가치관은 그저 게으름뱅이나 쾌락주의자들을 좋게 포장하는 말일뿐이라고도 주장할 것이다. 좋게 말해 저 정도지, 만일 툭 까놓고 말했으면 그냥 "놀기만 좋아하고 해야 하는 건 뒷전인 성격"으로 폄하하는 듯한 말로 변질되었을 것이다. 앞서도 말했지만, 삶에 대한 정의는 옳고 그름이 없으며, 일체 타협할 수 없는, 될 수도 없는 영역이라는 것을 명심하라. 같은 의미지만 다른 표현으로 바꾸는 것 또한 그러하다. 누군가는 표현이 바뀌는 것조차 그 의미를 훼손한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인간은 항상 색채가 강한 생명체라는 것도 명심하라. 그렇기에 모두가 다 다른 가치관을 지녔으며, 동일해질 수도 없었으며, 곧이어 세상이 이렇게나 다채로울 수 있었던 것이다. 각자가 생각하던 "정상인"의 모습, "나다움", "삶의 정의" 이 모든 것이 그 세상을 칠하는 것이다. 붉은색과 푸른색을 같이 두고 어느 것이 더 아름답다 말할 수 있겠는가. 그저 "다른" 색을 내뿜을 뿐이다.




   재밌는 점은, 이렇게나 다채로워도 스스로는 그 색에 절대 다가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인간이고, 그렇기에 가장 모순적이며 가장 아름다운 결점을 품고 나아가는 생명체다.


   얼핏 가다 누구든 한 번쯤 들어봤을 그 유명한 이론들, 불완전성 정리와 불확정성 원리를 잠시 엿볼 필요가 있다. 이 원리들은 각각 수학과 물리학 분야에서 탄생했다. 괴델은 어떤 수학적 이론도 스스로가 정한 틀(수학적 공리계) 안에선 자기가 사실 옳은지, 혹은 틀렸는지조차도 알 수 없다는 이론, 불완전성 정리를 발표하였었고, 하이젠베르크는 위치와 속도, 어떤 매우 작은 입자는 이 두 가지를 동시에 확정할 수 없다는 이론인 불확정성 원리를 발표하였었다.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온 원리나 이론치고는 숫자나 수식을 빼니 꽤나 철학적으로 해석이 가능해 보이지 않는가? 사실 대부분의 인간이 불완전성 정리의 예시로서 잘 살아가고 있으며, 불확정성 원리는 정말 해석하기 나름이지만 모두가 생각해 보면 그러한 순간들이 많이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가 정한 틀, 그것은 바로 자신의 삶에 대한 정의와 같다. 또한 스스로가 추구하고자 하는 인간상, 바로 "나다움"도 포함된다. 이는 필자로선 스스로가 정한 한계치로도 해석이 가능하다고 본다. 거기에선 스스로가 틀렸는지조차 모른다는 것은, 달리 말해 벗어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수식이나 정리(Theorem)에 있어 그것의 참/거짓을 밝히는 것은 그 공리계, 즉 수학이 이미 정한 그 틀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 틀 자체에 모순이 있어 애당초 의미가 없는 참/거짓의 구분인지도 모른 체 그저 눈에 보이는 그 결과만을 받아들이게 되는 꼴이란, 인간에게 있어선 마치 스스로가 정한 나 자신의 모습, 그 한계를 맞서 깨부수며 진정으로 옳고 그른 게 뭔지 찾아가려는 게 아닌, 거기에 맞추는 것조차 힘들어 타협해 나가려는 모습으로밖에 비추어지지 않았다.

   해석에 약간의 어폐는 존재할 수 있다. 특히나 수학을 전공한 자들에게 있어선 더더욱 이상해보일 수 있다. 허나 필자 또한 수학을 전공했고, 그래서 더더욱 이런 식의 철학적 접목을 즐긴다. 이상해 보인다면, 너무 그 이론에 쓰인 글귀들에만 집착하지 말길 바란다.


   불완전성 원리는, 사실 그 안을 굳이 들여다보지 않아도 그 이름에서부터 인간과 너무 잘 들어맞는다. 하이젠베르크는 특히나 전자와도 같은 미립자들에 관해 그들의 위치와 속도를 동시에 특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하였지만, 이는 인간에게 있어 "이상"과 "현실"을 동시에 붙잡아 현상하기 어렵다고도 느낄 수 있다. 우리가 바라던 모습과 현재는 얼마나 닮았는가? 둘 중 하나에라도 제대로 집중할 수 있었던가? 이상과 현실, 둘 다 동시에 잡을 수조차 있었던가? 그런 시도조차 통했던가?


   비단 이상과 현실뿐만이 아니다. 어떤 이루고자 하는 두 가지 이상의 목표가 있다면 그것은 항상, 혹은 매우 높은 확률로 상호충돌하기 마련이다. 목표와도 더불어, 인간 본연의 성질을 사분하고 양극화하여 잘 구분지은 요소인 MBTI, 즉 성격도 그러하다. 어떤 사람은 말한다. I이다가도 E 같고, 다른 요소도 그러하다고. 그것은 당신이 인간이라서다. 그 외에 다른 특정 요소는 사실상 무시 가능하다.


   무엇이 되었든, 인간 또한 전자의 위치와 속도처럼 한 가지 측정방식으로만 미루어 바라보면 그 사람을 정확히 알 수 없으며, 그 사람 또한 매 순간 변한다. 절대 정적일 수 없는 것이 바로 생명체, 그중에서도 특히 인간이다. 식물조차 필자는 매 순간 우리가 알게 모르게 제대로 변화하고 있다고 보지만, 인간은 그중에서도 정점에 선다고 본다.


   즉,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정한 모순 속에 나름의 행복을 찾으며 살아가고 있는 셈이다. 추구하던 것은 될 수 없는 나 자신, 매 순간이 불완전한 존재로서 이 미지의 세계를 살아간다. 이러한 고민은 정체성의 확립에 도움을 줄 테지만, 너무 깊게 고민할 필요 또한 없어 보인다. 왜냐하면, 그 고민 또한 당신의 공리계[한계치] 안에서만 발버둥칠 수 있기 때문이다.




   2024 0329 0035

   들인 시간의 가치는 사색의 시간을 반영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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