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K-문제집 02화

믿고 있는 ‘상식’, 사실은 세뇌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어떻게 ‘당연함’을 믿게 되었는가

by 슈퍼T

우리는 어떻게 ‘당연함’을 믿게 되었는가

– 역사와 미디어가 만든 사고방식의 비밀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혹시 스스로에게 묻는 적이 있나요. 내가 믿는 것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들, 내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들은 정말 나 자신의 선택일까요. 아니면 누군가가, 혹은 무수한 세월 동안 만들어진 문화와 관습이 나에게 그럴듯하게 주입한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수많은 ‘당연함’ 속에 둘러싸입니다. 어릴 적, 부모의 손을 잡고 본 텔레비전 광고 속 밝은 웃음과 완벽한 집, 교과서 속 역사적 사건과 영웅들의 이야기. 청소년 시절에는 친구와 비교하며 성장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영화와 드라마에서 반복되는 사랑과 성공의 공식에 무심히 공감합니다. 성인이 되어서는 SNS 피드를 스크롤하며 타인의 삶과 끊임없이 비교당하고, ‘좋아요’와 팔로워 숫자가 내 가치와 연결되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집니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해 보이지만, 사실 우리는 한 치 앞도 모른 채 설계된 흐름 속을 걷고 있습니다. 광고는 단순히 물건을 팔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삶인지’를 우리의 마음속에 그립니다. 영화와 드라마는 우리가 사랑을 느끼고 관계를 맺는 방식을 반복적으로 각인시키며, 이상적인 인간상을 몰래 심어 줍니다. 역사와 교육은 특정한 사건과 인물만을 강조함으로써, 우리가 세상을 이해하는 틀을 한정합니다.

이 모든 과정은 놀랍도록 치밀합니다. 우리가 자유롭게 선택한다고 믿는 순간조차도, 이미 외부의 손길이 닿아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권력자와 시장, 문화 집단과 미디어는 각자의 목적을 위해 ‘당연함’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당연함을 의심 없이 받아들이며 살아갑니다.

이 글은 우리가 왜 특정한 사고방식을 당연하게 믿게 되었는지, 그 배후에서 역사와 미디어가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밝히려 합니다. 또한 독자가 스스로 당연함을 재검토하고, 자신의 생각과 선택을 다시 주도할 수 있는 길을 보여주고자 합니다. 우리가 믿는 세계는 겉보기와 달리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으며, 그 구조를 이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한 걸음 더 자유롭게 세상을 바라볼 수 있습니다.

당신이 지금 당연하게 믿고 있는 것들을 잠시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눈을 크게 뜨고, 숨겨진 설계의 흔적을 찾아보십시오. 당신이 발견할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역사적 사례 1] 중세 유럽: 신은 질서, 교회는 시스템

13세기 유럽. 당신이 평범한 농노로 태어났다고 상상해보십시오. 태어나면서부터 삶은 이미 설계되어 있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주일마다 미사에 참석하며 사제의 설교를 듣는 것이 일상의 시작입니다. 이 사회에서 “지옥은 실제로 존재하며, 신에게 불복종하면 영원한 고통이 따른다”는 명제는 단 한 번도 의심될 수 없는 진리였습니다. 귀족 가문이 몰락하더라도 사제는 여전히 존경받았고, 십일조 납부는 선택이 아니라 당연한 의무였습니다. 질문을 던지는 순간, 혹은 믿음을 의심하는 마음은 죄악으로 간주되었습니다.

당시 신앙은 단순한 개인의 믿음을 넘어 사회 질서의 핵심이었습니다. 농노는 토지와 귀족의 명령에 묶여 있었지만, 그들의 사고와 행동을 규율하는 근거는 언제나 ‘신의 명령’이었습니다. 교회는 법과 권력의 공백을 채우며 사회 시스템의 역할을 했습니다. 사제는 교육자이자 법 집행자였고, 성경과 교회의 해석은 일상생활의 모든 규범을 정당화했습니다. 농노는 자신이 왜 이토록 힘든 노동을 하고 왜 주인의 뜻에 따라야 하는지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명확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신의 뜻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권위가 어떻게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되는지는 잔 다르크의 사례가 잘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민족 영웅 잔 다르크는 스스로 “신의 계시를 들었다”고 주장하며 전장에 나섰습니다. 그녀는 기적처럼 군을 승리로 이끌며 국민에게 희망을 주었고, 전쟁의 흐름을 바꿨습니다. 그러나 상황이 달라지자, 그녀는 곧 정치적 위협이 되었습니다. 종교재판소는 그녀를 이단으로 몰아 화형에 처했습니다. “신의 뜻”이라는 절대적 권위는 그 순간, 기득권에게 유리할 때는 신성한 명령이 되었지만, 불리할 때는 악마의 언어로 뒤바뀌었습니다.

중세 사회에서 교회는 단순한 종교 기관이 아니라, 질서 유지의 도구였습니다. 성직자들은 권력자와 협력하며 사회를 통제했고, 교육과 예술, 법과 제도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영향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스며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선택했다고 생각하는 사고와 행동도 사실상 교회와 권력 시스템이 만들어놓은 길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농노의 하루를 들여다보면 이 구조는 더욱 명확해집니다. 새벽부터 들판에서 일하고, 낮에는 사제의 설교와 기도문을 외우며, 주일에는 미사에 참석하고 공동체 의무를 수행합니다. 작은 반항이나 질문은 공동체 내에서 배척되었고, 죄책감과 두려움은 개인의 마음속 깊이 각인되었습니다. 이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당연함’을 받아들였습니다. 신과 교회, 귀족의 권위는 의심할 수 없는 사실처럼 느껴졌고, 의심하는 자체가 죄악이자 위험으로 여겨졌습니다.

결국 중세 유럽에서 ‘신의 뜻’과 교회의 권위는 고정된 진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권력과 시스템이 필요에 따라 해석하고 재구성한 결과물이었고, 사람들은 철저히 통제된 시야 안에서 세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안에서 형성된 사고방식과 믿음은 자연스럽고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사실은 누군가의 설계 속에 놓인 산물이었습니다.


[역사적 사례 2] 조선의 유교 체제: 효와 충의 이름으로

조선 사회는 성리학에 기반한 유교 이데올로기로 철저하게 유지되었습니다. 왕과 관료, 양반에서부터 농민과 하층민에 이르기까지, 사회 구성원 모두는 ‘충’과 ‘효’를 삶의 최고 가치로 받아들였습니다. 충은 임금과 국가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효는 부모와 조상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을 의미했습니다. 이 두 가지 원칙은 단순한 도덕적 지침이 아니라, 사회 질서와 정치적 권위를 정당화하는 핵심 장치였습니다.

유교 체제에서 개인의 권리와 선택은 체제 유지와 질서 강화를 위해 언제나 제한되었습니다. 병자호란 당시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성들의 삶은 이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전쟁과 포로 생활 속에서 그들은 원치 않는 결혼과 모욕적인 처우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조선으로 돌아온 후에도 사회는 그들에게 관대하지 않았습니다. 귀환 여성들은 ‘절개를 잃은 자’로 낙인찍혔고, 일부는 압박과 수치심 속에서 억울하게 자결해야 했습니다. 놀랍게도, 그녀들의 죽음은 단순한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국가와 사회는 그것을 ‘열녀문’이라는 상징적 기념물로 포장하여, 여성들의 희생과 죽음을 사회 질서를 강화하는 도구로 활용했습니다. 여성의 생명마저 체제의 안정과 사회 규범을 위해 전환된 것입니다.

조선의 유교적 규범은 겉으로는 도덕적 절대성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권력과 사회 통제를 위해 설계된 장치였습니다. 관료들은 충과 효를 강조함으로써 백성들의 사고와 행동을 제어했습니다. 농민과 평민은 자신이 자발적으로 선택했다고 믿는 행동과 사고조차, 체제와 사회가 만들어놓은 길 위에서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의심이나 반항은 단순한 개인적 문제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죄악으로 규정되었고, 공동체에서 배척되거나 심지어 생명의 위협으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유교 체제에서는 일상생활의 모든 순간이 규범과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농민은 토지를 경작하며 부모의 뜻과 지역 공동체의 관습을 따르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과 주변 사람들의 행동을 충과 효의 기준에 맞추며 살아갔습니다. 여성은 자신의 삶과 결혼, 사회적 행동을 절개와 효에 맞추어 평가받았습니다. 양반 남성조차 가족과 신하, 국가에 대한 충성을 끊임없이 증명해야 했습니다. 이처럼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행동은 체제가 요구하는 가치로 철저히 내면화되었습니다.

결국 조선 사회에서 ‘충과 효’라는 당연함은 자연발생적인 도덕이 아니라, 체제를 유지하고 사회 질서를 강화하기 위해 설계된 규범이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너무나 당연하고 불변의 도리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체제의 논리와 권력의 계산이 깊숙이 숨어 있었습니다. 개인은 선택할 자유가 없는 듯 보였지만, 사실은 체제와 사회가 만들어 놓은 경계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내면화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히 역사적 사례에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가 지금도 ‘당연하다’고 믿는 가치와 규범 속에는, 때로는 조선 유교 체제나 중세 유럽 교회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권력과 사회적 설계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충과 효의 이름으로, 신과 교회의 이름으로 만들어진 당연함이 인간의 사고를 얼마나 깊이 지배했는지 이해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하는 자유를 회복하는 첫걸음입니다.


[현대 사례] 미디어 알고리즘: 욕망과 분노를 설계하다

오늘날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특정 가치관과 감정을 반복적으로 주입받고 있습니다. 그 손은 과거 교회와 왕권, 유교 체제가 그러했듯,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자연스럽게 제한하고 방향을 설정합니다. 다만 현대의 설교자는 더 이상 붉은 제단 위에 서 있지 않습니다. 그 자리는 스마트폰 화면과 컴퓨터 모니터 속 알고리즘이 대신합니다.

먼저 인스타그램과 같은 소셜미디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이 플랫폼은 ‘좋아요’와 ‘체류 시간’을 기준으로 게시물을 우선적으로 노출합니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가장 자극적이고 시각적으로 눈에 띄는 콘텐츠로 향합니다. 화려하게 보정된 몸매, 고급스러운 소비, 완벽하게 꾸며진 일상. 반복적으로 노출되는 이러한 이미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비교와 불안을 심습니다.

“나만 이렇게 부족한 걸까?” “저 브랜드를 사야 나도 저들과 같아질 수 있을까?” 이 질문은 단순한 심리적 불안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광고와 뷰티 산업은 그 불안을 바로 수익으로 전환합니다. 소비 욕망은 산업과 알고리즘이 만들어낸 구조 속에서 강화되며, 사람들은 스스로 선택했다고 느끼지만 사실은 설계된 욕망의 흐름 속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입니다.

유튜브와 같은 영상 플랫폼에서는 이러한 설계가 정치적 영역으로도 확장됩니다. 유튜브 추천 알고리즘은 사용자가 오래 머물도록 최적화되어 있습니다. 체류 시간을 늘리기 위해, 플랫폼은 점점 더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콘텐츠를 추천합니다. 그 결과 정치적 양극화가 심화됩니다. “그 정당은 나라를 망치고 있다!” “모든 문제는 특정 집단 때문이다!” “기득권이 진실을 숨기고 있다!” 분노와 공포, 음모론은 클릭과 조회수를 유발하고, 알고리즘은 이를 반복적으로 강화합니다. 시청자는 자신이 직접 판단했다고 느끼지만, 사실상 플랫폼은 감정과 사고의 흐름을 세밀하게 설계하고 있습니다. 결과적으로 사회는 점점 갈라지고, 정치 세력과 기업은 이를 전략적으로 이용합니다.

중세 유럽에서 설교가 ‘신’을 앞세워 백성을 통제했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알고리즘이 ‘데이터’를 앞세워 우리의 관심, 감정, 사고를 조종합니다. 교회와 왕권이 인간의 사고를 제한했던 방식과 본질은 유사합니다. 다만 이제 설교는 코드와 추천 시스템 속에서 진행되고, 설득과 통제의 방법은 디지털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인간의 욕망과 분노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 설계된 결과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알고리즘과 플랫폼의 흐름 속에서 사고와 행동은 이미 유도되고 있습니다. 결국 현대 사회의 ‘당연함’은 개인의 자발적 판단이 아니라, 데이터와 기술이 만들어낸 설계물인 셈입니다.

이 사례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명확합니다. 중세 교회의 설교와 조선 유교 체제가 인간 사고를 제약하고 체제를 유지하는 방식과, 현대 미디어 알고리즘이 인간의 욕망과 분노를 설계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같은 구조를 공유한다는 점입니다. 시대와 기술은 달라졌지만, 권력과 체제는 여전히 ‘당연함’을 만들어 인간의 사고를 관리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만들어졌다: 인권, 평등, 자유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인권, 평등, 자유를 ‘당연한 가치’라고 믿습니다. 학교에서 배우고, 뉴스와 미디어에서 반복적으로 접하며, 사회적 담론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이 당연함도 결코 자연발생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수많은 역사적 사건과 사상가들의 투쟁, 사회적 설계 속에서 만들어진 산물입니다.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선택한다고 믿는 순간에도, 사실은 오래된 역사적 구조와 담론의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18세기 이전의 유럽 사회를 떠올려보십시오. 당시 프랑스의 평민은 귀족과 직면하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왕의 말 한마디가 생사와 직결되었고, 여성은 재산권조차 갖지 못했습니다. 인간의 권리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고, 사람들은 신과 권력의 이름 아래 제한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 시절의 ‘당연함’은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불평등과 억압의 구조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당연함을 뒤흔든 것이 바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장 자크 루소는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자유롭고 평등하다고 선언했습니다. 볼테르와 몽테스키외는 인간의 권리와 사회 계약의 필요성을 논하며, 전제적 권력과 관습에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들의 사상은 사회적 규범을 새롭게 설계하는 원동력이 되었고, 오늘날 민주주의와 현대적 인권 체계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에게는 상상조차 어려운 자유와 권리의 개념이, 철저한 논리와 철학적 사유, 수많은 사회적 논쟁과 투쟁을 통해 현실화된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도 인권과 자유는 완전하지 않습니다. 세계 곳곳에서 여성의 교육은 제한되고, 동성애는 여전히 범죄로 간주되며, 소수자들은 사회적 배제와 차별에 노출됩니다. AI와 데이터, 생명윤리 등 새로운 기술과 영역에서는 ‘인권’이 다시 시험대에 올려져 있습니다. 인간의 권리는 늘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며, 그 기준과 범위는 역사적·사회적 논쟁 속에서 재정립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는 모든 가치와 권리는 스스로 생겨난 것이 아니라, 역사 속 권력과 사상, 사회적 설계 속에서 만들어진 당연함입니다. 중세 유럽에서 교회가 설교와 의식을 통해 사고를 설계했던 것, 조선에서 유교가 효와 충의 이름으로 개인의 선택을 제한했던 것, 현대 사회에서 미디어 알고리즘이 욕망과 분노를 조정하는 것과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상 체계와 권력이 만들어놓은 경로 안에서 사고와 행동을 내면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불편한 진실을 이해할 때, 우리는 단순히 ‘당연함’을 수용하는 존재에서 벗어나, 스스로 사고하고 선택할 힘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당연함’이 만들어진 과정과 그 한계를 알면, 인간의 자유와 권리는 더 이상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점검하고 확장해야 하는 살아있는 가치가 됩니다.

결국 우리가 믿는 자유, 평등, 인권조차도 역사적 산물이자 설계된 결과물임을 직시할 때, 우리는 진정한 의미의 자유로운 사고와 선택, 그리고 책임 있는 행동에 한 발 더 가까워집니다. ‘당연함’은 단순한 자연법이 아니라,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적·사회적 구조이며, 그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고, 어떻게 행동할지를 스스로 결정해야 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마무리: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은 ‘만들어진 것’입니다

우리는 매일 뉴스, 밈, 광고, 유튜브 콘텐츠 속에서 살아갑니다. 스마트폰과 컴퓨터 화면 속에서 스스로 선택한다고 믿지만, 사실 그 선택과 사고는 이미 누군가가 설계한 경로 위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데 묻겠습니다. 당신이 지금 믿는 그 ‘상식’은 과연 누가 만든 것입니까? 그 ‘옳음과 그름’의 기준은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유효할까요? 중세 유럽의 농노는 교회의 설교와 성경을 통해, 조선의 백성과 여성은 유교적 규범을 통해, 현대 우리는 알고리즘과 미디어를 통해 사고방식이 형성되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각해 결론에 도달했다고 믿지만, 사실은 태어나면서부터 짜여진 틀 안에서 길러져 왔습니다.

철학, 역사, 정치, 종교, 사회학은 단순한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지금 우리의 사고방식이 어떤 과정을 거쳐 형성되었는지 보여주는 지도입니다. 그 지도가 없다면, 우리는 언제나 누군가의 프레임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과거의 설교와 유교적 규범, 현대의 알고리즘과 광고—이 모든 것 속에서 우리는 ‘자연스러운 당연함’을 배우고 내면화하며, 그것이 곧 옳다고 믿게 됩니다.

당장 모든 고전을 읽으라는 말은 아닙니다. 단 한 권, 단 하나의 질문이라도 좋습니다.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가치—예컨대 “개인의 자유”나 “양성평등”—를 두고 스스로 물어보십시오. 이 가치는 언제, 왜 중요해졌는가? 이 가치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가? 누군가는 이 가치를 이용해 이익을 얻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나는 그 속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 질문은 단순한 지적 놀이가 아닙니다. 시민으로서 자율성을 지키는 첫걸음이며, 선동과 프레임에 휘둘리지 않는 법을 배우는 과정입니다. 우리가 오늘 믿는 가치와 상식이, 과거와 마찬가지로 누군가에 의해 설계될 수 있음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미래의 누군가가 우리를 돌아볼 때, 100년 뒤 사람들은 오늘 우리의 ‘상식’을 야만으로 평가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단순히 당연함을 믿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질문하고 판단하며 책임 있는 선택을 내린 세대로 기억될 수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지금 믿고 있는 그 ‘옳음’은, 진짜 당신이 선택한 것입니까? 아니면 누군가가 설계한 틀 속에서 주어진 것입니까?” 그 불편한 질문을 견디며 조금 더 멀리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는 더 나은 사회와 더 자유로운 개인으로 나아가는 첫걸음을 내딛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단순히 받아들이는 존재가 아니라, 사고와 선택의 주체로서 진정한 자유를 경험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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