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직장에서 업무 외에도 분기 때마다 인권교육을 담당하고 있는데, 인권은 내가 전공한 법학과 깊은 연관이 있는 과목이기도 하다. 교양과목으로 여성 인권까지 수강했었기 때문에 전반적인 내용들이 낯설지는 않았지만, 강의를 준비하면서 교재 내용들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있다는 느낌을 받게 되었다.
'인간 존중'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뜻을 같이하지만, 인간에게는 이해타산적이고 불안정한 면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같은 대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합리한 면이 있다. 따라서 인권은 고려해야 하는 중요한 가치이지만 법과 제도를 유명무실하게 할 정도에 이른다면 그것은 인간을 존중한다는 본래의 취지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법과 제도가 전제로 삼고 있는 '합리적 인간'은 제한 없는 자유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것들을 주장하려면 그에 비례하는 책임을 지거나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기준을 충족할 수 있어야 한다. 자유란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못한 것이 동시에 규정되는 세계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런데 모든 단계에 있어서 가치들은 서로 중복되고, 이들은 다시 비교할 때만 현실성을 가지게 되므로 상황이 저마다 불평등하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선과 악과 같은가치 체계 또한 상대성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해 주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따라서 사안을 대할 때는 전체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살피는 것이 가장 현명한 처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악이라 불리는 것은 항상 편향성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은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인권 영역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고, 결국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균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법은 대륙법과 영미법의 장점만을 조합한 것으로 이론상 시너지 효과가 나와야 하지만 어떤 사건에도 적합하도록 법률에 모든 사항을 선험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한 특성 때문에 해석에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고, 편향성이 반영된 무분별한 입법은 그러한 측면을 더욱 부추긴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잘못이 법률의 취지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위반하거나 악용하는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도 간과할 수 없다. 법의 절대적 지배는 자유가 아니지만, 절대적 방임 역시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불합리'는 규정되는 형식을 불문하고,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라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도스토옙스키는 "자유란, 그것이 악을 저지를 가능성, 그리고 분명한 것을 부정할 가능성을 가져올 때만 완벽하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부조리란무엇인가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랐던 경험을 살려 실존주의의 토대를 다지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그의 문장들은 특유의 긴장감과 묵직함이 느껴진다. 이번 달에는 철학적 에세이인 '시지프의 신화'를 읽으며 인상적인 문장들을 하나씩 노트에 옮겨 적다 보니 연관되는 이미지들이 떠오르게 되었다.
제우스 신의 처벌을 받아 지하에 갇힌 시지프는 무거운 바윗돌을 굴리고 올라가 해방되려 하지만 돌의 무게 따라서 다시 지하로 떨어진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노력을 계속한다. 카뮈는 인간은 모두 시지프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크게 두 가지 태도는 하나는 자살이며, 다른 하나는 도피이다.
부조리는 사전적 의미로 불합리한 것 또는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뜻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삶의 의미를 발견할 가능성이 없는 한계상황을 나타낸다. 모든 아름다움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부조리가 깔려 있는데, 그것은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이며, 큰 감정이라고도 부른다. 인간은 자신들이 다룰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을 악으로 불러왔지만, 사실 그것은 세계가 본모습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정신과 물질의 세계를 포괄하는 의미에서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범위를 뜻하는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범주는 사람이 사는 모든 사회를 통틀어 말하는 '세상'이란 의미에 더욱더 가깝고 우리는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곤 하지만 사실, 세계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엄밀히 의미를 구분하자면 바뀐 것은 세상인데, 실상은 세계의 일부를 지극히 인간중심의 언어로 환원시킨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인간이 덧칠해 놓은 포장들이 벗겨지기 시작할 때 세계는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고, 익숙했던 가치들이 낯선 것으로 여겨질 때, 인간은 일단 눈앞의 현실부터 부인하려는 성향이 강해지는데 그것이 피할 수 없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우리가 당연하게 알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들도 막연하게 믿고 있거나 상상력의 산물에 불과한 것으로 기껏해야 추상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들이 대부분 자신이라 규정하고 있는 '자아' 또는 '의식'이라 부르는 것들도 고유의 것이라고만 볼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사회적으로 훈육되고 길들여져 만들어지는 측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겪는 고통은 그 자체로서 악이라기보다 기껏해야 의식에 반하는 불편한 내적 분열에 지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깝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이러한 상황에 부닥치게 될 때 현실을 부정하기보다 도전하며. 이전의 경험을 통해 자기 확신을 다지게 되거나 자만에 빠지는 경우도 허다하다. 따라서 세계가 아름답고 이상적인 대상으로만 간주하려는 태도는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고 있는 것에 지나지 않으며 실상은 아름답지도 추하지도 않고, 그것은 처음부터 그 상태로 있었다. 그러므로 인생에는 긍정적인 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불행과 불필요한 아픔도 함께 존재한다는 점이 참에 가까우며, 어떤 경우에는 그러한 결여가 인간을 더욱 성숙하게 만들어주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부조리는 인간의 극단적인 긴장과 고독한 노력으로써 끊임없이 지탱되어야 하는 것으로 한쪽이 아니라 양자의 비교에 의해서만 존재하며, 이때 인간은 그가 상대하고 있는 것은 추상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부조리에 대항하는 행위는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마지막까지 소진하게 만들며, 이러한 실존은인간을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쪽으로 향하게 만들거나아직 설명할 수 없는 미지의 것을 찾아 떠나도록 한다. 그래서 카뮈는 희망과 죽음이 혼재된 부조리를 자세하게 들여다볼 가치가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러한 가능성은 현실에 속한 것은 아니지만다른 현실을 촉발할 수 있고, 때로는현실 이상의 현실성을 갖기도 한다.그것은 '선'과 '악', '좋다', '나쁘다'의 문제가 아니라 그 자체의특성이다.한편, 샤르트르에 따르면 이러한 한계는 곳곳에서 나타나 인정되기 때문에 객체적이며, 만약 인간이 이것과 관련해 자유롭게 사는 것이 아니라면, 한계의 입장에서는 주체적이다. 따라서 한계는 주체적이지도 않고 객체적이지도 않으며, 양자의 속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는것이다.
카뮈는 대상을 추상적인 것, 즉 형이상학적인 것으로 관념화시키지 말고 그것을 주시하고, 묘사하라고 말했다. 사유한다는 것은 관념에 매이는 것이 아니라 보는 방법을 다시 배우고 의식이 향하는 쪽으로 방향을 돌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이든 질보다 양이 중요하며, 따라서 다양하게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카뮈는 결혼제도를 탐탁지 않게 여겼다고 전해지는데,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에 그러한 통념이 덧씌워지는 순간, 부조리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며, 그것은 자유의 기회를 소멸시키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을몸소체험했기 때문이다.
카뮈는 작가임과 동시에 배우이기도 했는데, 삶에 매이고 싶어 하지 않는 성향은 그의 직업적인 특성도 한몫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배우들은 한정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들이 가진 모든 감정을 소진하며 순간마다 삶과 죽음을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가 결혼생활을 유지했던 이유는 그러한 부조리가 자기 삶을 지탱하는 원동력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고 볼 수 있다. 카뮈의 스승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장 그르니에는 사랑에 대하여 "그처럼 혼동된 이름이 아마도 정확하게 적용되는 것은 바로 마음에서 우러나는 이러한 관심이, 선으로부터 더 좋은 것을 실현하는 것이 본질적으로 불가능한 인간에게 무언가를 무한정 발견해내게 하고 스스로 선하게 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기 때문이다."라고 표현했다.
두 남자 이야기
출입국에서 관리하는 보호소는 불법체류자들이 퇴거되기 전까지 머무는 곳인데, 처음 파견업무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갇혀있는 모습을 보고 난 후, 온몸을 뒤척이면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보호소에 있는 외국인들은 조사와 단속과정에서 불법체류 사실이 발견된 자들로써, 형사처분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적법한 비자를 소지하지 않고 취업 활동을 하다가 적발되어 단속된다.
언론이나 인권단체에서는 이들을 '미등록외국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대로라면 합법적으로 등록을 하고 절차를 거쳐 체류자격이 부여되는 외국인들과 구별이 되지 않고 이러한 위치에 있는 외국인들은 노동시장을 교란하여 국민과 합법적 외국인들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요구대로 모든 외국인을 받아준다는 것은 국경이나 출입국 절차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업무 하는 처지에서는 난감한 입장에 서게 된다.
인권운동가들은 우리가 외국인들을 차별대우하고 인권을 억압한다고 주장하는데, 현실적으로 국제관계는 상호주의가 원칙이고, 우리 국민도 못 받는 대우를 먼저 베풀어야 할 의무는 없다. 난민법이나 세계인권선언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한 부담은 우리 국민한테 그대로 전가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사항이고 외국인들은 자신의 비자 등급에 아주 예민한 편이라서 인도적 사정을 고려해야 하는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면 법과 지침에 따라 객관적으로 처리하는 그것이 원칙이다. 왜냐하면 각각의 사정에 따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기 때문이다.물론 이민이나 난민수용이 국가 경쟁력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입국은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고, 법질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기도 하다. 가장 인권에 민감한 국가인 미국을 보더라도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다.
외국인이라고 해서 같은 범주에 넣고 같은 대우를 하게 된다면 높은 등급에 있는 자들은 그것을 매우 불쾌하게 생각할 것이다. 국민에 준하거나 우대를 받는 사람들에게 체류자격의 차이는 능력이나 신분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사람은 평등하게 대해야 하지 않느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 국가이건 사회주의 국가이건 세계 역사를 통틀어도 절대적으로 평등에 도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따라서 그러한 정도를 차이로 받아들이냐 아니면 그것을 차별로 인식하는 가에 따라 행복의 유무는 달라질 수밖에 없을것이다. 더 나아가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는 절대로 발전할 수 없고, 차별로 사람을 대하는 사회는 결국 붕괴에 이르게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국적만큼 다양한 유형이 있었기 때문에 골치를 썩이는 인간들도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 마음을 터놓게 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렇게 친해진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다양한 시선들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출입국 공무원이라는 신분에서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함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의 희망을 말했고, 다른 이들은 주어진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느껴지곤 했다. 그것은 아마도 세계의 본질을 마주하면서도 그 앞에 굳건히 서 있는 인간에 대한 외경심이었을 것이다.
장 그르니에는 행동하는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도 그의 본능과 행위 사이에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즉각적인' 인간에 가깝다고 말했는데, 필자가 보호소에서 만났던 외국인들이 그 표현에 딱 들어맞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산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었기 때문에삶과 죽음의 문제는 크게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나는 정상적으로 군대 생활을 했고, 고생을 많이 한편에 속하지만 만약 그들과 같은 상황에 부닥쳤더라면 아마도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 역시 문명에 길든 전형적인 '먹물'의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편으로는 그들이 두렵게 여겨지기도 했다.
어느 날 '샤리프'라는 이름을 가진 방글라데시 출신의 젊은 남자가 약혼자의 일방적인 파혼 통보로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 상태에서 직장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렀다가 구치소에 갇힌 후, 내가 있던 사무소로 오게 되었다. 그는 선한 눈망울을 가졌던 친구였고,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지면 직원들에게 욕을 하거나, 다른 외국인에게 시비를 걸어서 애를 먹이곤 했다. 샤리프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는데, 그의 신앙심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무작정 본국으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일단 사무소에서는 샤리프를 정신병원에 데려가 진단을 받게 했고, 같은 나라 출신인 외국인에게 간호를 부탁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랄프'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생활 태도가 성실해서 직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신망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나는 랄프를 아저씨라고 불렀고, 아침에 출근하면 그에게 샤리프의 동태를 묻는 것이 업무의 시작이었다.
랄프는 결혼이민자 출신이었는데, 이혼당한 상태에서 가택에 들어갔다가 아내에게 주거침입으로 신고당해, 체류자격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사무소로 오게 되었다. 독실한 샤리프와 달리 종교 자체가 없었고 지극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랄프는 방글라데시에서 대학을 나왔고, 한국에 대해서도 심층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박학다식하기도 했다. 그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의 애청자이기도 했는데, 한때는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바람까지 피운 아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랄프의 삶은 비극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기 능력과 출신에 대해서 강한 자부심을 가졌던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샤리프와 같은 과로 분류되는 것을 불쾌해했다. (부연설명을 하자면 랄프는 결혼이민자 신분인 F6였고, 샤리프는 취업비자인 H2였다.) 랄프는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서 노력했던 이야기를 자랑스레 들려주기도 했는데, 언어를 이른 시일 내에 익히기 위해 지하철 노선들과 연상되는 단어를 토대로 공부했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불법체류자로 바닥을 치게 되었지만,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내가 지금도 랄프를 특별한 인연으로 기억하고 있는 것은 삶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었다. 그는 비록 불행했던 결혼생활이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 그때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했고, 아직도 그때의 기대와 설렘을 잊지 못한다고 말하곤 했다.
샤리프는 사랑의 영속성을 믿으며 오랜 기다림을 참고 이겨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베일들이 걷히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주어진 현실에서 도망가려고만 했고, 사랑에 대한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커다란 상처로써 다가왔기 때문에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랄프는 그러한 원리를 경험으로 이미 체득했고, 샤리프가 한 번씩 정신이 돌아오면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샤리프는 헤어진 여자친구와도 통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온전해졌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모아놓은 돈으로 동생과 함께 옷가게를 열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랄프가 나갈 때, 다른 직원들과 함께 그를 전송했고, 우리는 서로 덕담을 나누며 헤어졌다.
부조리의 의미
카뮈는 "미덕이란 현실과 분리되면 반드시 악의 원리가 되며 미덕은 현실과 절대적으로 일치하게 되면 반드시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세계각 국가는 코로나 시국을 전후로 극단성이 더욱 강해지고 있는데,우크라이나 전쟁은 그 시작에 불과하며 그동안 축적된 문제들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폭발하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그러므로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신들은 선하다 칭하고 다른 이들은 악으로 매도하는 행위는 더 이상변명거리가 되지 못하고, 어떤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전체를 몰각시키는 것과 같다.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에게 익숙한 영역에만 머물러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임계점에 도달할 때마다 세계는 본모습을 드러내곤 했다. 익숙하게여겨졌던 것들이 낯설게 보이는순간, 현실의 모든 일들이 의미가 없는 것처럼,인간은반복해 오던 행위들에 대해 의구심을던지기시작한다.양자 간의팽팽한 긴장감이,계속됐던 무의미들을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어버리고그들은 -사방이 꽉 막힌-텅 빈 공간에서도 시간은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사슬에 매여있던정신이 속박에서 벗어나 육체를 해방하게되고, 그제야시지프는살며시미소를 짓는다.어차피 미래는 다가오게 될 현실이고, 그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서 그것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참고도서
<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민음사, 2016.06.17. >
< 반항하는 인간, 알베르 카뮈, 민음사, 2021.06,16 >
< 실존주의란 무엇인가, 장 폴 샤르트르, 동서문화사. 2020.10.01. >
< 왜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가, 마르쿠스 가브리엘, 열린 책들, 2017.10.30 >
<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카를로 로벨리, 쌤앤 파커스, 2021. 05.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