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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이징포스 Feb 27. 2023

우리 시대의 '대상화', '타자화'

#구토, #사르트르, #엔트로피, #예술

*도시들은 아침마다 똑같이 돌아오는 단 하루를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일본에서는 종업원을 부를 때, 호칭보다는 '스미마셍'이라는 말을 쓰는데, 상품과 서비스를 요구하는 것은 손님인데도, 돈을 주고 종업원을 부리는 것 자체가 실례인 것처럼 대한다. 반면 한국은  가족처럼 '언니', '이모'라는 친근한 표현을 쓰면서도 '손님은 왕이다.'라는 기치 아래, 종업원을 하대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된다. 그리고 '아가씨', '총각'이라는 표현이 불편함을 준다고 하여 '여기요.' 또는 '저기요'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결국 테이블마다 달리는 그것은 버튼만 누르면 종업원을 부를 수 있는 '호출벨'이다.          


시간의 엔트로피     


 넥스트 1집의 '도시인'이라는 노래에서는 "아침엔 우유  잔, 점심엔 패스트푸드. 쫓기는 사람처럼 시곗바늘 보면서, 거리를 가득 메운 자동차 경적소리…."라는 가사가 있다. 그 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고,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아직도 여전한 것은 삶은 무거워지고 사람은 가벼워지고  있는 현실이다.     

 헤겔은 역사는 정반합의 과정에서 '절대지'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이러한 관점은 주체 중심적인 의식행위로써 개념적이고 일방적인 특성 때문에 주체 외의 모든 대상을 표상에만 머물러있게 만든다. 반면, 자연현상의 비가역적 방향성을 나타내는 열역학 제2 법칙에 따르면, 엔트로피라는 상태변수는 항상 0보다 크거나 같을 뿐이며, 따라서 우리가 머무르고 있는 시공간이 표면상으로는 앞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과거, 현재, 미래라고 불리는 알갱이들이 한 덩어리로 동시에 존재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여전히 현실에 매여있고, 그러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미래도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현실은 시공간에 매이지 않고 항상 그 자리에 머물러있는데, 어떤 각도에서 그것을 보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알갱이의 속성  

   

 양자역학은 두 가지 발견으로 상대성이론을 주장했던 아인슈타인을 머쓱하게 만들었다. 첫째는 미시적 차원의 세계로써, 그곳에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알갱이의 속성 때문에 항상 불연속성이 발견된다. 두 번째는 모든 움직임에는 우연한 요소인 본질적 불확실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어떤 한 입자의 현 상태는 다음 순간에 일어날 일을 정확하게 결정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미시적 차원에서 물체들의 변화는 확률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어떤 사건이 일어난다는 의미는 그것을 구성하고 있는 입자의 움직임이 변화하는 것에 불과하다.     

 투자도 마찬가지이다. 차트분석을 하고 기댓값을 산출하는 것이 수익을 창출하기 위한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 될 테지만, 그러한 데이터 또한 과거의 사실일 뿐. 그것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은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결과를 예측할 수 없도록 만드는 매개변수는 인간에게 본질적으로 내포되어 있는 '욕망'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리스크를 촉발되도록 만들고, 때로는 주가 변동의 폭을 급변하게 하여 전문가들을 무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언론은 언제나처럼 천연덕스럽게 어조를 바꾼다.     

 우리는 유리한 입장에 서 있게 되면 시공간에 크게 구애받지 않는 것처럼 행동한다. 때로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느껴지는 일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형벌처럼 받아들여지는 도 있다. 일반적으로 나이가 들어가면 미래의 환상은 안개처럼 거둬지고, 존재가 사라지게 되면 그것에 연결되는 과거는 더 이상 남아있을 수 없다. 결국 현재만이 우리 곁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사르트르의 소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직업도 없고, 가정도 없으며, 어떤 욕심이나 편견에도 사로잡히지 않으면서도 방향성이 어디로 정해질지 예측할 수 없는, 알갱이와 같은 속성을 가진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는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던지다가 참을 수 없는 구토를 느끼게 되는데, 이후에도 문의 손잡이를 잡거나 타인의 얼굴을 보게 될 때, 맥주컵이 손에 닿았을 때도, 그러한 증상이 계속 나타나게 된다. 로캉탱은 이성과 합리성을 토대로 맺어져 있다고 믿어왔던 세계의 본질이 사실은, 맥락 없이 흩어진 낯선 것들의 '나열'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러한 현실을 거부하려 했을 때, 참을 수 없는 구토를 느끼게 된다. 사르트르는 이러한 현상에 대해 자신의 이해 범주를 넘는 사물의 본래 모습과 부딪치게 되었을 때 나타나는 , 낯설고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감정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술과 대상화

   

 우리는 대개 익숙한 사물에 대해서는 원래부터 그러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게 되는 것에 '본래'라는 말을 쓴다. 이 단어는 명사로는 사물이나 사실이 전하여 내려온 그 처음, 부사로는 처음부터 또는 근본부터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그것은 지극히 일방적인 측면이 있는데, 어떤 의미에서는 폭력적이기도 하다. 사물 그 자체에 내포된 가능성을 배제하여 버리고 마치 자신에게 유리한 측면만을 정당한 것처럼 규정하여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대상의 본질적인 속성이 주체의 표상 체계에 의해 왜곡되기도 한다.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대상일지라도 인간의 정신을 통한 포섭과 이해를 거치게 되면 소급돼서 어떠한 것으로 규정되게 되는데, 이러한 '대상화'는 '타자화'라고도 부르며, 대상화를 거치게 되면 사물은 인식을 통해 질서 있게 관리되게 된다.     

 인간은 언어 또는 수치를 통해 주변의 사물을 규정하여 소유하고 지배하려 하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도 그러한 욕망을 투사하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러한 대상화는 한 행위자가 다른 자를 이해하고 규정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고유성을 박탈하게 만들고, 사물이나 대상, 또는 물건의 형태로 제한하기로 한다. 심지어 자기 자신까지도 대상화가 가능하다. 하지만 사물과 언어가 일치되지 않는 언어도단의 현상이 나타나게 되면,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영역이 갑자기 나타나 기존의 정의를 교란하고, 오히려 인간이 객체의 대상이 되면서 주변의 환경에 대해 낯섦을 느끼게 된다. 심하면 위협을 받기도 하며, 특정 사물에 압도당하거나 잠식되어 버리는 경우가 나타날 수도 있는데, 우리는 가끔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보게 되었을 때 이러한 낯설고 불편한 기분을 느끼게 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즉  거울  속의 형상이 내가 아니라는, 아니지,  겉모습으로는 완전히 나였지, 그건 틀림없어. 하지만  그건 절대  내가 아니었어. 나는 그걸 본능적으로 알았어. 아니지, 틀렸어. 정확히 말하면 그건 물론 나였어. 하지만 그건 나 이외의 나였단  말이야.  그것은 내가 그렇게 존재할 수 없는 형태로서의 나였단  말일세.   
< 거울, 무라카미 하루키 >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태를 ' 피투'()라는 단어로 표현했는데, 이는 단독자로서 세계 속에 던져졌다는 의미로 사르트르는 피투 된 인간은 고독 속에서 고통과 불안을 느끼며 '구토'를 경험하게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불안감은 분노나 기쁨과 같은 종류의 단순한 감정에 한정되는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모든 감각들을 표면으로 드러내는 행위이기도 하며, 수동적인 위치에서 자신을 적극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저항을 촉발하게 만드는 매개체가 되기도 한다.   

  알베르 카뮈는 이러한 부조리의 영역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에 굴복하지 않는 태도를 순수한 의미의 '반항'이라고 했는데, 그러한 행위들이 중첩되다 보면 굳건한 것으로만 알았던 세계에도 서서히 균열이 일어나게 된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은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라 말할 수 없고, 오히려 사물에 대한 고정된 관념을 넘어서서 세계와 새롭게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 키르케고르는 이러한 자아 규정 방식을 '실존'이라고 했고, 그것은 항상 의식되는 것이 아니며, 그것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부단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에 '본질'은 이와 상대되는 의미로써 그 무엇이라 정의될 수 있는 성질을 말하는데, 사르트르는 처음부터 본질적인 다른 사물들과는 달리, 인간은 본질보다 실존이 앞서는 존재이므로 불완전한 존재라고 말했다. 그런데 불완전하다는 말은 완전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고, 실존은 본질 쪽으로 향해가려는 속성이 있어서 인간에게는 자신을 끊임없이 만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자유가 주어진 이유이다.

 실존을 통해 사물의 외연이 확장되면서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게 될 때, 의식하지 못하던 영역으로부터 틈새나 파열구를 찾아내게 되고, 낡은 감각이나 평범한 사유에 균열을 내어 속살을 드러내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므로 '본래'라는 단어는 정해진 용도나 익숙한 개념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사물 속에 내포되어 있으면서, 언제라도 바깥으로  뻗어나갈 수 있는 능성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해석해야 한다.

 대개는 대상이 주는 이미지에 갇혀 우리의 눈길을 끌지 못했던 특이성들이 어떤 계기를 통해 감각 전체를 관통하게 되고, 각자가 속해 있는 세계의 본질에 대해 의구심을 갖만든다. 일상적인 사실에서 역사적인 의미를 발견하게 될 때, 그로 인해 생겨나는 혼돈의 소용돌이는  익숙한 것으로 여겨져 왔던 모든 것을 뒤흔들어 놓고, 우리가 스스로 부여했던 의미 자체를 조각처럼 흩어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한 삶의 파편들이 시간과 함께 점차 기록이 되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게 되었을 때, 얽매여있던 가능성이 하나씩 해방되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그러한 모든 시도를 '예술'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대상을 끝까지 그리고 자세하게 들여다보게 만들고, 행위를 통해 형식과 틀을 타파하고 실현 불가능해 보이는 것을 상상하도록 만들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예술의 자유는 작가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작가가 마주한 타자, 즉 독자의 자유가 작가에게 협력하지 않고는 결코, 글쓰기는 완성될 수 없으며. 인간은 타인을 위해서 혹은 타인에 의하여 서로 의존하며 살아가는 존재이기 때문에 양자적인 입장에서  우리 모두가 예술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산다는 것이 그런 거다. 그러나 사람이 삶을 이야기할 때는 모든 것이 변화한다. 다만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는 변화이다. 그 증거로 사람은 정말 이야기한다는 점을 들 수 있다.

♧ 참고도서

< 구토, 장  폴  샤르트르, 방곤, 문예출판사,  2004.02.12 >

< 사르트르의 '구토'읽기, 장근상, 세창미디어, 2015.09.10 >

< 만약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카를로 로벨리, 쌤앤파커스, 2021.05.11.>

< "저기요"와 "스미마셍', 임상균, 매경 ECONOMY, 2023.02.10 >

< 4월의 어느 맑은 아침에 100퍼센트의 여자를 만나는 것에 대하여, 무라카미 하루키, 문학사상, 2015.05.15. >


분명히  어딘가 나와 먼 세계에 있는 기묘한 장소에서 나 자신과 만나게 될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그리고 그곳이  될 수 있으면 따스한 장소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만일  거기에 차가운 맥주가 몇 병 있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이다. 그곳에서는 나는 나  자신이고, 나 자신은 나다. 그  둘 사이에는 어떠한 틈도 없다. 그러한 기묘한 장소가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 1963/1982년의  이파네마 아가씨, 무라카미 하루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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