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뮈엘 베케트의 소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는 디디와 고고라는 두 남자는 아무런 의미 없는 말을 주고받으면서 반복적인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을까? 누구도 알 수 없다. 그저 고도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고도는 무엇인지, 언제 그것이 당도할 것인지 그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러던 중 주인인 포조와 노예인 러키를 만나게 되는데, 포조는 러키를 끌고 가고 러키는 끌려다닌다. 그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지만 소통하지 않으며, 고도가 무엇인지 관심도 없다.
막이 바뀌어도 배경은 바뀌지 않는다.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 나무의 잎사귀만 조금 남아있을 뿐이다. 디디와 고고는 의미 없이 반복적인 말을 계속하고 있다. 기다림에 지쳐 나무에 목을 매기도 하지만 그들은 다시 내일을 기약하며 고도를 기다린다. 그때 포조와 러키가 다시 나타난다. 포조는 눈이 멀었고, 러키는 귀가 멀었다. 그들은 그 상태로 다시 길을 떠난다. 고도는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일까? 기다림의 대상이 있다는 것 자체가 의미 있는 것일까? 아무도 이에 답하지 못한다. 심지어 작가도 모른다고 한다. 그렇게 디디와 고고는 아직도 그 자리에 머물러 있다.
아직도 그대는 내가 보기에 자유를 상상하면서 감옥에 갇혀 있는 자다.
이상주의자들은 역사는 직선 방향을 따라 진보하기 때문에, 노력하면 보다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데 표면적인 것들을 걷어내고 나면 같은 패턴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팬데믹은 그러한 포장 속에 잠재되어 있던 모순을 가시화시켰지만, 여전히 인간은 낙관만을 기대하면서 같은 행위를 반복하고 있다.
사람들은 역사가 걸어온 여정을 무시하고, 구시대의 유물로 간주했다. 그들은 밝은 미래만을 속에서 얻게 될 과실만을 바라 왔고, 그렇게 정치, 교육. 종교. 철학 등을 막론하고 모든 영역에 거짓들이 판치게 되었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는데도 그들은 아직도 때가 이르지 않았고, 누군가가 와서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으며, 자신들이 믿고 싶은 신의 형상을 빚어놓고 기다리고만 있다. 계속 징조들이 나타나고 메시지가 들려오는데도 사람들은 눈을 감고, 귀 기울이지 않으며 거짓 선지자들은 듣기 좋은 말로 사람들을 유혹하며 희생양을 찾아다니고 있다. 그리고 때가 되면 그 발톱을 드러내고 본색을 드러낼 것이다.
신은 누가 죽였는가? 우리가 죽였다. 우리는 본질을 외면하면서 같은 행위를 반복하며 새로운 우상을 이 땅에 세우고 있다. 그러한 것들이 잠시나마 현실을 견딜 수 있게 만들어줄지 모르지만, 때가 되면 망각과 회피들이 결국에는 본질적인 것을 죽이고 말 것이다.
신은 죽었다, 이와 더불어 신을 모독하는 자들도 죽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팬데믹과 전쟁은 그런 거짓들로부터 눈을 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히려 더 혼란을 겪게 되었고, 돛대 없는 배가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 못하며, 여전히 같은 삶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신을 대신한 고상한 가치와 이상들도 이제는 진부한 이데올로기가 돼버렸다. 이를 빙자하는 자들이 사람들을 여전히 착취하고 있지만, 진실은 지금도 어둠 속에 갇혀 있다. 그러면서도 많은 사람은 자신의 바람대로 살고 있다고 착각하면서, 주어질 듯하면서 주어지지 않을 것들을 차지하기 위하여 서로가 끊임없이 싸우고 있다. 거짓들은 그런 방식으로 우리를 교란하고 분열시켜 왔다.
희망의 키를 놓지 않고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지만, 각자의 입장에만 매여있어 주어진 가능성을 실현하지도 못한 채,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머리 위에는 독수리들이 먹잇감들이 제풀에 지쳐 쓰러지기만을 기다리며 주위를 맴돌고 있다.
우리는 도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배를 지휘해야 할 선장들은 서로 등을 맞대고 앉아 다른 방향을 가리키고 있고, 밤길을 안내해야 할 등대가 배와 함께 어둠 속에서 헤매고 있다.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힘차게 노를 저어가기 위해 사람들을 달구치고 있지만, 방주는 그 자리에 그대로 머물러 있을 뿐이다. 어떤 목적을 위해 열심히 무언가를 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목적도 없이 흘러가는 것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구원은 어디에 있는가? 도대체 무엇을 위해 이 항해에 동참해야 하는가? 그러기 위해 우리는 맹목적으로 복종을 요구받아왔는가?
인간은 스스로 즐기는 법을 너무나 몰랐다. 그것이 원죄인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누군가가 규정해 놓은 틀에 따라 사는 그것이 선에 따라 사는 것이고 그 길에서 벗어나는 것은 악이라고 배웠다. 우리는 그들을 선한 목자라고 불렀고, 스스로 그 명령에 복종하며 그들처럼 되기를 원했다. 하지만 그들은 우리를 착취하고 이용하기만 할 뿐이다. 그러나 팬데믹과 전쟁은 우리에게 진실에 눈을 뜨게 해 주었다. 이제는 누가 선이고 악인지 서로 판가름하기 어려워졌다. 그리고 분명해진 한 가지는 결국, 진실은 하나의 더러운 강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황이 혼란스러우면 혼란할수록 정직하고 더 순수한 소리에 귀를 기울어야만 한다. 그것은 자신의 건강한 육체의 목소리로서 그것은 신성한 대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머리로 딛고 있는 이 대지 위에서 살아가야 할 이유를 스스로 발견해 내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은 본인 외에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신성한 의무이다.
자연은 한 번도 선과 악, 좋음과 나쁨의 구분을 한 적이 없다. 그것은 인간의 편의에 맞게 부른 것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대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는 인간이 무턱대고 달려온 이 길을 병자들이나 죽어가는 자들처럼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을 선이라 부르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는 좋아하는 모든 것들을 먼저 자신에게 명령하도록 해야 한다. 그렇게 우리가 자신에 대해 더 많이 배우면 배울수록 육체와 대지에 합당한 말과 존경을 배우게 될 것이다.
그대들의 의지로 이렇게 말해야 한다. '초인은 대지의 의미'여야 한다고.
게으르게 잠자고 있는 마음을 향해서, 우리는 우레와 하늘의 불꽃으로 말해야 한다. 이제 밑바닥에 있는 모든 비밀을 밝은 그곳으로 끌어내어, 화염으로 그대들 자신을 불살라야만 하고 그렇게 타고 남은 재로부터 그대들은 다시 창조해야 한다.
저 은밀한 자정이 정오가 되는 순간, 삶의 고통과 즐거움, 저주와 축복. 그리고 캄캄한 밤과 대낮의 태양은 하나가 될 것이다. 모든 것은 이렇게 사슬처럼 연결되어 있어서 쾌락을 향해 좋다고 말하는 것은 고통에 대해서도 좋다고 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 되며, 어떤 순간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것은 모든 순간이 다시 오기를 말하는 것이 된다. 모든 것은 함께 영원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우리는 감추고 싶은 그림자까지도 사랑하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운명에 대한 사랑이다.
최우람 작가는 폐차의 전조등으로 UCR 1을, 후미등으로 UCR 2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자동차의 죽은 눈에 빛을 불어넣어 생명력을 표현하고 있는데 하나는 달을, 다른 것은 해를 상징하는 것 같다. 그리고 바퀴를 의미하는 샤크라 램프는 반복적인 움직임 속에서 조화와 균형을 보여주고 있고, <하나>와 <빨강>으로 코로나를 이겨내려 고군분투했던 의료진과 코로나를 짊어진 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로하고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팬데믹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삶을 개인들이 스스로 다시 회복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그런 개인들이 모여 한 방향으로 마음과 뜻을 합쳐야 이 시국을 이겨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는 듯하다.
그대는 먼저 재가 되지 않고 어떻게 다시 되기를 바라겠는가?
임옥상과 최우람, 한 명은 민중 화가이고 흙과 생명을 다룬다면 다른 한 명은 현대미술가이고, 기계를 통해 문명의 허상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소재와 방식은 서로 다를지라도. 삶이라는 근본적인 가치에 대해서는 입장을 같이하고 있다. 요즘 니체의 책을 다시 읽으면서 대지의 의미에 대하여 많은 생각 했었는데, 두 작가를 통해 그 울림들을 강하게 전달받을 수 있었다.
우연히 지하철 2호선을 기다리다가 전시회 광고를 보게 되었고, 단돈 4,000원으로 이렇게 엄청난 경험을 하게 될지 몰랐다. 아직 안 본 사람이 있다면, 이왕이면 2022년이 지나가기 전에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국립현대미술관에 방문할 것을 추천하고. 관람 중에 던져지는 질문들에 대해 한번 고민해 보는 것이 한 해를 마무리하는 데에 있어 의미가 있는 리추얼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매년 다가오는 새해가 특별할 것이 없더라도 각자가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매일매일이 기념일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