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르헤스의 정원

#존재

by 비루투스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
낮게 뜬 달이 머리 위를 비추고,
나뭇가지들은 서로 뒤엉켜 있었다.

양쪽으로 갈라진 길이 나타났고,
우뚝 솟은 녹슨 문 앞에 멈춰 섰다.
쇠창살 너머에 오솔길이 엿보였다.


나는 그 길을 끝없이 걸었다.
노오란 둥근달이 함께 있었다.

아무도 없는 길로 들어섰다.
양쪽으로 갈라진 길이 나왔다.



— 반복되는 선택의 미로 속에서


「보르헤스의 정원」은 길을 걷는 자아의 시선으로 시작된다. 경사가 완만한 내리막길, 낮게 뜬 달, 뒤엉킨 나뭇가지들—이 모든 이미지들은 현실과 환상의 경계에 선 풍경이다. 시인은 이 길을 따라 걷다가, 양쪽으로 갈라진 길과 녹슨 문 앞에 멈춰 선다. 그리고 그 너머로 엿보이는 오솔길. 이 장면은 단순한 장소의 묘사가 아니라, 선택의 순간, 혹은 존재의 문턱을 상징한다.


문은 닫혀 있지만, 오솔길은 보인다. 시적 자아는 그 길을 끝없이 걷는다. “노오란 둥근달이 함께 있었다”는 구절은 이 여정이 혼자가 아님을 암시한다. 달은 감시자이자 동반자이며, 때로는 기억의 상징이다. 이 길은 끝이 없고, 걸어도 걸어도 다시 갈라진 길이 나타난다. “아무도 없는 길로 들어섰다 / 양쪽으로 갈라진 길이 나왔다” — 이 반복은 단순한 순환이 아니라, 보르헤스적 미로의 구조를 떠올리게 한다.


보르헤스는 그의 작품에서 자주 ‘갈림길’, ‘미로’, ‘거울’, ‘무한한 도서관’을 등장시킨다. 그 세계에서는 모든 선택이 또 다른 선택을 낳고, 모든 길은 다시 갈라진다. 시인은 바로 그 세계를 걷고 있다. 시적 자아는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은 또 다른 선택의 문을 연다. 그리고 그 모든 길은 결국 자신을 향해 되돌아온다.

이 시는 독자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길을 걷고 있는가. 그리고 그 길은 정말 처음 걷는 길인가.”


「보르헤스의 정원」은 단순한 시가 아니다. 그것은 철학적 미로이며, 존재의 반복을 탐색하는 사유의 공간이다. 시인은 말없이 길을 걷고, 독자는 그 뒤를 따라가며 자신만의 정원을 마주하게 된다. 그리고 그 정원은, 언제나 갈라진 길을 품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월광 소나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