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른 자들의 연말 의식

기부하고 질러라.

by Rima


작년 새해 시작 즈음 매일 쓸 거라며

호기롭게 장만했던 일기장을

연말이 되고 나니 더 이상 외면할 수가 없었다.

벌레가 끼어 죽어 있을 수도 있는 폐휴지 더미를

건드려보듯이 조심스레 펼쳐보고

마치 전혀 몰랐던 잘못된 사실을 발견이라도 한 사람인 양

탄식하며 놀란 척을 했다.


'이럴 수가!'


... 안 썼으니 텅 비어있는 게 당연한 게 아닌가.

이미 스포 당한 영화의 결말은 뻔한 것이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폐휴지가 될 위기의 내 일기장은

'3년 일기장'이라는 노트로

한 페이지가 3등분이 되어있어서

3년간 매일 3분의 1페이지씩 채우는 방식이다.

다른 연도의 같은 날짜에 내가 뭐 했지

비교해 보는 재미도 느낄 수 있고,

하루에 쓰는 글의 분량도 적어서

이 정도는 할 수 있을 거야라고

게으른 나에게는 적당한 타협 선의 +

꽤나 스마트한 선택이라고 믿었는데.

심플하게 '아니었다.'


텅 빈 페이지의 분량만큼

나의 지난 1년도 텅 빈 것만 같아서 마음이 쓰리다.

애매하게 아예 안 쓴 것은 또 아니기 때문에 버리기도 아깝다.

꼼짝없이 앞으로 2년간

온전히 내 탓으로 낭비된 빈 페이지들을 보며

얼마나 쉽게 자신과의 약속을 저버렸는지

매일 마주해야 하는 찝찝함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이 형벌도 결국 앞으로 매일 일기를 빼먹지 않아야

받을 수 있는(?) 상황이 우습다.


그럼에도 올해도 매일 쓰겠노라 결심한다.

아무도 쓰라고 강요하지도 않았고,

매일 쓴다고 누가 상을 주는 것도 아닌 이 망할 놈의 일기.

무엇에 행복하고, 무엇에 화가 나는지.

어떻게 살고 있는지, 어떻게 살고 싶은지.

조금 더 진지하게 나를 대면하고 싶은 마음에

스스로 내어 준 야심 찬 숙제였다.

시도를 한 이상, 받은 건 아직 형벌뿐이라 포기해 버리긴 억울하다.


연말연초가 되면 여기저기서

작심삼일이란 사자성어가 난무한다.

누군가는 헬스장 회원권을 끊고,

누군가는 벽돌책을 사 지른다.

단순히 외적으로 어필할 몸의 변화나

지적 허영심만으로 하는 결심들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부디 새해 포부를 떠벌리는 인간들에게

얼마나 가겠어라고 대놓고는 비웃지 말자.

아이템의 선정이 다를 뿐,

목표를 정하고 도전하고 성취하는 과정에서 얻어질 자신감과

그 자신감에서 시작되는 작은 변화를 바라는 마음들이 아닐까.

결국 헬스장에 기부를 하게 되고

책은 인테리어 소품이 되는 슬픈 결과를 보게 되더라도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으면 아무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나만큼 게으른 도전자들을 진심으로 응원하며

작은 변화의 시작을 위해 올해도 꿋꿋하게 첫 페이지를 채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