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분, 경주길을 걷다_1

- 24절기와 함께 하는 사찰여행

by 복길댁


메인후보 1.JPG 첨성대



옛사람들이 남긴 저 오랜 탑은 오늘 하루 제 속 가득히 빛을 가두고 삼킨다.

밤이 되면 딱 그만큼의 어둠도 저곳을 찾을 것이다.

살다 보면 하루쯤 그런 날도 있는 것이다.

빛과 어두움이 서로를 마주 보며 하나가 되고, 그렇게 꽉 찬 내가 되는.

우주의 균형이 온 세상에 머무는 시간. ‘춘분’이다.


0으로부터


태양의 황경이 0°가 되는 순간, 지구별의 낮과 밤은 그 길이가 같아진다.

저 높은 하늘 위 황도와 적도가 교차하는 춘분점. 태양이 그 0°의 점에 도착하면 빛은 적도 바로 위로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지구는 일순 어둠과 빛을 반으로 나눠 가지고, 이날을 기점으로 낮은 점점 더 길어지는 것이다. 0으로부터 시작되는 빛의 절기, 바로 춘분(春分)이다.

빛이란 양(陽)의 기운. 무릇 새 생명을 깨우는 계절이 아닌가. 춘분은 24 절기 중 본격적인 생명 활동의 신호탄과 마찬가지인 셈이다.

과거 곡식이 부족한 겨우내 하루 두 끼만 먹었던 것을 세끼로 늘리는 것도 춘분부터. 양반들은 춘분과 함께 한 해의 농사가 시작되었음을 알리고, 한 해의 농사를 책임질 머슴들에게 술과 음식을 푸짐하게 대접했다고. 아무리 콧대높은 양반님네라도 이날만큼은 풍년을 기원하며 아랫사람들의 기세를 북돋아 주었으리라.

농경사회였던 우리 민족에게 낮이 길어지기 시작하는 춘분은 더욱 중요한 절기였다. 그런 이유로 옛사람들은 춘분이 지닌 ‘균형과 조화’의 힘을 이 절기의 지침으로 삼았다. 날이 풀린다 하여 섣불리 논밭을 갈거나 나무를 베지 않는 것. 춘분에 다투면 한 해의 기운이 어긋난다고 하여 사소한 말다툼조차 조심한 것도 이 절기의 풍경이다.

또 송편과 비슷하게 생긴 ‘나이 떡’은 이 시기를 대표하는 세시 음식. 지금은 거의 볼 수 없는 나이 떡은 가족 구성원 각자의 나이 수만큼 숟가락으로 흰쌀을 떠서 떡을 만든다. 이때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이때 아이들은 떡을 크게 빚고, 어른들은 작게 빚어 먹었다는 것.

많은 것은 비워내고, 빈 곳은 채워주며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게 하나의 원이 되는 것. 그 간결하고도 다정한 지혜가 저 동그란 떡 하나에 모두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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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빙고 내부.jpg 경주 월성지구에 남아있는 '석빙고'


춘분의 석빙고


경상북도 경주시 월성지구.

이곳을 찾을 때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고대의 도시로 떠나는 것만 같다. 발 닿고, 눈 닿는 곳마다 이제는 사라진 천년고도의 혼이 일렁이는 도시.

그간 이곳에서 발견된 유물의 수가 많고 많지만, 지금도 구름에 가려진 별처럼 숱한 보물과 이야기가 이곳에 잠들어 있는 것이다.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는 월성지구 북쪽 구역에 머물고 있다. 이 석빙고는 조선 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그 규모와 기술이 현존하는 국내 석빙고 중 최고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지금도 야트막한 문 너머 보이는 빙실은 여전히 견고하고, 서늘한 기운이 가득하다. 그렇다면 먼 옛날 얼음을 보관했던 석빙고와 춘분은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과거 얼음은 보물만큼 귀하디 귀한 존재. 따라서 얼음의 보관과 배급은 나라에서 주관하고, 담당 부서를 두어 엄격히 관리할 만큼 중요한 국가 업무였다.

그리고 겨우내 힘겹게 저장하고, 지켜낸 귀한 얼음을 꺼내는 날이 바로 춘분이었던 것. 과거 고려나 조선에서는 춘분 날 빙실에서 얼음을 꺼낼 때, 북방의 신인 현명 씨에게 그해 자연의 평안을 기원하는 사한제(司寒祭)를 올렸다. 무엇보다 춘분에 얼음을 꺼내는 것은, 음기가 성한 한겨울의 얼음을 양기가 강해지는 절기에 꺼내어 음양의 조화를 도모하는 의미를 지녔다고.

지금도 아득한 하늘의 이치를 먼저 헤아린 옛사람들. 한점 빛도 귀히 여긴 그 마음 안에 저 적도의 태양도 제 이야기를 슬쩍 남겼는지 모를 일이다.



저 멀리 경주 남산과 월성지구 왕릉.JPG 경주 월성지구 왕릉


하늘과 사람 사이에


옛 왕들이 잠든 거대한 반구의 왕릉 사이에 선 단정한 석조물 하나. 바로 천년고도 신라가 남긴 위대한 유산, 첨성대(국보 제31호)다.

오래전 이곳은 경주부 남쪽 월남리, 고대부터 이 땅을 지켜온 숲 계림과 왕릉을 곁에 두었던 신라의 땅. 지금은 그 터만 남아 막연히 옛 고도의 모습을 그려보아야 하는데, 오직 첨성대만이 굳건히 서서 사라진 옛 왕조를 증명한다.

신라 선덕여왕 재위 시기에 축조된 이 석조물은 지금도 그 정확한 쓰임에 대해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삼국유사에도 기록된 그 이름 속에 진실이 있을 것이다.

첨성대(瞻星臺), 별을 바라보는 건물.

유홍준 교수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경주 편에는 ‘경주에 대한 실망의 상징, 첨성대’라는 단락이 있다. 이는 첨성대에 대한 막연하고 무지한 기대가 거대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단순한 형태의 실제와 마주했을 때 곱절의 실망으로 바뀌는 것에 대한 일침일 것이다.

첨성대의 진가는 그 우직한 돌덩이 하나하나에 모두 담겨있다. 첨성대를 이루는 전체 돌의 개수는 총 360여 개. 28개의 석단. 문을 중심으로 위아래에 각 12단씩 쌓아 올려진 모습. 이 모든 숫자는 정확히 1년 365일, 12달과 별자리 28수와 일치한다. 더욱 놀라운 건 일 년에 단 두 번, 오직 춘분과 추분만 태양 빛이 첨성대 바닥까지 가득 차오른다는 것. 반대로 하지와 동지에는 창 아랫부분에서 모두 빛이 사라져 정확히 4계절과 24 절기를 알 수 있다.

이 우직하다 못해 애틋해 보이는 석조 건물이 그 시절 신라인들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신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다는 이 곳 월성지구, 그 가운데 우뚝 선 첨성대와 함께 살아가던 이들에게 밤과 별의 이야기는 그리 먼 것만은 아니었으리라.

지구상 가장 오래된 천문대. 하늘은 사람을 품고, 사람은 하늘의 뜻을 알기 위해 애쓰는 그사이, 첨성대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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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성대는 알고 있다


첨성대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인물, 선덕여왕. 선덕여왕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부정당해야 했던 자신의 입지를 불교 안에서 찾으려 노력했다.

신라는 왕과 부처를 동일시하는 왕즉불(王卽佛)의 시대. 선덕여왕은 신라인이 신성시하는 박혁거세의 후계자이며 동시에 스스로 석가족의 후손임을 공고히 하려 했다. 이런 이유로 지금껏 저 첨성대의 미스터리는 불교적 의미의 다양한 가설로 매번 새로이 구성되곤 하는 것이다.

하늘을 읽어 자연의 변화를 가늠하고, 달과 별을 통해 국운을 점치며, 왕의 권위와 정당성을 입증하는 것. 지금도 불분명한 첨성대의 역할은 어쩌면 그 모든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영화도, 환영 같은 마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져 버린지 오래.

태양과 지구 사이의 거리 1억 5000만 km, 그사이를 헤매는 수천수만의 이야기가 저 탑에 앉았다 사라진다.

어떤 이들은 첨성대가 사바세계와 도리천을 잇는 관문이라 말한다. 죽음을 앞두고 자신을 도리천에 묻어달라 유언한 선덕여왕. 자신의 왕국이 불국토가 되길 염원했던 한 여왕의 꿈은 과연 이루어졌을까. 그것은 영원히 첨성대만 아는 비밀이다.



월성지구 유적지 나무.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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