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세상 읽기 : 3부 4차 산업혁명과 기독교(9)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이 필요하다

by 조작가Join

성전 짓기 : 목사의 염원


목회자의 염원이 있다. 바로 현대판 솔로몬의 성전 짓기다.

많은 교회의 담임 목사들은 시무하는 동안 새 교회를 짓는 것이 하나님에 대한 자신의 책무인 것처럼 생각한다. 그래서 큰 빚을 내서 교회를 신축하거나 증축한다. 기존에 내는 헌금은 그대로 유지하면서 건축헌금 명목으로 교인들을 참여시키는데, 참여하지 않으면 왠지 믿음이 부족하다고 느껴져 참여하게 되고 작정 헌금도 수입 수준에 맞춰 적어 내기보다는 무리한 수준으로 결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정 헌금 시 강조하는 말씀은 교회 건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교인들에게는 헌금 이상으로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이라는 감언이설과 교회 건축에 성공한 목사들을 강사로 초빙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아멘’으로 화답하게 만든다.

아울러 건축 이전에 다양한 이벤트를 진행해서 모든 교인이 참여할 수 있도록 하는데, 길게는 수년 이상을 집요하게 강요한다. 그러다 보니, 참여하지 않는 교인은 자신의 믿음을 의심하기도 하고, 교회에 대한 충성이 부족한 것으로 여기기도 한다. 돈 내고 죄책감을 느끼게 하는 조직이 바로 교회이다.

그리고 만일을 대비해서 사전 확인 사살까지 하는데, 진행 과정에서 많은 불협화음이 있다는 것을 전제하면서 방해 세력은 사탄의 세력이고, 그 세력을 이기고 성전을 건축해야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다고 말한다. 심적인 공포감을 반대자들한테 미리 심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시작한 성전, 아니 교회 건물 건축은 성공보다 실패사례가 많다. 혹 건축에 성공했다고 해도 헌당 예배(새로 지은 교회에 들어가서 드리는 예배를 입당 예배라고 하고, 건축헌금을 모두 모아서 더 이상의 빚이 없을 때 헌당 예배라고 한다)를 드리기 전까지는 많은 헌금을 이자로 지출할 수밖에 없다.

구약에서 나오는 솔로몬 성전에 대한 목회자의 갈망은 신약에서 우리 몸에 부여해준 거룩한 성전이라는 칭호를 무색하게 만든다. 왜 교회는 구약은 존중하면서 신약의 말씀은 제대로 해석하지 않는 것일까? 예수가 광장에서 수많은 군중과 예배를 드렸을 때 천막 교회라도 있었는가?


재정이 줄어드는 미래 교회

미래의 교회 재정 상태는 현재보다 좋지 않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교인 수가 줄어서 헌금이 줄 것이고, 혹 청년층이 늘어난다 해도 교회 재정에 긍정적인 기여는 힘들 것인데, 현재처럼 취업난이 계속되는 한 정기적으로 일정 헌금을 낸다는 것은 어렵기 때문이다.

또한, 불투명한 재정 운영으로 인한 불신의 증가로 교회에 맹목적으로 헌금 내는 것을 꺼려할 수도 있다. 과거에는 기복적인 설교(교회에 다니면 잘 먹고, 잘 살 수 있다는 설교)가 통했고, 실제로 현실 속에서도 잘 먹고, 잘살게 된 경우가 적지 않았는데 이는 산업화 과정에서 한국이 물질적으로 성장했고, 교회도 그 혜택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교회의 관점에서는 교회 부흥으로 인한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한국 기독교는 초기부터 권력층이 믿기 시작했기 때문에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컸고, 해방, 그리고 6·25 전쟁 이후 미국의 든든한 울타리 안에서 전도를 목적으로 확성기를 더 크게 틀어댈 수 있었다. 그러나 고도 성장기가 저물고, 저성장 기류에 올라탄 후부터 기복적인 설교를 줄이고 있다(아직도 오산리 기도원과 같은 곳에 가면, 말도 안 되는 기복 설교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믿으면 복 받는다.’에서 ‘오직 믿음’으로 주제를 바꾼다.


종교개혁 당시 ‘오직 믿음’은 기성교회의 부패에 대한 저항적인 의미였는데, 현재 ‘오직 믿음’은 사회적으로 실패한 수많은 교인의 의아함에 대한 교회 변명이다. 취업하지 못해도, 결혼하지 못해도, 성공하지 못해도, 아르바이트만 죽도록 하고 살아도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갈 수 있기에 걱정하지 말라는, 마르크스가 말한 ‘인민의 아편’을 투여하고 있다.


교회 개혁의 주체는 누구인가? : “스킨 인 더 게임((Skin in the Game)”


교회는 개혁이 필요하다. 이 부분은 교회에 다니는 교인, 다니지 않는 국민 할 거 없이 동의하는 부분이다. 단, 전자는 교회 발전을 기대하는 바람이 있고, 후자는 종교가 시대착오적인 과거의 유물이라고 여긴다는 차이가 있다.


교회 개혁의 주체는 당연히 교인들이다. ‘월가의 현자’로 묘사되는 나심 탈레브(Nassim Nicholas Taleb)는 『스킨 인 더 게임』에서 “소수의 법칙”이 현실을 움직이는 힘이라고 주장하지만, 개혁과 혁명은 아이디어를 제공한 소수의 엘리트를 수많은 대중이 지지해야 가능했음을 역사가 보여준다. 즉, 대다수 교인이 개혁을 간절히 원할 때 가능하다.


그런 현실적으로 교회의 모든 교인이 개혁을 바라면서 한마음 한뜻이 된다는 건 불가능하게 보인다. 세대 차이, 가치관의 차이, 성별의 차이 등 각기 다른 생각을 가져야 할 이유가 많다. 그래서 조금 쉽게 주체들을 구분하자면 목회자, 장로를 포함한 장년층, 그리고 청년층으로 나눌 수 있다.


목회자가 개혁할 수 있을까?


목회자로부터 개혁이 시작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한국 교회의 목회자들은 스스로를 '절대 선'이라고 생각한다. 성 문제가 발생하면, 다윗을 언급하고 돈 문제가 생기면 교회를 위한 것이라고 둘러댄다. 큰 교회일수록 목회자의 권한이 크고 쥐고 있는 거대한 권력을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권력의 핵심 인물이 스스로 현 시스템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 성경에서도 예수의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낀 권력자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마음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다.


장년층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교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실질적인 사역을 담당하는 직분 자들이다. 개혁의 주체가 되면 실행으로 옮길 수 있는 교인들이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적으로 한 창 바쁘고, 가정에서도 맡은 일이 적지 않다. 1주일에 단 하루 교회 나가서 봉사하는 것도 어려운 데, 개혁의 주체로 섬겨달라고 한다면? “에이 저는 바빠서요.” 혹은 “저는 개혁에는 관심이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청년들은 개혁의 주체인가?


굳이 개혁을 말하자면 청년층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있는데, 청년들은 교회에서 발언할 수 있는 자격이 없다. 청년들이 교회에다 말할 기회를 제도적으로 막았기 때문이다.

교회의 중요한 회의(공동의회, 재직 회의 등)에 참석할 수 있는 교인은 집사 직분 이상인데, 집사 직책은 일반적으로 결혼한 남녀 교인에게 부여한다. 결론적으로 청년들은 공식적인 회의에 참여할 수 없다. 있다고 하더라도 스스로 피한다.

밖에서는 혁신, 개혁, 진보를 운운하는 청년들도 교회 내에서는 참여를 위한 저항을 포기하고, 그런 권리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장년층과 비교해서 인원도 적고 사회적 성취나 지위도 한 참 부족한 상황이기에 청년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해 봤자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로 생각한다.

다음은 관성인데, 어릴 때부터 순종에 대한 가르침을 줄곧 받았기에 저항에 대한 거부감이 있다. 또한, 교회는 위로하고 사랑을 전하는 곳이지 갈등을 일으키는 곳이 아니라는 교육을 꾸준히 받았기에 착한 아이 콤플렉스에 빠져있다.


그렇다면, 누가 개혁의 주체가 될 수 있을까? 현 상태를 고려하면 말 만 있을 뿐이다. 진보를 자처하는 교계 단체도 외부자로서 변화와 개혁을 말하고 비판할 뿐이지 실질적인 방법을 제시하지 못한다. 예수는 말씀뿐만 아니라 행동도 개혁적이었는데, 현재 한국 교계는 웅성거림만 가득하다. 지금 이 시점에 필요한 건 “스킨 인 더 게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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