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시어
후무사를 아시나요?
여름에는 먹을 과일이 많아 행복하다던 엄마, 하지만 나는 초여름부터 기다리는 게 딱 두 가지다. 딱딱 복숭아와 찰옥수수. 매일매일 먹어도 매일이 맛있는 게 있다면 이 두 가지가 아닐까? 쫄깃, 상큼, 달콤
그러다가 후무사를 알게 되었다. 쬐끄메서 먹기만 귀찮은 먹을 것 없는 자두, 살구는 쳐다도 안 봤는데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가 왕만한 자두를 한 손 가득히 들고 계셨다.
"그게 머야?"
"후무사."
"그게 먼데.. "
"넌 몰라도 돼, 엄마 이거 없어서 못 먹어 호호"
날 놀리시니 청개구리처럼 또 바로 베어 물었다. 그렇게 어른의 자두, 후무사를 알게 됐다. 빨간 자두처럼 단 물이 줄줄 흐르지 않아도, 딱복처럼 상큼 달콤하지 않아도 단단하고 아작한 노란 과육의 맛. 매실장아찌처럼 씹는 단 맛이 있다. 지금은 여름이 되어 시장에 가면 후무사가 나왔는지 가끔 둘러본다. 이건 사놓고 나만 먹는 내 전용과일이다. 식탁 위에 내내 둬도 아이들도 신랑도 안 먹고 다 내 차지다.
안녕, 자두야
어느 날, 붉은색 겨우 나는 초록빛 후무사를 먹고 있으니 4살 작은 딸이 앞에서 알짱알짱한다.
"이거 모야?"
"후무사"
"응?"
"후무사~"
역시나 관심도 없더니, 따라나선 시장 과일가게에서 이것저것 먹고 싶다고 골라, 꼬부랑 오이 한 소쿠리, 찐 옥수수 3개, 빨간 자두 한 소쿠리를 샀다.
흠, 먹을 것 없는 자두라니. 그래도 4살 아이에겐 먹을 살이 많을 테니 잘 먹겠지 싶어 3~4알 씻어줬다.
아, 시어!!! 안 먹어!
단 맛이 돌면
하필 덜 익은 자두를 골랐는지 작은 이빨 자국만 조르륵 내놓고는 쳐다도 안 본다. 잘 익어 맛나 보이는 것만 골랐는데 단 맛이 하나도 없다. 나 역시 먹을 맘은 나지 않아 좀 더 익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바구니에 담아 식탁 위에 두고 하루 이틀 사흘 나흘 하나씩 하나씩 먹어보다가 어느새 확 단 맛이 돌았다.
때가 되었다.
집밥, 집술
집에서 가장 큰 냄비에 찬 물을 담고 찬장 안 쪽에 넣어 둔 커다란 저장 유리병을 꺼내서 냄비에 거꾸로 세운다. 차가운 물부터 미지근한 물, 따뜻함을 지나 보그르르 기포가 생겨 김이 나기 시작하면 들썩들썩 유리병이 흔들거리며 깊은 안쪽까지 수증기가 맺힌다. 방울방울 맺히던 물방울이 세워진 바닥까지 가득 차면 밖으로 조심조심 잘 꺼내서 식탁 위에 보송한 거즈 행주를 깔고 그 위에 가만히 세워둔다. 시원한 바람으로 잘 마를 때까지 할 일을 하며 기다린다.
단 맛 도는 달달한 빨간 자두를 뽀도독 소리가 날 때까지 깨끗이 물에 씻어, 채반에 하나씩 잘 담아 물이 빠지게 둔다. 옷을 갈아입고 집 앞의 슈퍼에 가서 담금주 30도짜리 1.8리터짜리 한 통, 백설탕 한 자루 사들고 돌아오니 자두한 개가 꺼내져 있다. 딸이 먹을까 말까 고민을 한 흔적일까?
흐물거리는 자두 두 개는 오물오물 입에서 씨를 발라서 먹고 남은 단단한 자두 열 알을 세어 넣었다.
단 맛이 생겼으니 설탕을 넣을까 말까 고민 잠시 하다가, 두어 숟갈만 뿌렸다. 더 달아져라. 달아져라. 술 속에서 익고 더 익어 달달한 자두주가 되어라. 기왕 먹을 거 쓴 술 말고 단 술이 마시고 싶다.
대학교 때 이후로 아주 가끔 술자리에서나 받아 마신 소주 한 잔을 떠올리면 같이 먹었던 맛있는 안주가 먼저 생각난다. 소주의 맛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컥 하고 쓴 맛, 그 뒤에 따라오는 짧은 단 내.
점점 내려가는 소주 도수인데 30도짜리 참이슬을 보고 있자니 웃음이 난다.
(술꾼의 집 같은데?)
막 술을 따라 부으려고 하니 신랑이 눈이 동그라져서 다가온다. 집에서 소주향이 풀풀 났는지 기겁을 하고 가만히 지켜보다가 소주통을 보고 날 다시 쳐다봤다.
"1.8리터? 이걸 다 먹게??? 에?" 30도??"
"이건 단 술이야. 달달한 술."
"술이 달다고? 어이쿠... 내 부인이 주정뱅이였다니"
유일하게 마시는 건 논알코올 맥주 500ml 한 캔인데 30배는 더 큰 통의 소주를 콸콸 붓더니 단 술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나 보다.
가득히 맑은술을 붓고 가만히 자두를 봤다. 술에 잠긴 자두들. 빨간 껍질에서 노란 살에서 속 안의 씨에서 온몸 가득을 술에 담긴 채 단 맛을 만들어 섞일 것이다.
7월의 뜨거움을 받고 자란 자두를 술에 넣어 10월의 서늘한 바람을 맞히고 1월의 찬 기운 사이에서 다시 따뜻해진 4월의 봄바람을 품고 6월 7월 점점 더워지는 여름의 절정이 되었을 때.
하루 종일 땀 흘린 채 일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미지근한 물로 몸을 개운히 씻어낸 후 냉동실에 미리 얼려둔 얼음을 작은 유리잔에 한가득 담고, 한 해 묵힌 단 맛의 술병을 꺼내 유리잔 반을 채워 따른다. 손으로 빙글빙글 얼음과 섞고 아이들이랑 오늘 하루는 어땠고 저랬고 이야기 나누다 보면 얼음이 그새 녹아 골칵골칵 목으로 술술 넘어가는 도수로 내려가 있다.
고된 하루 그래도 끝났다 싶을 때 안도하며 달달한 자두주 한 모금 꿀꺽하고 마시면 절로 혼잣말이 샌다.
"아 달다"
아직 찬장 구석 술병 안에 술이 한가득 남아있어도 또 집에서 마실 여름향 가득한 집술을 담근다. 이건 2년 뒤에 꺼내 마셔야지. 다음은 5년 뒤에.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마음이 어려운 일, 몸이 힘든 일이 많아진다. 생각도 깊어진다. 그래도 잘 끝났다. 한 마디 내뱉고 다시 잊고 넘어가기 위해서인지 단 술을 자꾸 빚는다.
"아 달다, 오늘도.
하루의 마지막을 달게 끝내자."
그늘 속 가장 깊은 찬장구석에서 열심히 한껏 달아져서 내가 지치더라도 무사히 집으로 돌아와 가족에게 안기고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그러고 나서 혼자 마지막 부엌정리를 마치고 나서, 문득 힘겨울 때, 그리고 조용히 오늘을 안도하고 싶을 때 조르륵 따라 시원하게 한 잔 할 자두주.
자두고명, 냉면맛집
자두주를 찬장 속에 넣고 나니 허기가 찾아왔다. 아직 남은 자두 몇 알이 눈에 보였다. 왠지 요리대장인 엄마솜씨라면 내 상상 속의 자두장아찌라던가 자두절임 같은 걸 순식간에 휘리릭 만들었을 것 같은데..
생각은 생각이고 나는 당장 시원한 냉면이 먹고 싶어졌다. 냉면사리 끓일 물부터 올리고 땅땅하게 붙어있는 냉면사리를 꾸우욱 꾸우욱 눌러가며 뭉친 면발을 갈라놓고 아이들 간식으로 삶아둔 계란도 한 알 꺼냈다.
우리 집 냉동곳간 안에는 늘 동치미 냉면육수가 얼려져 있다. 친정엄마가 주신 물김치 국물에 꽝꽝 언 냉면육수를 넣고 간장 조르륵, 액젓 조르륵, 설탕 한 스푼, 겨자 조금을 넣고 저어서 시원한 밑국물을 만들고 김치냉장고에 가서 여름이 될 때마다 시어머니가 담가주시는 열무김치 한 통 꺼내 밑국물에 듬뿍 넣어 매콤하면서 개운한 국물을 만든다.
물이 보글보글 금세 끓어 풀어헤쳐둔 사리를 넣고 휘이휘이 40초만 끓인 후 미리 받아 둔 차가운 물에 냄비채 쏟아붓고 물을 틀어 계속 면발을 비벼빤다. 미끄덩거리는 면발의 물기를 촥촥 손으로 밀어 빼내고 그릇에 담은 후 설탕 반 스푼, 간장 반 스푼을 먼저 넣고 조물조물 밑간을 한 뒤에 고소한 참기름과 깨를 듬뿍 넣어 다시 면을 무친다. 그대로 먹어도 맛있는 간장참기름냉면 위로 차가운 밑국물과 열무김치를 담고 그 위로 계란을 잘라 올린다. 노란 계란 옆으로 자두를 큼직하게 썰어서 고명으로 올리니 보기도 이쁘다.
달짝하고 쫄깃한 면발에 시원하고 매콤한 열무김치와 계란노른자의 고소하고 부드러운 맛이 만나서 입 안 가득 맛이 섞일 때 자두 하나를 집어먹으니 세상 상큼하고 국물에 적셔먹으니 칼칼함 속 단 맛이 넘친다.
일 년 뒤 마실 술을 담느라 며칠을 기다리며 오늘 일을 마친 내게 주는 냉면 한 그릇과 시원한 맥주 한 잔.
고생했다.
조용한 작가생활
따뜻한 봄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