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더 웨일>에서의 '진심'에 대해
진심은 어떠한 형태로든 보여져야 한다. 그것이 진주 같은 결말을 만든다.
누군가는 찰리에게 역겹다고 말하고, 찰리 스스로도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다. 친구의 부탁과 만류에도 병원 치료를 거부하고 집에 머무는 것도, 떠나온 아내에게 이렇다 할 관심을 더 표현하지 못하고, 딸에게 양육비 이상의 돈을 보내는 것 외에 무언갈 더 하지 못했던 것도, 자신을 걱정하고 다가오려던 피자배달부에게 얼굴 한 번 보이지 않고, 자꾸만 찾아오는 선교자에게 향할 법한 분노를 자신에게 돌리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비어버린 마음 한편의 공허함을 폭식으로 채우며 누군갈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욕보인다. 그 행위가 그 무엇도 고치지 못하고, 용서도 구하지 못하며, 자신과 자신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궁극적으로 피해만 남길뿐인 행동임을 누구보다 잘 알 텐데도 말이다. 그 사실을 앎과 동시에 더 큰 충동이 찾아오는 걸, 그는 잃어버린 많은 것들이 흘러나와 눈앞이 뿌옇게 흐려져 피하거나 막질 못한다.
마지막 즈음엔 그의 주변 사람들이 전부 한 번씩 찾아오게 된다. 찾아온 이들은 모두 찰리에게 고통스러울 진실 혹은 진심을 토한다.
그러나 그 모든 사건들의 공통점은 솔직함을 마주한다는 것에 있다. 아내는 자신과 딸을 버리고 떠나버린 그를 원망한 동시에, 그의 긍정이 그리워 보였다. 비관적이고 불안한 자신의 삶에서도 찰리는 긍정적인 면을 찾고 지지해 주었기 때문이었을 거다. 그것만으론 용서가 되지 못하겠지만. 마지막까지 찰리를 원망하며 욕하던 딸이 그토록 바라왔던 건 누군가의 인정이었을 것이다. 그걸 찰리는 줄 수 있었다. 줄 수 있는 상황이 너무 많이 늦어버려서 그게 더욱 원망스러울 테지만 말이다. 옛날에 읽었던 모비 딕에 대한 에세이에 적었던 것처럼, 딸은 그 고래의 생 자체도, 그 고래를 향한 끊임없던 분노도 불쌍했다.
그녀는 그가 그 육중한 몸을 이끌고 자신에게 걸어와주기를, 모질게 내뱉는 욕설과 말에 뒤엉킨 진심을 가득 담아 바랬다. 찰리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모습을 보면서도 딸은 에세이와 낙제 얘기를 꺼내며 찰리를 욕했다. 자기 자신도 그러려고 온 게 아니었을 테다. 자신의 아빠가 곧 죽을 거란 것 또한, 너무나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뒤엉킨 진심에 자리 잡았던 아빠의 빈자리에 대한 갈망이, 곧 죽어버릴 것 같은 모습을 보며 더더욱 슬픈 분노로 표현됐을 것이다. 죽어가는 찰리를 두고 나가려던 그녀가 문을 열었을 때 '아빠, 제발.'이라고 말한다. 단 한 번도 찰리를 아빠라고 부르지 않던 그녀가 내뱉은 아빠라는 단어에서 그녀의 순수한 진심이 나타났다. 그 누구보다 아빠가 나아지길, 그래서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길 바랐을 그녀의 모습을 보며 찰리는 그녀가 원했던 모습을 보여준다. 자신에겐 그럴 힘이, 그녀가 원한다면 언제든 존재했다고 보여주려는 듯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딸 앞에 선다.
그렇게 영화는 끝이 난다. 맑은 어떤 날의 해변에 모여있는 가족의 모습을 다시 비춰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