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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26회 덕항산 종주(건의령-댓재)

06년 8월 12 - 13일

8/12    22:00      신도림         출발 

8/13    03:40    상사미교 도착

          04:00      건의령(861)  출발

                        -902 안부

          04:25      푯대봉(1009)

                       -961-1016-997-1017-1055

          06:45      구부시령

                       -1007

          07:10      덕항산(1070)                               8km

          07:20-08:20  덕항산 내림길 안부

                           (고 조홍수 대장 추모 노제 및 식사) 

          08:55      지각산(1080, 환선봉)

          09:35      자암재

                       -1036봉(설패, 촛대바위)

          10:00      귀네미골(광동댐 이주단지)            5.5km   

          10:20      1058봉

          10:45      큰재

                      -1062봉-1059봉-1015봉

          12:15      황장산(실측 978,1059)                     4.7km

          12:30      댓재(817)                                     1.5km         

                                         8시간 30분         19.7km


산떡쑥-큰재 내림길 임도에서

 8월 12일_토_22:00

 3주 만에 나서는 대간 길이라 꽤 설레이기도 하고, 준비물 챙기기가 벌써 더디다. 뭔가를 빼먹은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이번 구간은 고 조홍수대장의 추모산행이라 산중 노제를 갖추기 위해 몇 가지 제수를 챙기고 나니 배낭에 도시락 들어갈 자리가 자리가 없다. 그냥 떡으로 때우지.. 그님의 恨스런 이 세상 마감을 조금이라도 도와줄 수 있길 바라며, 위패로 대용할 신위를 인쇄한 종이 위에 온갖 감상이 스며든다. 참 조용하지만 이 세상의 고뇌들을 잊으려는 듯 온 산등성이를 헤매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를 않은 채 가신 분이라 마지막 소백산에서의 정이 그립고 그 님이 바라던 산중 여행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어 더욱 안타깝다. 진도 넋건지기 굿소리를 인터넷에서 들어보며, 남도 갯가 민중들의 애환을 느낀다. 

 입추 말복이 지났다지만 늦게 찾아온 복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주말 오후에 연휴다운 느낌을 접은 채, 대간 길 준비에만 몰두하는 나를 바라보는 물푸레의 눈길은 그냥 달관한 듯 체념의 헛웃음으로 막힌 기를 잘도 뚫는다. 내일모레 광복절 연휴에는 예비역 배병장이 모처럼 친구들과 소백산 무박산행을 계획하니 온통 정신이 없을 지경인 게다. 아무튼 군 제대 이후에 뭔가 조금씩 달라져 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그런대로 보람을 느낀다. 얼른 장가가서 귀한 남의 딸이라도 한 명 데려와 주면 더욱 좋겠는데.. 계속 공부를 조금 더 해야겠다는 각오가 왠지 두렵기도 하다만 이번 학기는 등록금을 많이 세이브할 수 있다는 고지서를 내미니 다행으로 여긴다. 무슨 직업을 권해 보지도 않았지만 오직 바라고 싶은 점은 하고 싶은 일 맘대로 즐기면서 소위 배운 자로서의 긍지를 지켜 줄 수 있는 그런 건강한 삶을 위해 노력하길 바란다.   

 신도림 출발지에서 부터 밝은 얼굴들로 모여든 자유인 멤버들의 웃음소리가 복 더위를 날리면서, 양재역을 지나니 한 버스 가득 태운 산행 버스가 결국 좌석 한 개를 남기지 못한다. 조대장님 자리를 남겨두려든 내 나름대로의 계획을 맘 속으로 접는다. 준비한 검은 리본을 패용한 자유인들의 가슴속에는 오늘 먼 곳으로 떠나보내려는 님과의 기억들을 정리하며 조용한 밤을 달린다. 보름 지난 하현달이 오랜만에 맑은 밤하늘을 밝히며 함께 달린다. 제천-영월을 지나 싸리재 터널을 지나려든 길을 바꿔 사북에서 왼쪽 412번 지방도를 올라가다가 오른쪽 대덕산을 돌아 내리니 35번 국도를 만나 상사미 마을 건의령 아래에 쉽게 도착한다.(8/13 03:40)

덕항산 일출

8월 13일_일_04:00

 상사미 마을에서 하차하여 배낭들을 챙긴 후, 공사를 중단한 채 어지러운 비포장 진입로를 10여분 걸어 오르니 건의령 넓은 공터에 다다른다. 천천히 올라오는 후미를 기다려 평소와는 달리 준비 체조는 10여분의 워밍업으로 대체하고 화이팅 없이 조용히 북쪽 들머리에 발을 올려놓는다. 달빛에 희미한 오른쪽 군자당 당나무 숲에서 조대장의 영혼이 함께 올라와 대간행 점호에 마지막을 더한다. 좌우가 짙은 녹음으로 뒤 덮인 채 달빛마저 가려진 어두운 여름밤을 별로 땀 흘리지도 않은 채 천천히 걸으며 902 안부를 올라선 후 잠시 부드러운 오름길을 밟아 잡목 우거진 푯대봉 갈림길을 지난다.  

 내일모레 광복절을 맞는 더운 8월에, 지금 이 새벽처럼 조금이나마 식혀진 맘으로 냉정하고 차분한 걸음을 밟으며, 이 땅의 짧은 민주의 역사를 조명하고 지금 우리가 서서 나아갈 길을 타협하며 최선의 마루금을 찾아내야 할 시점이다. 어설픈 민족감정을 자극한다는 비판도 싫지만, 이 세상을 살아가는 지금의 현실이 결코 세계화니 자유화니 인류애를 앞세울 만큼 그리 보편적인 시각으로 진행되질 않고 있는 마당에, 우선은 이 땅에 발을 딛고 살아왔고 살아가야 할 우리들의 역사 해석은 어떤 의미로 광복절을 맞아야 할 것이며, 민족의 생존을 위한 방편은 과연 어떠해야 할 것인가.. 

 8.15일을 휴일로 쉬면서 보내기엔 너무나 생각해 봐야 될 일이 많을 것이다. 그 시간 어느 곳에 머물고 있더라도, 아니 잠시동안의 국기배례의 순간에라도 일본으로부터의 해방의 기쁨과 현실적인 독립국가 정부수립의 광복이 가져온 뒤로 우리가 극복하지 못한 채 남겨진 이 땅의 대간길 반 구간을 위하여 우리가 해석해야 될 역사와 현실은 분명히 어렵고도 아픈 일이 되겠지만 합의해 나가야 할 것이다. 서로를 적으로 간주하고 승공 적화를 부르짖는 지금까지의 전쟁의 기억들을 가슴에 묻어두며, 자유니 평등이니 하는 진부한 논쟁은 끝을 맺어야 한다. 그렇다고 몰체제적 통일론으로 우선 통일의 지름길을 찾아나가는 우를 범해서도 아니 될 것이나, 좌든 우든 선택하라는 광적인 논리로 편가름을 해서는 평화를 바란다는 허구스러운 정론들은 결국 설 자리가 없다. 이젠 회색 옷을 입을 때이다. 역사는 결코 완전한 객관성을 담보할 수도 없고 결국 역사란 오늘의 시각으로 유리한 해석을 필요로 할 뿐일 것이다.  

1055봉 오름길에서

잠시 오른쪽 급경사를  밟아 내린 후 961 안부를 지나 1016봉으로 올라서는 왼편으로 철망으로 담 쳐진 목장터를 지나며 산 골을 따라 내려 깔리는 안개가 아름답다고 느낀다. 밝아오는 새벽을 자연스레 걷고 싶은 맘으로 헤드랜턴을 조금 일찍 벗어 넣는다.(05:00) 긴 장마 뒤의 왕성한 햇볕을 받아 길게 자란 채 억새진 잡초들이 발 앞을 가리면서, 어둠이 남아 있는 새벽길에 조심스러운 발걸음을 만들어 바쁘지 않은 일정에 점점 진행 속도가 느려진다. 오랜만에 좋은 사진들을 건지려 하나 녹음으로 가려진 마루금에서 조망 좋은 암봉 하나 찾기가 어렵다. 어느새 구부시령으로 넘어가는 마지막 1055봉을 넘어서려니 해가 중천을 향하며 점점 머리 위가 뜨거워 짐을 느끼고 큰 나무 숲이 그리운 잡목지대를 힘겹게 헤쳐 나간다.(06:22) 오름길 숲길을 반갑게 올라서니 이상스런 괴목이 이마 위로 다가선다. 큰 고통의 상처덩이가 뭉쳐진 채 새로운 가지 뻗음이 멋지지만 한 반도의 역사처럼 아프게 느껴진다. 


타쉬겐트 공원길을 벗어나 호텔이 보이는 광장의 분수대 앞에서 그냥 각자의 방으로 헤어져 잠을 청하기엔 뭔가 아쉬운 맘으로  호텔 테라스를 쳐다보며 긴 벤취에 앉는다. 귀퉁이에 앉아서 책을 보던 동양인 여자가 편히 즐기라는 듯 자리를 일어나며 미소 짓는다. 일본인 관광객의 느낌이다. 이곳의 많은 우즈벡인들은 아직도 동양인 관광객들은 주로 일본인으로 착각을 하곤 한다. 아마도 수년 전까지만 해도 한국인의 평범한 관광객 대열이 이곳까지 미치지는 않았으리라..
“혁명이라... 인간의 역사는 늘 바뀌어가고 또 발전해 가야 되겠지..  그러나, 사회발전과 민중들의 삶의 향상을 위한 개혁이란 것은, 결코 조직적인 혁명이 아닌 민중들의 자연스런 방법에 의한 혁명이라야 그 정당성과 보편적 가치를 획득할 수 있다고 그분은 늘 강조했었지... “ K노인은 다시금 유림 선생의 회상에 젖는 듯 잠시 등을 돌려 솟아오르는 분수로 눈길을 향한다. 
“인간이 자유로운 존재냐, 결정지어진 존재냐 하는 만큼, 역사도 어느 한 집단의 주관적인 해석에 따르거나 혹은 목적을 위한 수단의 신성화 등으로 그 객관성을 상실할 때, 우리는 역사의 진행이 때로는 선의 가치를 버리기도 하고 인류문화의 발전에 역행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았음을 볼 수 있지.. 물론 비합리적인 이성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때로는 허무주의에 빠져 들거나 종교에 의지할 수도 있겠지만... “
5.16 군사혁명을 설명하는 K노인의 역사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고한 시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다, 긍정적인 5.16 혁명이라 칭하든, 부정적인 쿠데타라 칭하든 뭔가 잘 못 지칭되는 점은 마찬가지다. 단지 군대 계급의 낮은 집단이 상위 계급을 배제하고 달성한 혁명이라 하여 쿠데타라고 일컬을 수 있을까.. 피지배자 집단에 의해서 지배자의 의도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혁명이라야 좋든 싫든 쿠데타의 정의에 맞을진대, 5.16 혁명은 결코 피지배 계층의 사회혁명과는 거리가 멀다. 단지 오늘날 시각에서 보아 매우 진부한 논의에 불과할지 모르나, 20세기 후반으로 나아가는 그 시점에서 정치적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것이 경제적 평등을 내포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고, 궁핍으로 부터의 자유를 중요시하게 되었음은 좌익의 전유물처럼 내세울 가치만은 아니었기에 혁명공약의 일부로서 일단 성공을 맛보게 된 것이다. 
“단지 역사적 격변일 뿐이지... 어떤 집단에서 어떤 다른 집단으로 권력의 이동일뿐이지. 아쉬운 것은 1년 남짓 지난 4.19 혁명의 민중과 어린 학생들의 피 흘린 대가로 싹을 틔우던 새로운 민주주의의 완성과 민주적 권력집단의 창출을 맛보지도 못한 채, 좋든 싫든 미국 정부의 영향 아래서 민중들의 배고픔을 해결하지도 못한 채, 일제 비민족적인 행정가들의 신. 구 양파 집단에 의한 추한 권력 투쟁의 의사당 속으로 또 다른 비민주적 권력 집단의 침투에 불과한 것이지... 훗날 경제적 성과와 정치적 자유의 후퇴는 오늘날의 시각일 뿐.., “
구부시령에서


모처럼 20여분 꽤 긴 오름으로 고도를 높여 1055봉을 넘어선 후 구부시령으로의 내림길은 짧은 급경사 다음에 매우 평탄한 잡초들로 이루어져 제법 따가워 오는 햇살을 느낀다. 서둘러 관목 숲으로 몸을 숨겨 언덕 같은 안부에 올라서니 외나무골 예수원 갈림길을 만나는 구부시령에 닿아 물 한 모금을 마신다.(06:45) 노제를 위한 간단한 음식들이 제법 어깨를 무겁게 하지만 제물들을 왠지 바닥에 내려놓고 싶질 않아 선채로 잠시 휴식을 취한다. 아홉 지아비를 차례로 섬겨야 했던 긴 동쪽 대기리 주막집 여인은 어느새 사라지고, 그 숫자와는 상관없이 이 땅 어두웠던 세대 그늘진 곳에서 恨 많은 삶을 살다 간 예쁜 女人을 생각하며 한 점씩 돌을 쌓으며 이 길을 쉬어 가던  로맨티스트 방랑객의 낭만이 돋아 나온다. 그는 아홉 중에도 속하지 못했으리라.. 바로 옆에 떨어진 돌 한 점 들어 맨 위에 놓아 본다. 

 해가 더 뜨겁기 전에 덕항산 정상에 닿아 노제를 올릴 요량으로 바삐 걸음을 걸어 1007봉 안부에 올라선 후 새목이 넓은 공터를 건너 서니 그리 가파르지 않은 마루금을 이루며 덕항산(덕매기산) 정상에 햇살만 가득하다.(07:10) 대간 답사객들을 제하고는 그리 많은 산행객들이 다니질 않는 탓에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도 흔한 정상 표지석 하나 없이 산불 감시탑만 버려진 채 덩그라니 서 있어 왠지 섭섭하다. 잡목 가득한 정상에서 잠시 머문 뒤 바로 아래쪽 그늘진 공터 안부로 내려서서 제를 올릴 상을 차린다. 진도 씻김이 굿 녹음 소리가 조용한 아침 산길에 울려 퍼진다. 향을 피우진 못하지만 잔잔한 바람에 묻어나는 솔내음이 그윽하다. 

 인간의 삶은 어느 누구의 것일지라도 하찮은 것이 아니다. 그 생명의 길고 짧음도 물론이려니와 그 삶 속에 누려야 될 행복은 어느 누구에게서도 방해를 받아서는 아니 될 것이다. 그것이 自由라는 것이다. 그리고 남의 자유를 침범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오늘 안타깝게도 망육의 일 년을 다 채우지 못한 채 우리 곁을 떠나는 조대장의 안타까운 삶에 부디 남겨진 恨을 다 거두어 지길 바라는 심정으로 마지막 그의 자유로움을 지켜보았던 동료들, 또 함께 행복을 나누었던 발걸음들이 부디 이승의 행복마저도 누리길 원하면서 웃으면서 그를 보내고자 행사를 치른다.. 가장 친했던 동료의 추모사에 섞여 나오는 눈물방울들이야 어찌할 수 없겠지만... 

환선봉에서 조망한 북쪽 대간길..


8월 13일_일_08:20

 한 시간여의 노제와 아침식사를 끝내고 가벼워진 배낭을 둘러메고 안부를 내려서니 왼쪽 예수원과 오른쪽 골말 갈림길 쉼터에서 같은 구간을 걷고 있는 牛步팀을 만난다. 牛步라.. 참 오늘날에 많은 생각을 담은 말이다. 좌든 우든 돌아보지 않고 묵묵히 대간 길 걸어가듯 살아갈 수만 있다면... 환선봉 오름 길이 심심치 않게 제법 땀과 거친 숨을 만들어 낸다. 많이 힘들지 않으면서도 참 아기자기한 능선길이다. 단지 가끔씩 끊어지는 숲길에서 헤쳐나가는 긴 풀섶이 팔뚝에 붉은 줄을 내고, 햇볕에 머리가 따가운 게 흠이다. 오른쪽 깎아지른 환선굴 계곡을 녹음방초로 인하여 시원스레 조망할 수 없음도 여름철 대간 길의 흠이라면 흠이다. 

 하사미 마을로 이어지는 폐쇄된 헬기장 안부를 지나 그늘 진 봉우리가 그런대로 시원하게 느껴지는 지각산 정상 환선봉에 다다라 잠시 휴식을 취한다. (08;50) 노제에서 음복한 술기운이 갈증을 느껴 남은 물병을 제법 많이 비운다. 그동안 7월 장마철에 별로 갈증을 느끼지 않다가 이 여름 처음으로 마실 물이 좀 모자랄 것 같다. 멀리 북쪽으로 트인 조망으로 다음 구간의 두타 청옥이 다가온다. 동쪽 대이리 환설굴 마을로 이어지는 하얀 도로가 발아래서 깊게 대간길 골짜기로 찔러 들어온다. 30년 전 배이병은 대기병인 주제에 한 달여의 무보직 상태에서 운 좋게 구경했던 무릉계곡, 환선굴 오름길이 그립다. 그 당시엔 초입부터 진흙길을 밟으며 올라갔었지만, 이제는 수많은 차량들이 붐비겠지... 

 왼쪽으로 크게 돌아 내리는 자암재 내림길이 꽤 경사가 급하지만 그리 길지 않은 탓에 잠깐 동안의 긴장으로 환선굴로 이어지는 골말 갈림길 자암재에 내려선다.(09:35) 맞은편 대간 오름길은 풀섶에 가려진 채 오른쪽환선굴로 이어지는 갈림길에만 리본이 무수히 붙어 있어 자칫 초보 산행객이 실수하기 쉽겠다. 잠시 물 한 모금 추긴 후 가운데 풀섶을 디뎌 나가니 정면 대간 숲으로 오름길이 이어진다. 1036봉을 잠시 된오름으로 짧게 올라서서 설패, 또는 촛대바위로 불린다는 암봉을 찾으나 잘 보이질 않는다. 편안한 걸음으로 오른쪽으로 돌아 내리니 앞이 확 트이는가 싶더니 귀네미골 깨끗한 마을과 함께 거대한 고랭지 배추밭 단지가 대간 능선까지 장식한 채 외로운 대간 꾼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어디선가 한 마리 외로운 까치가 늦은 아침을 차고 오른다. 이 고지에도 까치가?.. 잘 못 들은 것 같다.. 아무튼 喜鳥라는 까치 울음은 상쾌하다.(10:00) 

환선봉 정상에서

끝없이 펼쳐진 배추밭의 규모가 매봉산의 그것보다 더 크게 느껴진다. 이미 선두가 사라진 뙤약볕 아래 배추밭 가장자리를 더듬으며, 잠시 몸을 가려주는 오른쪽 숲을  지나 1058봉 꼭대기를 장식하는 거대한 물탱크를 목표하여 대간 길을 조망하니, 멀리 배추밭 사이로 일구어진 시멘트 도랑 사이로 지친 대간 꾼 몇 명이 하얀 태양 아래 꼬물거리며 여름 낮 개미 오름을 지쳐 나가고 있다. 이것이 대간 산행이란 것일까.. 결코 화려한 명산 순례도 아니다. 단지 이 땅의 영혼들이 살아 숨 쉬며 교통 하는 길을 걷는 것이리라.. 광동댐 밑바닥에 수몰된 영혼들의 꿈을 아쉬워하며.. 단지 그 후손의 삶이 과연 이다지도 높고 척박한 땅이 아니면 안 되었을까.. 오늘 까지도.. 저 평화롭기만 하게 보이는 귀네미골 아름다운 지붕 밑에는 얼마나 큰 희망의 꿈들이 자라나고 있을까.. 

 도시의 빌딩들에 쫓겨난 생명들이 찾아 나선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각진 모습을 느끼며 머지않은 날 이 봉우리들이 숲으로 다시 환원되는 날에 축복의 고사를 지내고 싶다. 배추 밭이랑에 쌓인 각진 돌 더미들이 대간 마루금에 어울리지 않는 억지로 다가와 폐부를 찔러 온다.(10:20) 1058 물탱크 봉우리를 넘어 쑥밭 오른쪽 임도를 따라 큰 재로 내려 밟는 뙤약볕 길에서 갖가지 들꽃들 만이 씁쓸한 나그네의 발길을 잡은 채, 카메라를 꺼내어 기억을 정리하게 만든다. 햇살은 더욱 뜨겁다.(10:45) 

 꽤 큰 공터를 형성하며 잡초로 가득한 큰재에서 숲으로의 탈출을 맛보며 1062봉을 기꺼이 밟아 오른다. 하지만 기대도 잠깐, 이어지는 잡목지대가 숲을 형성하질 못한 채 한 여름의 더위를 쏟아부으며 지난달 장마를 투덜대던 어쭙잖은 산꾼에게 실컷 햇살을 맛보란 듯이 내려쬔다. 간간이 얽혀지는 엉겅퀴 풀섶이 얼굴마저 할퀼까 겁날 지경이다. 긴 잡목지대를 벗어나 1059봉에 이르러 휴식을 취하고 있는 선두조를 따라잡아 댓재에서 행할 천도재를 위해 쉬지 않고 걸음을 옮긴다.(11:30) 

광동댐 이주단지-귀네미골 배추단지

편안한 평지 같은 마루금을 천천히 밟아 내리며 마지막 대간 길을 함께하는 조대장의 모습을 떠 올려본다. 젊은 시절 사우디에서 힘겹게 밑천을 마련했다던가.. 배운 기술로 직장 생활과 작은 사업도 꿈꿔 봤지만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 일에 자신이 없어 튼튼한 다리로 산 나물 캐는 일이 더 즐거웠다고.. 언젠가 내가 은퇴하여 어디 산촌에 작은 움막 같은 별장(?)한 채 지으면 먹고살아갈 푸성귀는 책임지겠다고.. 농담 삼아 던진 말들에 어쩌면 진한 그리움을 담았는지도... 아니, 그것이 내가 바라는 자유를 위한 기초인지도 모를 일이다. 어느새 마지막 큰 봉우리 1015봉을 언덕처럼 지나고 있다.(11:55) 


1961년 6월 초, 서슬 퍼런 군사혁명시절의 검사 앞에서 본의 아닌 반공의식의 투철함을 보여 주는 숱한 반성문을 제출한 가운데 간첩 은닉죄의 형 집행을 유예받아 아내와 함께 출소를 하게 되었다. 두 달 여만의 귀가라고는 하나, 부부가 함께 머물러야 했던 그곳은 이 땅의 비극을 머리로 느끼며 온통 강요된 사상의 광적인 종교집단을 거치는 기분이었다. 아, 전쟁을 겪은 나라의 비참함은 육신으로 산화한 젊은 영혼들만큼이나, 살아남은 자들의 증오와 복수에 불타오르는 이데올로기 속에서 인간의 영혼이 배제된다는 현실이었다.
죄를 범했다는 의식도 없이 반성을 해야 하고, 검사라는 권력기관의 거침없는 욕설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민주국가의 가여운 주인들, 갇힌 창살 속에서 정리되지 않는 삶의 논리를 접어 둔 채 하루하루를 망각하며 편해지고자 자연스럽게 어린 교도관에게 부끄럼 없이 아양을 바치던 그 시간들은 높은 철문을 벗어나는 순간에 마치 악몽처럼 남의 일이 되어 잊혀지길 바랬다.
다행히 친구들의 도움으로 아이들은 학교에 잘 다니고 있었지만 아이들의 충격은 매우 큰 탓에 말문을 닫게 만들었고, 속 깊은 아이들이라 하지만 출소한 하룻밤 내내 눈물을 감출 수 없었다. 과연 이 아이들에게 어떤 희망과 앞날을 위한 의지를 가르칠 수 있을 것인가...
새로운 직장에 대한 희망도 없어지고 돌아가신 유림 선생을 추모할 겨를도 없이 해체당한 당원들은 뿔뿔이 낙향을 하거나 두문불출하며 모이는 것조차도 꺼려하는 분위기였다.
가끔씩 찾아가던 수유리 유림선생의 묘소에서 제법 파릇한 잔디가 올라오는 것을 위안으로 삼으며, 간간히 들러주는 친구의 금전적인 도움과 아내의 온종일 매달리는 편물가게 수입으로 그런대로 생활은 안정을 찾아가는 듯했지만, 눈에 띌 만큼 갑자기 야위어 가는 아내의 모습이 매우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때로는 고통스런 얼굴로 배를 감싸 쥐는 모습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느낌도 받았으나,  미루다 보니 땀 흘리던 여름이 다 지나가고 있었다.  
댓재에 도착하여

마지막 작은 봉우리 황장산(978)을 지나(12:15) 자동차 소음이 간간이 들리는 댓재 내림길은 꽤 가파른 듯이 10분 남짓 비탈지다가 이내 평탄한 풀숲으로 이어져 댓재 도로와 같은 높이로 날머리에 밀려 나오니 대간 구간 중에서 이렇게 편안한 안착은 유일할 것 같은 느낌이다.(12:30) 

 후미조가 도착하기 전에 개울을 찾아 땀에 절은 옷을 갈아입고 마지막 그 님을 위한 천도 행사를 정성 들여 준비한다. 산중 노제보다는 조금 더 많은 제물을 차리기 위해 준비한 제기들을 씻고 현수막과 제물들을 점검해 본다. 전생에 혹시 작은 잘못이라도 있어 극락왕생치 못하고 이 땅 언저리를 맴도는 오음신으로 남을까 봐.. 비록 부처 같은 깨달음은 없으나 이 땅의 중생들 앞에서 불쌍한 사람 도울 선한 마음들은 가지고 있을 우리 자유인들이라고 믿기에.. 부디 작은 바람들이 모아 올리는 이 정성으로 모든 죄과를 사하고 부디 좋은 곳에서 편한 영생 맞이 하소서...  


2006.8.14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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