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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28회 석병산 종주(백복령-삽당령)

06년 9월 9 - 10일

9/9    22:00         신도림 출발 

9/10   03:15        백복령  출발-자병산(877.2)

                        -표지석-42번 철탑-839봉-44번 철탑-45번 철탑-임도

         04:30        헬기장(군대마을 갈림길) 5분 휴식                                       3.28km   

         05:15        생계령(640) -서대굴-829봉-노송조망처   

                        -922봉-931봉-900봉

         07;10        고병이재(아침식사 07:50 출발)

         08:00         남봉(헬기장)(908)

         08:50        석병산(1055.3) -일월봉, 일월문(10분 휴식)                            8.92km

         09:45        두리봉(1034)

                         -906.2봉-866.4봉-헬기장

         10:55        삽당령(680)                                                                    6.3km 

                          7시간 40분                                18.5km

마타리와 각시취-남봉 헬기장에서

9월 9일_토_22:00 

 전날 白露의 밤을 적시던 비가 그친 주말 저녁, 대간길을 나서는 발걸음에 가을을 재촉하듯 꽤 냉랭한 기분의 대지가  차갑게 느껴진다. 한 주전 몸을 적시던 마지막 여름의 땀이 채 마르기도 전에, 코앞에 다가 온 계절의 바뀜이 가히 속절없는 내 삶의 변화처럼 생동감 마저 가져다준다. 하루 전 잠시 외출한 배소위와 대구 매운탕 한 그릇 비우며 거칠어진 손과, 제대로 씻지도 못한 채 검어진 얼굴을 보니 애비로서 맘이 안쓰럽다. 공사현장 감독으로 바쁜 초임장교 생활을 즐기듯이 꾸려 나간다고는 하지만 요즘 세태와 달리 유난히 바쁘게 살아가는 모습에서 부디 건강을 해치지 않길 바랄 뿐이다. 

 대간 길을 함께 격려해 주며 동행하던 26산케들은 상주 갑장산 경부 합동산행 관계로 계획이 잡혀 있으니 이번 구간엔 혼자서 조용한 산책?을 즐겨야 할 것 같다. 추석기간을 빼고는 매주 연이어지는 진부령을 향한 발걸음에 이상이 없도록 남은 기간에 더욱 건강에 유의해야겠다. 지난주 배탈로 혼이 났던 팔봉산의 후유증은 한 주간의 금주로 다행히 나아진 것 같지만 당분간 조심해야 할 것 같다. 이제 1년 전 지리산 천왕봉을 향해 첫걸음을 내딛던 9월의 대간길을, 대관령까지 넘어선다는 뿌듯함이 왠지 졸업반 아이들의 그것처럼 막상 그 뒷날의 허전함마저 느끼게 하며 뒤돌아 보는 대간 길에서 묘한 기분이 밀려온다. 

 바람 일렁거리는 영동고속도로를 지나 동해안 휴게소를 지나는 산행버스가 세찬 바람에 흔들리며 제대로 속력을 내질 못한다. 마치 한여름 태풍 속을 지나는 듯한 기분이다. 동해시를 거쳐 42번 국도를 힘겹게 구불거려 백복령 좁은 마루에 올라서니 찬 바람이 산꾼들로 하여금 함부로 내려서질 못하게 만든다. 2주 전 한여름의 임계천과는 딴 세상이다. 벌써 가을을 빼먹고 초겨울 날씨로 접어드는가.. 방풍자켓으로 무장하고 긴 손장갑을 낀 채로 서둘러 들머리를 찾는다. 茯笭이 많이 나는 곳인지, 福이 많은 곳인지, 아무튼 좋은 이름처럼 복된 내 땅으로 살아남아 동서 간 좋은 고갯길이 되어 주기를..(希福峴, 百福嶺, 白茯嶺)  

피눈물 흘리며 목 잘린 자병산


9월 10일_일_03:15

 지난 구간 날머리에서 100m 가까이 산봉우리를 깎아먹은 자병산의 처참함을 보았기에 차라리 어둠 속의 들머리에서 외면하고 어쩔 수 없이 우회하는 서쪽 마루금을 찾아 밟으며 서글픔을 감추지 못한 채 잠시 북쪽 능선 자락을 응시한다. 윤칠월 열이레 보름달이 이지러진 얼굴로 하얀 채석장을 비추인다. 세찬 바람은 여전히 낮은 숲 속 길로 따라붙어 오르며 오른쪽 동해 부근 마을의 불빛마저 차가운 바람에 떨리는 깜박거림으로 실려 온다. 발파를 알리는 무서운 표지판을 비켜가며 10분도 채 못가 임도를 거쳐 우회 길 42번 철탑 쪽 소로로 올라선다. 

 인간의 삶이 그 주거를 위한 시멘트 재료를 택한 것은 한 방편으로 욕할 일은 못되겠으나, 이 땅 위에 남겨질 구조물 중에서 쉽게 썩어 땅으로 돌려보낼 수 없는 시멘트의 발명은 분명 인류의 재앙으로 남지나 않을까.. 그나마 시멘트 아파트 한 평을 차지하지도 못한 서민들에겐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 될지언정, 분명히 살고 싶지 않은 회색의 시멘트 아파트에서 살아가는 나 자신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점점 자연 친화적인 목조, 황토 주택으로 다시 돌아가는 날이 있겠지.. 오늘 하필이면 시멘트 재료 파먹기 노다지를 대간 길 봉우리 하나인 자병산으로 허가해 준 1990년대 이후 선진 대한민국 정부당국의 국토 관리에 숨이 막힌다. 무식한 놈들인지, 알면서도 생각하기 싫은 정경유착이라도 있은 것인지.. 

 문득 이십 년 전 분당 신도시 개발 당시 시멘트 파동을 맞아 이 회사의 영업과장으로서 시달리던 젊은 내 동기가 피곤한 몸으로 아내의 무릎을 베고 이 세상을 떠나야 했던 일이 생각난다. 그 장례식을 며칠간 연기하며 가족들의 생계를 위하여 그의 시신을 놓고 벌여야 했던 회사와의 다툼들... 이제 그 어렸던 아이들도 성인이 되어 잘 살아가고 있겠지.. 가뭄에 시달리던 이 땅의 민초들에게 기우제 한 번으로 쉽게 비를 내려 주던 자병산, 붉은 뼝대(벼랑, 절벽)를 이루어 산계팔경으로 불리던 紫屛山이 곳곳에 피우던 꽃나무는 발파 폭약 속에 산화되고, 화려했던 자줏빛은 사라지고 흰 피를 토하며 대간 길 영혼들에게 눈물로 이별을 고하는구나.. 

노송군락의 새벽

9월 10일_일_04:30

 두 개의 철탑(42,43)을 지나고 869봉을 거치니 꽤 깊은 내림길이 이어진다. 마치 대간 길을 벗어나 알바를 하는 기분이다. 어둠 속이지만 미리 숙지한 지도를 참고하니 카르스트(석회암 침식지대) 지형의 함몰지(돌리네)를 거치는 모양이다. 44번 철탑을 지나 소로 갈림길을 거쳐 작은 오름을 거친 후 45번 철탑을 지나 내림길에 내려서니 다시 임도를 만난다. 임도 왼편에서 어둠 속에 나부끼는 리본을 찾아 다시금 소로를 밟아 나가니 작은 봉우리를 거쳐 군대 마을 갈림길 공터에 다다라 잠시 숨을 고른다. 후미에 동료 한 명이 컨디션이 매우 좋질 않아 걱정이다. 더 이상 진행하면 탈출로도 없는 구간인데.. 그렇다고 지나온 길이긴 하지만 밤길 어둠 속을 혼자 되돌아 가게 할 수도 없고.. 난처하다. 10여분 휴식을 취한 후 지리산에서 출발한 저력을 믿고 동료들의 도움으로 천천히 비교적 짧은 구간을 극복해 주기를 빌어 본다. 

 어둠 속에서 동갈산 위에 떠 있는 보름달을 벗 삼아 769봉과 762봉을 쉽게 오르내리지만, 선두와의 거리는 30분 이상이 멀어지고 후미는 계속 뒤처지는 상황이다. 매우 걱정되는 걸음으로 천천히 걷자니, 찬 바람에 땀이 식어가며 한기를 느낀다. 왼쪽 임계 쪽 마을 불빛이 매우 가깝게 따라온다. 잠시 내리막을 밟는가 했더니 왼쪽으로 깊은 함몰지가 나타나고 풀섶만이 가득한 생계령(640, 生溪嶺)에 내려선다. (05:15) 비박 야영을 하던 산꾼 두 사람이 새벽길 대간 행렬의 발걸음에 잠이 깬 듯 텐트를 접으며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 어젯밤엔 꽤 추웠을 텐데... 동쪽 산계리에서 따온 이름인가.. 문헌에 삽현(鈒峴)으로 기록되고 정상엔 주막집도 있었다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삼지창 모양을 찾을 길은 없는데.. 새벽동이 터오는 829봉이 꽤 높아 보인다. 

 서대굴 안내판을 지나 829봉을 가파르게 오르는 동안 동쪽으로 마주하는 능선에서 차츰 밝아 오는 사위를 즐기며 잠시 땀을 흘리며 올라서니 이어지는 능선길에 노송들이 멋진 폼으로 푸른 새벽하늘을 배경 삼아 나그네의 발길을 사로잡는다. 아직은 채 밝지 않은 숲 속에서 이리저리 카메라를 맞추어 보지만 작품이 신통치 않다. 산책하듯 여유롭게 걸어 나가도 아직 후미의 불빛이 따르질 않으니 걱정된다. 부디 큰 탈없이 따라붙어 주기를 바라지만 선두와 오가는 무전 소리를 들어봐서는 뭔가 지점 선정도 잘 못된 것 같고, 후미의 상태가 썩 좋질 않은 것 같다.   

922봉에서의 일출을 기다리며

9월 10일_일_05:50

 노송지대를 지나 왼쪽으로 크게 꺾어 922봉으로 오르는 능선길에서 동해바다 쪽에서 붉게 물들이며 새벽동이 터온다. 정면으로 바라다 보이니 대간길이 서쪽으로 90도 꺾은 모양이다. 잠시 배낭을 벗고 일출을 기다리며 후미의 발길도 함께 기다려 본다. 지도상으로 이젠 큰 오름은 끝이 나고 석병산 아래쯤에서 아침식사를 해야 될 곳 같은데 갑작스러운 추위에 바람을 막아 줄 곳이 쉽질 않겠지.. 약간의 구름 낀 하늘에서 맞이하는 일출은 더욱 화려하다. 단지 여름의 무성한 초목들이 시야를 가려 그 순간을 담기가 쉽질 않은 탓에 조망 좋은 오름길에서 10 여분을 기다리며 서 있자니 식은땀이 차갑게 등을 자극한다. 

 앞뒤가 끊어진 대열에서 모처럼 호젓한 새벽길을 홀로 걸어가는 기분이 꽤 상쾌한 아침이다. 북쪽으로 이어지는 편안한 마루금을 따라 931봉을 지나고 900.2봉까지의 산책길 같은 편한 걸음이 마치 동네 뒷산을 걷는 기분이다. 바람이 잦아들기만 바래 보지만 아직은 만만치 않다. 무성한 잡목 숲과 뒤엉킨 산죽 밭을 지나면서 동해에서 오른쪽 옥계면 산계마을로 이어지는 계곡 길이 또렷하게 보일 즈음 뒤돌아 본 자병산이 북쪽 자락에 처참한 백색 눈물을 자욱지으며 가는 발길을 붙잡는다. 


우즈벡에서의 마지막인 다음날의 일정 때문에, 다소 미흡하긴 하나 60년대 초 제3공화국의 탄생을 눈앞에 둔 약간은 정리되는 듯한 K노인의 인생역정을 들으며 천천히 숙소인 호텔로 들어선 후, 미리 프론트에서 익일 날 바쁘게 일정을 소화한 후 저녁 비행기로 떠나야 할 사정을 의논하고 체크아웃 준비를 부탁해 놓고 돌아선다. 마지막 밤의 아쉬움을 다시금 호텔 로비의 간이 카페에서 커피 한 잔으로 이어가며 시간을 지체한다.
“정치든, 경제든, 사회든.. 모든 것이 결국 인간들이 만들고 저지르고.. 스스로 묶어 나가는 놀음에 불과할지도.. 혁명이라 칭하든 쿠데타이든 간에 그렇게 3 공화국이 잘 탄생되어 가서 몇 년간의 과정을 거쳐 또 바뀌어가고 변해가며 여러모로 발전을 할 수 있기를 진정 바랬지... 참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정치와 이념이란 것이 그렇게 다르게 흘러갈 줄은.. 한 지도자의 인간적인 품성이 검증되질 않은 채, 이 땅의 민초들.. 아직은 민주주의에 익숙하지도 않고 영도자적인 강력한 리더를 어느 정도 바라는 백성들 위에서 홀로 춤추기 시작할 때 그 위험스러운 부담이란... “
정치와 사회의 큰 마당에 발을 디뎌 놓으면서 그 첫 번째 고려되어야 할 명제는, 그 지도 이념에 대한 탐색을 선행해야 하며, 인간가치의 성립에 유익한 일인가 하는 것이다. 과연 혁명 과업의 완수를 위하여 진정한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을 찾는 것이 K노인의 바램이었다. 또한 스스로 느껴왔던 인간의 독립적인 가치를 위하여 비인간화에 반대할 수 있는 그러한 직업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自由란 각자 스스로의 책임과 권리를 누리는 개인생활의 보장을 의미할진대, 독립은 결코 자기중심적인 개인주의가 아니라 스스로의 능력들을 확신하고 그 잠재력을 인정하는 일이다.
“한 지도자가 민족적인 역사의 한(恨)를 잘못 이해하고 개인적인 한(恨)과 불분명하게 인식될 경우, 이 땅의 역사를 한 순간에 다른 길로 빠져들게 하고 그것을 깨달아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면 온갖 모순의 극복과 험한 역정을 거쳐야 되겠지.. 산중에서 길을 잃은 채 멀리 보이는 확실치도 않은 능선을 향해가는 산꾼들 마냥.. 지나온 길이 멀면 멀수록 점점 험한 길을 만들어 나아갈 수밖에... “
가난과 배고픔에 굶주린 戰後 분단국의 백성들을 이끌고 “잘살아 보자”는 단순한 외침은, 그 어떤 형태의 알량하고 차원 높은 이념과 정치적 민주에의 열망들을 잠재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중요정책과 사회적인 의사결정들의 과정이 공적인 정치집단이나 다수의 토론에 의해 참여민주주의의 형태로 발전되기에는 점점 멀어져 갔고, 개인적인 불평이나 열망의 출구는 어느새 막혀가고 있었다. 좌든 우든 먹고살면  된다는 명제는 훗날 상처만 남긴 채 사라져 가는 이념 논쟁의 종말을 가져올 수는 없었다. 
석병산 일월봉 정상에서

9월 10일_일_06:45

 900.2봉 헬기장에 다다라서 모처럼 일행들과 조우한다. 뭔가 헷갈리는 체크 지점을 확인하고 선두를 따라잡기 위해 내림길을 서두른다. 고병이재(골뱅이재, 기뱅이재)까지의 산죽밭길 내림길이 꽤 미끄러워 조심스레 걷지만 결국 젖은 뿌리에 미끄러진 후 등에 진 배낭의 쿠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깨닫는다. 짧은 산행길에서도 꼭 가벼운 옷가지를 넣은 배낭을 습관 들여 하산길에서 뒤로 미끄러질 경우 허리나 등을 보호해 줄 수 있도록 할 일이다. 고병이재 표지 팻말이 있는 안부에서 바람을 피하며 아침식사를 때우려 하나 찬 날씨에 여름 손이 시리다. 후미는 여전히 1시간 여 뒤처진다.(07:10)   

 제법 손이 시릴 정도로 찬 날씨에 대충 빵 한 조각과 우유로 식사를 때우고 후미조를 위한 탈출로를 점검해 보지만 아무래도 석병산을 넘어가는 것이 가장 나을 것 같다. 옥계 쪽 석회 동굴 안내판은 있지만 등산로로 개척되진 않은 것 같고, 등고선 상으로도 너무 가파르고 내려다 보이는 산계리 계곡 길이 만만치 않다. 마지막 도착한 후미대장에게 편한 식사와 편한 걸음으로 삽당령까지 진행할 것을 부탁하고 먼저 출발한 선두조를 따라잡기 위해 석병산 오름길을 서두른다.(08:00) 

 10여분 만에 올라선 908 고지 남봉 헬기장에서 모처럼 밝은 햇살 아래 마지막 여름을 장식하는 샛노란 마타리와 보랏빛 각시취에 야생화의 맑고 화사한 웃음을 맛본다. 저리 가만히 놔두면 잘 자라고 밝은 우리네 인간사일진대.. 뭐가 그리 불안하고 안타까워 그리도 안달하며 볶아대는 세상으로 변했을까.. 결국 스스로 만든 이념들의 틀 속에서 완전치 못한 규범들에 얽매이며, 작은 우물 같은 동굴 속으로 자꾸만 기어들었던 인간의 역사가 아닐까.,. 끝내는 이 땅의 동족들이 피 흘리는 슬픈 날들을 지내고 나서도 아직도 온전히 깨닫지 못한 채 말장난 같은 가설들로 민초들을 괴롭히는 정객들.. 진실을 숨긴 채 투쟁의 승리만을 위한 정치가 언제까지 이어질 것인가.. 

석병산 일월문

석병산 북쪽 오름길은 생각보다 그리 가파르진 않고 키 높은 산죽밭들과 어우러지는 키 큰 잡목 숲들이 번갈아가며 조망을 가린 채 좀처럼 그 봉우리를 내놓질 않는다. 상황지미골 삼거리 표지를 두 번이나 거치고 나서야 두리봉과 일월봉 갈림길에 다다르니 선두조들이 배낭을 벗어 둔 채로 일월봉으로 향한 모양이다.(08:45) 5분 정도 걸어 오른 후 도착한 일월 쌍봉의 둘째 봉에서 석병산 표지석을 기념하고 싶지만 식사시간으로 지체하다 보니 뒤따르는 다른 팀과, 삽당령에서 올라온 산행객 들도 함께 섞이기 시작하니, 세찬 바람이 몰아치는 일월봉 좁은 정상에서 사진 한 장 찍기도 힘겹다. 

 멀리 대관령 풍력 발전기 날개들 마저도 선명히 보이는 석병산의 화려한 암봉들에 감탄하며 조심스레 북쪽 뒷면으로 내려가니 병풍 같은 넓은 바위에 멋진 구멍이 뚫린 채 아찔한 뒷면을 보여주고 있는 일월문을 만난다. 사진을 찍으려다가 위쪽 봉우리에서 굴러 내려온 주먹만 한 돌에 오른쪽 복숭아뼈 위를 맞고 난 후 한동안 말도 못 한 채 멍하다. 다행히 걷는 데는 큰 지장은 없지만 아무래도 통증이 간단치 않다. 부디 오늘 짧은 마지막 내림길이 무사하기를.. 모든 등산객들은 자기의 발길이 굴릴 수 있는 작은 돌들에도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만일 그 돌이 머리에 떨어졌다면.. 

 북쪽 만덕봉 갈림길을 살펴보다가 바람이 불긴 해도 맑은 하늘이 보여주는 강릉 쪽 정경이 가깝다. 만덕봉 지나 칠성산 너머로 강릉 사람들의 수호신으로 섬겨지는 학산마을 굴산사도 있으리니.. 주수천(珠樹川) 아래 강릉 저수지만 아련하다. 좁은 일월봉에서 오래 머무를 수 없을 만큼 바람도 많이 불고 이어지는 등산객들로 붐비는 것이 다소 섭섭했지만 다시 두리봉 갈림길로 돌아서 내려온다.(09:00) 

석병산 북면

두리봉을 향하는 완만한 내림길이 90도 왼쪽으로 꺾으며 작은 고갯길에서 石屛山 북면의 화려한 병풍을 음미한다. 뒤에서 보니 3개의 암봉이다. 높은 2개의 일월봉 외에 아래쪽에 멋진 암봉이 솟아 있는 것이 보인다. 대간길 정비를 하고 있음이 눈에 띄고, 조망처의 잡목들을 가지 쳐가며 산행객들을 위한 노력이 돋보인다. 모처럼 기분 좋은 공권력이다. 국립공원관리공단 측에서는 이러한 지자체의 노력을 보고 배워야 될 일이다. 도대체 그동안  국립공원 입구에 버텨 서서 환경보전을 입으로만 외치면서 입장료 수입은 입구 관리소 건물 짓는데만 퍼붓고, 실제로 대간길을 비롯한 산행로 보호를 위한 과학적인 관리에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냥 귀찮으면 막는 게 고작인 한심한 공단... 

 깔끔한 산죽길을 헤치면서 그나마 눈 쌓인 겨울날의 초록은 이뿐일 것을.. 짙은 녹음 속에서 다소 천대받는 느낌이다. 두리봉 오름길 계단에서 다소 날씨도 풀리고 땀이 배어 새벽부터 내내 걸쳤던 방풍자켓을 벗어며 휴식을 취하니 매우 상쾌하다. 북쪽 계단길을 밟아 두리봉(1034, 斗里峰, 斗圍峰)에 올라서니 키 큰 갈참나무만 무성하고 표지석은 없고 휴식을 위한 벤치와 테이블이 멋지게 마련되어 있다. 넓은 정상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표지판을 배경으로 한 컷 기념을 남긴다. 대구에서 올라온 산악회의 경상도 사투리가 수줍다.(09:45) 


숨 가쁘게 치달아 온 새 공화국의 탄생이 얼마 남지 않은 1963년 11월 말, 날씨가 늦가을 치고는 꽤 차갑게 느껴지며 며칠째 초겨울의 찬바람이 계속 몰아치고 있었다. 대통령선거 하반기부터 불거져 나온 이념 논쟁이 국회의원 선거를 거치면서 점점 사라질 줄을 모르고 고개를 쳐들어, 곧 대통령에 취임해야 할 혁명세력의 커다란 짐으로 불어나고 있었다.  훗날 좌우 이념의 논쟁으로 정권유지에 다소 보탬이 되었다면 이 당시의 아픈 악몽들을 역발상으로 이용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가난한 농부치고는 동학혁명에 연루될 만큼 꽤 의식화된 농부였던 선친과 친형의 아픈 기억 속에서, 체계적인 이념운동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인 자각을 통한 혁명적 기질의 삶을 가꾸며 변환기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이리저리 나름대로 지혜와 용기로 버텨온 결과일까.. 이 땅의 정상에 다다른 그에게도 눈에 보이지 않는 얽매임이 짓누르고 있었으니, 반공을 국시로 내세운 새로운 공화국의 지도자로서 주위와 지나온 길에 묻혀진 용공의 흔적들을 지워야 하는 커다란 부담을 안고 있었다.
그를 가장 아끼고 사랑하던 형님과 절친한 친구이며, 홀로 된 형수님이 소개한 사람을 구할 길이 막막한 최고 권력자.. 그 대상이 북에서 내려왔기에... 그것도 민족의 이름으로 대화를 구하겠다고 그를 믿고 내려온 사람을 간첩으로 서대문형무소에 묶어 놓은 채 선거를 끝냈다. 그러나, 선거가 끝났지만 역시 상황이 달라질 수는 없었다. 전쟁의 상처가 너무나 큰 이 땅의 이념 논쟁에서, 그 누구도 한 발짝 다가설 수 없는 좌향좌를 향한 걸음이기에... K노인은 이러한 처지의 박대통령을 생각하며 몇 해전 자신의 처지를 떠올리며 인간적인 안쓰러움을 느꼈다.
하루하루 달라져가는 아내의 여윈 얼굴과,  식후 밥상정리도 끝내기 전에 뒷 칸으로 달려가 배를 움켜쥐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이 유난히 자주 눈에 띈다. 피곤한 살림살이를 탓하기에는 하루 이틀도 아니고 몇몇 병원을 찾아다니며 진료하고 약을 받아먹고 나면 그도 잠시뿐, 꽤 오래가는 배탈이다. 서대문을 나서는 그 당시부터라고 기억을 떠올리는 K노인은 아내의 기억 속에 자릴 잡고 있을 그 사람의 행방을 알아내어 소식이라도 들려주면 나을까 하고, 혁명의 중심세력들을 만나 자신의 돌이키고 싶지 않은 과거 수사기록을 캐물어 본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인간적인 행적이 권력의 정상에서 벌어지는 혈투의 마당에서 어쭙잖은 빌미로 다가와 점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었다. 그 자신은 무슨 권력을 원했던 것도 아니요, 더구나 스스로 어느 쪽의 다툼 세력들에게도 미움을 사서 해를 입을 리 없다고 생각하는 중간자의 길에 익숙해 있었으니까.. 그러나, 중용이니 좌우의 넘나듦이니 하는 고상한 철학들은 권력을 가진 자만 가능한 것이지, 이 땅의 전쟁을 겪은 황폐한 이념의 백성들에겐 좌우든, 어느 집단이든 반대세력을 등지는 한쪽만 선택해서 살아갈 수 있을 뿐 양쪽을 이해한다거나 회색을 표방하는 일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었다. 힘없는 중간자는 결국 패배자의 무리에 휩쓸릴 뿐이었다.  
삽당령에서

 두리봉에서 삽당령으로의 내림길은 지루하리 만큼 완만하다. 발목만 아프지 않으면 그냥 뛰어내려도 좋을 만큼 경사가 별로 없다. 왼쪽으로 석병산을 안고 돌면서 이름 그대로 크다란 원을 그리며 남으로 돌아 내린다. 몇몇 갈림길이 있어 독도에 주의해야 할 곳도 있으나, 표지기들이 많아 다행이다. 많은 선답자들이 알바를 겪은 탓이리라.. 1시간여의 호젓한 트래킹을 즐긴 후 866.4봉 안부에서 일행들을 만나고 헬기장을 지나니(10:40) 삽당령을 지나는 차소리가 들려온다. 아직은 체력이 좀 남는 것으로 보아 지난 구간의 긴 두타청옥에서 많이 단련된 느낌이다. 바삐 잰걸음으로 삽당령 급경사 내림길에  다다르니 잘 정비되고 있는 계단을 밟아 임도에 내려서고 다시금 이어지는 숲길을 지나 2-3분 만에 삽당령 도로에 내려선다.(11:55) 

 왼쪽 당집이 있어 揷當嶺인가..(揷雲嶺, 木溪嶺) 인심 박하다고 악명 높은 간이주점 할머니의 동동주 맛은 일품이다. 왼쪽 임계 방면에 생태  이동통로가 잘 정비되어 있고 , 백두대간 길 정비계획표를 본 뒤라 기분이 좋다. 생태 이동통로는 2002년 건교부 국장으로 있는 내 동기 남국장이 주도하여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고 있다. 뿌듯하고 만난 지도 꽤 오래된 것 같다. 다음 달쯤엔 볼 수 있을래나..35번 국도를 오가는 차량들 특히 시멘트를 연상시키는 대형트럭들이 과속으로 오가니 매우 조심스럽다. 따뜻한 햇살아래 해바라기 하면서 콩나물국 해장술에 하산주를 즐긴다. 2시간이나 지체된 후미조를 격려할 겸 천천히 계단길을 다시 밟아 오르며 대간 길 1주년 기념의 나 자신이 참 많이도 달라지고 대원들의 도움 속에서 여기까지 온 것에 매우 감사한다. 1년 전 지리산 벽소령 아래 음정 길에서 느끼던  고통들을 떠올리며 눈가에 이슬이 맺힌다.  

삽당령 당집

상주 갑장산에서 경부 합동 산행을 하고 있을 산케들의 전화가 그리운데 아직은 통화가 불통이다. 부디 많은 인원들이 무사히 즐기는 산행을 마치고 선후배들이 어울려 한잔 막걸리로 화합을 나눌 수 있기를.

9/11 배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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