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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 유현 Jul 11. 2023

백두 35회 설악산 종주(3)(한계령-조침령)

06년 11월 18 - 19일


11/18   22:00   신도림  출발

11/19   03:20    한계령 필례약수 진입로

           04:13    여심폭포 정상 

           05:20    1157봉

           06:05   십이담 갈림길 직전 공터(5분 휴식)

           06;20   십이담골 갈림길

           07:00   망대암산 (10분 휴식)                 5.65km

           08:00   점봉산(식사) -08:45 출발            1.4 km 

           09;38   오색삼거리                               2.0 km 

           10:00   961.5봉

           11:00   단목령                                     4.5 km

           12:00   도전봉(1028) 

           12:15   북암령 (15분 휴식)                    3.1 km

           12:50   1136봉

           13:40   양수발전댐-962봉-962봉

           14:00   1018봉-943 전망대

           15:00   900.2봉

           15:20   조침령                                    7.25km

               12시간                                23.9km  


첫눈이 내린 남설악


11월 18일_토_22:00 

 지난주 공룡 타기의 후유증으로 생긴 감기몸살이 주말까지 이어진다. 훈련 중이라 나오질 못하는 배소위를 면회도 할 겸 벽제 부근으로 물푸레와 드라이브 하면서 온천계획을 세워 본다. 한 달 여 만에 만나 점심을 먹고 부근 온천에서 목욕을 하는 중에 배소위는 잠에 곯아떨어진다. 안쓰러운 맘에 깨우질 못하고 혼자서 사우나를 즐기다 보니 감기 기운이 그런대로 약해지고 컨디션이 회복된다. 석양에 붉어지는 자유로를 타고 내려와 점봉산행 배낭을 꾸린다. 오늘은 무게를 최소한으로 줄여 전반 암릉에 대비해야 한다. 

 2주 연속 A급 난이도가 이어진다. 대간 말년에 한계령 수해로 인하여 스케쥴 조정이 엉망이 되다 보니 계속되는 강행군에 몸이 약간 무리를 느끼기도 한다. 부디 오늘 구간 초입 만물상 암릉구간을 잘 넘기를 바라며 신도림으로 향한다. 유난히 결원이 많다. 아마도 지난주 힘들었던 공룡의 후유증 탓인가 보다. 다소 출발이 지연된 산행버스는 오랜만에 야심한 강남대로를 거쳐 익숙한 속초행 44번 국도에 오른다. 내설악 광장 삼거리부터 장수대를 거쳐 한계령에 이르는 44번 국도는 연이은 수해복구공사로 매우 어수선하다. 한계령 휴게소 맞은편에서 시작되는 남설악 들머리는 이미 산사태로 무너져 내려 쓸려 나간 지 오래다.

 휴게소를 지나 필례약수로 가는 갈림길에서 차를 멈추고 1003봉 아래에서 준비를 마친다. 匹女의 한이 서린 銀飛嶺(隱秘嶺) 고개에 내려서서 하늘을 보니 그믐밤의 어둠 속에서 별은 유난히 빛나고 날씨도 쾌청하다. 잔잔한 바람에 실려오는 눈보라 머금은 냉기가 오히려 산행에는 도움이 될 만큼 상큼하다. 부디 적은 인원의 정예들이 무사히 만물상 험봉을 밟아 넘어 점봉산 정상에서 눈부신 설악을 조망할 수 있기를... 힘든 걸음도 이젠 마지막 한 구간을 남기는구나.. 

한계령에서 만물상침봉을 넘어..


11월 19일_일_03:20 

 들머리 입구 철망을 우회하는 마음이 무겁다. 내 땅의 등줄기를 밟아 내리고 오르며 큰 의미를 찾아 고통의 행군을 지속하는 백두대간 탐사객들이 왜 어쩔 수 없는 범법자가 되어야 하는가.. 산로가 험하고 등산객의 안전을 위한다면 더 많은 교육과 안전시설을 유지해야 할 텐데.. 풀 한 포기 없는 암봉에 자연 휴식년을 실시한 지 수년이 지나도록 오히려 로프를 제거하고 길 막음으로 일관하는 국공단 한심파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버텨낼 것인가.. 어쩔 수 없이 구름을 타기 시작한다.

 초입부터 시작되는 된오름 북사면에 쌓인 눈으로 도저히 미끄러워 오를 수가 없다. 아이젠을 착용하며 잠시 지체한다. 지난겨울 장수 영취산에서 시작된 힘든 눈길에서의 사투가 떠오른다. 유난히 중부지방에 집중되었던 강설 덕분에 설산산행은 지겹도록 맛보았다. 어느새 또다시 겨울로 접어드는구나.. 20여분의 비탈진 경사면을 힘겹게 밟아 마루금에 올라선다. 정적에 묻힌 왼쪽 흘림골아래 오색의 불빛만 선명하다. 잠시 편한 산죽밭을 지난 후 계속 이어지는 급경사 끝에서 첫 암릉을 만나고 잔설에 힘겨운 줄잡이를 마치니 앞으로 남은 1157봉까지의 험난한 만물상 침봉 밟기가 두려워 온다.(04:10)

 10여분 편한 걸음으로 다시 왼편 언덕을 넘어서니 1157봉 직전의 흘림골 여심폭포 정상에 다다른다. 왼쪽 마루금엔 "등산로 아님" 표지로 줄을 쳐 막고 있다. 오른쪽 암봉 침니에 누군가 5-6m 긴 나무 등걸을 걸쳐놓아 미끄럽긴 해도 다행스럽게 가지 옹이를 밟고 한 명씩 가까스로 1157봉 직전의 오른쪽 암릉을 돌아 내린다. 선두대장의 지시를 기다리는 잠시동안에 식어오는 땀이 냉기로 대체된다. 남쪽 긴 슬라브 하강직벽에 매어 놓은 로프가 다시 휩쓸려 사라지고  준비한 50m 로프를 걸어도 칠흑의 어둠 속에서 발디딤 확보가 만만치 않다. 잠시 동안의 숙의 끝에 안타깝지만 다시 되돌아 내리기로.. 힘겨운 30분이 흘렀다. 한 명씩 차례로 다시 나무등걸을 밟아 내린다.(04:40) 

망대암봉에 새벽이..


11월 19일_일_05:00 

 위험구간으로 막아 놓은 여심폭포 정상위를 조심스레 밟으며 1157봉 암봉을 왼쪽으로 감아 오른다. 배낭이 침니에 걸리지 않도록 조심스런 간격을 유지하며 잔설에 미끄러운 직벽 릿지를 감행하는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흐른다. 차라리 어둠 속에 묻혀진 절벽이 다행일지도... 힘겨운 잔등 넘기를 마친 후 마지막 대원의 무사 안착에 선두대장마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05:20) 참으로 힘든 구간을 적절한 간격을 유지하고 서로 도우며 한 치의 실수도 없이 극복한 자유인 대간팀이 자랑스럽다.

 남덕유 할미봉 내림길, 대야산 밤티재 오름길, 대덕삼봉 내림길, 희양산 오름길, 조령산... 힘들게 로프를 잡던 밤길이 스쳐 지나간다. 오늘을 위한 연습이었던가 보다. 다행히 바람이 불지 않고 날씨가 그런대로 도움을 주었으니 망정이지 웬만해선 밤길 만물상 오름은 매우 위험하니 만류하고 싶다. 두어 차례의 하강 로프를 잡은 후 왼쪽 십이담 계곡으로 이어지는  9부 능선을 돌아 내리니 산죽밭이 이어지는 육산 내림길에 접어든다. 생김새로 이름 붙인 UFO 바위 공터에 다다라 편한 자세로 휴식을 취한다. 물 한 모금이 꿀맛이다. (06:05) 깊이 쌓인 낙엽 속에 잔설이 얼어붙어 조금씩 미끄럽게 느껴진다.

 5분여 휴식 후 다시 이어지는 산죽밭길을 편한 게 밟아내리니 십이담 계곡 갈림길에 다다른다.(06:20) 작년 가을 초 흘림골의 지체로 저녁 5시가 넘어서야 이곳에 올라 점봉으로 향하던 보름달 저녁이 떠오른다. 늦은 밤길 곰배령에서의 하산길이 참 지루했었는데.. 다시 멀리 망대암산(1236)이 앞을 가리는 오름길을 숨이 가쁘게 내딛으며 밝아 오는 여명에 랜턴을 벗어 넣는다. 아이젠을 착용하기엔 적은 적설량이 가끔씩 미끄럼을 타게 하니 낙엽밑의 얼음이 조심스럽다.   

오대산 넘어 해는 솟아오르고..

 꽤 지루한 능선 오름을 거쳐 망대암봉 조망대에 다다라 우회길을 버리고 왼쪽 암봉으로 올라선다.(07:00) 동해일출..一望無際의 동해바다를 뚫고 늦은 태양이 솟아오른다. 이 순간을 위해 나는 밤길 험한 암릉을 넘어 여기까지 왔는가 보다. 긴 여정의 끝이 보이는 이 순간에 여기서 바라보는 서북능선의 장엄한 파노라마에 내 가슴은 또다시 요동치기 시작한다. 저 넘실대는 능선 아래에 펼쳐질 우람한 계곡들을 밟아 내리면 숨겨진 비경들 사이로 내 자유를 위해 흘린 땀방울처럼 영롱한 물보라를 일으키는 포효가 있을진저.. 지나온 발길들 마다 아픈 전설을 되뇌면서 이 땅의 수많은 영혼들을 다시 깨워 일으키는 개벽이 오는 날 나는 다시 이 자리에 서서 저 하늘을 우러러보리라.. 

내 갈길을 위하여

10여분이 넘도록 선뜻 내려서질 못한 채 망대암봉 정상에 서서 장엄한 일출이 펼쳐 보이는 설악의 장관과 발아래 펼쳐지는 눈부신 만물상의 화려함에 취한다. 점봉산 북릉 오름길이 부드럽게 다가온다. 이미 선두가 사라진 키 낮은 관목 숲길을 천천히 지쳐 오른다. 


업무상 행선지인 카타르 도하로 향하기 위한 이스탄불 경유 우즈벡항공은 벌써 미리 앉은 승객으로 가득 채워져, 다소 늦게 자릴 잡는 나를 쳐다보는 각양각색 세계인들의 얼굴을 느끼며, 오랜만에 한국을 떠나와 있음을 실감한다. 평소 미국이나 동남아 부근의 여행에서 국적항공기를 이용하다 보면 대부분 한국인이거나, 일부 동양인, 미국인으로서 이미 서울에서 익숙해진 정도의 범위에 불과하니 다양한 세계인의 개념을 느끼기엔 서툴렀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수많은 인종과 국가를 초월한 공간에 실린 채, 어둠 속으로 숨겨져 가는 텐샨과 차르박을 내려다보며 나는 한반도를 떠올리고 있었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것.. 식민지를 겪은 한민족의 아픔이 잉태한 단단한 상흔 속에서 결코 잃을 수 없는 불멸의 개념이겠지.. 오늘날 국가의 장벽을 허물고자 노력하는 세계인들을 침략자로 밖에 느껴지지 않을 것이고, 소위 신자유주의라는 괴물이 무서울 수밖에 없겠지.. 나는 오늘에 와서 50여 년 전의 유 림 선생을 다시금 떠올리며 그의 무정부론, 반국가주의 이론들을 읽어보고 싶은 게지..."  K노인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린다.
과연 저 멀리 동쪽의 작은 땅에 살고 있는 한민족의 생존을 위한 대안은 무엇일까.. 전쟁과 대량학살의 파멸에서 벗어나는 길을 찾는 오늘날 급한 행보들이 과연 진전되고나 있는 것일까.. 평화회담.. 침략자들의 평화회담은 결코 공존을 위한 회담이 아니라, 힘의 우열을 확인하고 무기만을 쓰지 않은 채 이기고 지는 것을 가리려는 냉전에 불과할진대.. 각자의 이기적인 꿈들을 실현하기 위한 각축장에서 일촉즉발의 살얼음 대화는 평화를 위한 무슨 진전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인가.. 
“권력을 가진 자에게 평화를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지.. 그들은 부당한 부를 위한 무사안일의 보수성을 가질 수밖에 없을 것이고.. 불의에 적응하기 쉽도록 설계되어 있지.. 미친 척하는 공산주의에 대해 병적으로만 불안해할 것이 아니라 공멸의 길을 인식하고 피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모색하여 냉정하게 대화하면서 전쟁을 막아야지.. “
6.25 전쟁에 대한 악몽의 무서운 회상을 엮어가는 K노인의 마지막 바램을 깊이 새겨본다.
평화로움이라는 것은 우리가 어떤 희생을 치르고 나중에 얻을 수 있는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강대국들의 논리로 전쟁을 통해서라도 실현하려는 평화로움은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평화로운 수단이 되어야 한다. 평화적인 목표는 평화적인 수단으로만 가능한 것을.. 오늘날 핵무기의 가공할 만한 파괴의 위험을 직면한 채, 지난 날 보다 훨씬 더 비극적일 수밖에 없을 전쟁이라는 내일의 전망에 휩싸이는 것은 결국 국가라는 필요 이상의 권력의 충돌이 아닐까.. 사유재산이라는 개인의 욕망만큼 국가라는 권력집단의 욕망과 이기심이 충돌하여 벼랑의 길을 가고 있는 오늘이다.
예나 변함없는 주목들..

 점봉산(1424) 정상까지의 북릉사면은 비교적 완만하게 200m 고도를 30여분 한가롭게 높여간다. 오랜 풍상을 겪은 주목들의 널브러진 모습에서 노련한 완숙미를 엿보며 흰 눈을 배경으로 녹빛 침엽의 강인함 마저 느낀다. 긴 역사의 큰 흐름을 말없이 간직한 채 이곳 하늘 가까운 조망터에 자리하여 선채로 오래 지켜볼 것이다, 이 땅의 영혼들이 나아갈 길을... 이 땅의 모든 영혼들이 새로운 삶을 위한 새로운 기회를 가지기 위하여 불의와 싸워 나가는 장엄하고도 거룩한 걸음을 축복할 것이다. 


점봉산 북사면은 눈에 덮여..

11월 19일_일_08:00 

 꽤 깊이 빠지는 눈밭을 걸어 점봉산 넓은 정상에 올라선다. 차례가 바뀐 대간의 여정에서 마지막 설악의 아쉬움을 달래 주려는 듯 눈부신 태양 아래 바람마저 재운 채 축복의 아침을 선물 받는다. 자유인의 걸음에 영광 있으라.. 南으로 곰배령을 거쳐 가칠봉(1164)을 우뚝 세우고, 西로는  귀둔리 용수골을 시작으로 골골을 이루며 산산을 파도쳐 밀려오게 만든다. 北에서 내려온 설악의 기개는 이곳 점봉에 가득 쌓아 둔 채로 새로운 대간의 정기를 쌓아 내려갈 마루금을 동으로 꺾으며 단목령으로 곤두박질친다.

 사위 조망을 끝내고 작은 점봉산 내림길 옆 양지바른 남쪽 사면에서 오랜만에 한가로운 아침을 즐긴다. 이제 남은 대간길도 10여 시간.. 아쉬움이 남은 것인가.. 여유로운 식사를 이곳 점봉정상에서 가질 수 있는 축복을 더욱 느끼고 싶은 거다. 한잔 이슬이가 高山의 초겨울 날씨를 녹여 준다. 잠깐 지나가는 바람에 으쓱함이 스친다. 자켓을 꺼내 입고 단체 사진을 간직하면서 아쉬운 설악의 이별을 고한다.(08:45)

 멀리 서북능선의 귀때기 청봉이 오른쪽 대청에 이르기까지 빨랫줄 금을 그으며 푸른 하늘과 맞닿는다.  

또 언제 다시 올까..

 동으로 꺾어 내리는 단목령 내림 길에서 아무래도 컨디션이 좋질 않더니 급기야 어지러움이 밀려오면서 한기마저 느껴진다. 미끄러운 급경사 눈길에서 아이젠을 다시 착용하고 조심스레 밟아 내리며 홍포수 막터를 지나 삼거리까지 긴 계단길을 거쳐 내려온다.(09:38) 아무래도 아침식사 후 먹은 감기약이 이상을 일으키는 모양이다. 아무런 생각이 나질 않을 정도로 머리가 무거워지고 식은땀이 나길 시작한다. 아직 갈길은 먼데... 마지막 말년 몸조심이라더니.. 참고 견뎌 보자.. 961봉 얕은 오르막 마저 힘겹게 다가온다.

남은 5시간을.. 어린 시절 하숙방에서 장티푸스인지도 모르고 끙끙대던 일주일이 떠오른다.

 961봉 오색삼거리 2차 이정표를 지나고 천천히 눈 쌓인 산죽밭길을 벗어나니 단목령까지의 편한 내림길이 포근한 날씨에 눈마저 녹은 상태로 낙엽이 바스락거린다.(10:30) 가을이 깊어진 계절에 잎을 떨군 채 긴 겨울 여행을 준비하는 참나무  키 큰 숲길을 후미에서 천천히 걷는다. 한기가 들어 자켓을 여미지만 날씨는 그리 춥질 않은 모양이다. 단목령에 가서 탈출을 고려해 볼 일이지만 참고 견딜만하다. 아무런 의식도 없이 오직 막히는 호흡을 입으로 가쁘게 토해 내며 땀과 콧물을 훔치기에 바쁘다. 선두조의 무전 소리마저 귀찮게 여겨진다.


11월 19일_일_11:00 

 인제 진동리와 양양 오가리를 이어주는 檀木嶺(박달령, 856)에 내려서니 걱정스레 기다리던 동료가 건네주는 떡 한 조각으로 원기를 북돋우며 잠시 휴식을 취한다. 새로 세운 금속 표지판을 외면하고 오래되어 낡은 나무 표지판 앞에서 기념을 간직한다. 단(檀)이란 이 땅의 시조 단군왕검 이래로 큰 의미를 가진다. 박달-밝은 산-白山-태백산 임금으로 이어지는 큰 의미를 한 글자로 함축한 것이다. 단단하기로 이름난 박달나무에 그 이름을 붙인 것은 이 땅의 강인한 영혼을 접목한 것이리라.. 나는 탈출을 접는다. 

단목령 지나 조침령이 까마득하구나..

 단목령에서 10분 정도 휴식을 취하며 원기를 북돋우어 다시금 875봉 얕은 오르막을 쉬엄쉬엄 저어 간다. 앞으로 4시간 어떻게든지 갈 수 있으리라.. 잔설이 녹아 축축한 산죽길과 널브러져 쌓인 낙엽을 헤치며 5분 정도 걸어 오르니 대간 마루금에서 듣기 힘든 계곡 물소리가 세차게 들려온다. 진동리 방대천으로 흘러드는 계곡의 시작이 꽤 많은 수량으로 마루금은 동쪽으로 계곡을 피해 돌아 오른다. 마음 같아선 풍덩 몸을 담그고 싶지만 왜 이리 추운지.. 875봉을 지나 잠시 내림길인가 싶더니 30분 정도 된오름을 거친다. 큰 산비탈을 지쳐 오르면서 작은 암반에 붙은 이끼가 초록빛을 발하며 예쁜 잔설을 이고 있다. 검붉게 말라가는 낙엽 더미 속에서 새로운 생명력을 느낀다. 결코 낙엽처럼 화려한 계절을 겪어 보진 않았지만, 급하게도 변해 가는 자연 가운데 늘 그렇게 가만히 지키고 살아가나 보다.


11월 19일_일_12:00 

 도전봉(1020) 밋밋한 고지를 지나면서 지난주 공룡을 마친 후 마등령에서 만났던 젊은 2030 팀이 매어 놓은 표지판이 반갑다. 부디 강하고 의로운 걸음을 이어가 이 세대의 주역으로서, 대간에서 느끼고 배운 사랑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기를.. 편하고 화려한 놀음의 시간을 버리고 힘든 고행의 길을 자처하면 서 스스로의 삶을 채찍질하는 젊음들에게 찬사를 보내며 나는 이 땅의 미래가 밝아 옮을 느낀다. 10여분 짧은 내림으로 北岩嶺(설피마을/북암리)에 내려서니 선두대장이 걱정스레 40여분을 기다리고 있다. 뒤처진 걸음으로 미안하고 건네주는 한 잔 이슬이 마저 외면할 정도로 지친 상태다. 아마도 탈진이라는 것이 이런 것인가 보다. 왜 이리 머리가 무거운지.. 아무래도 열이 많이 나는 모양이다.

 휴식을 취하는 후미조에 앞서 몇 걸음이라도 벌어둘 심산으로 1136봉 된 오름을 서둘러 먼저 나서 본다.(12:30) 비탈이 유난히 가파르게 느껴지고, 지난 밤길 새벽까지의 암릉을 타고 오르던 기력이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지 믿기질 않는다. 20여분의 지그재그 오름으로 낙엽으로 덮인 눈길을 걸어 오르니 1136봉 전망 좋은 봉우리에 올라서서 파헤쳐진 채로 허연 허벅지 살을 드러내는 공수전 계곡을 내려다본다. 구룡령을 넘어 다니던 길에 양양 고속도로와 조침터널 마저 개통된다니 이젠 미천골 아래 공수전 계곡은 유원지 못지않은 방문객을 맞을 것이고.. 부디 난개발을 막아 아름다운 산하를 멋지게 꾸밀 수 있기를 바라본다. (12:50)   

운무에 쌓인 태양..

 비슷한 고도의 마루금을 밟으며 1133봉을 지나고 얼마 안 가서 점점 시야가 흐려지며 운무에 휩싸이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해를 가리는 짙은 안갯속을 걷는다. 곳곳에 양수 발전소 상부 댐의 경고판이 이어지기 시작한다. 물론 원자력 발전소를 이곳에 설치하질 않아 다행이겠지만 전기라는 문명을 위하여 또 우리는 이렇게 사시사철 안개로 뒤덮는 거대한 호수를 심심산중에 이루어 놓고 어떤 형태의 대가를 치르며 그 값싼 전기료의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얻는 것만큼 항상 후세가 잃어가야 할 그 무엇에 대한 가치를 산정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1018봉을 지나 안부로 내려선 후 (14:00) 계속 이어져 나타나는 900여 m 고지를 지겹도록 마주하며 마지막 고통의 발걸음을 터벅거린다. 점점 발걸음의 속도가 느려진다. 선두는 이미 조침령에 다다른 모양이다. 운무로 시야가 가려진 943봉 조망대에서 오른쪽으로 급하게 꺾어 900봉을 향한다.


K노인으로부터 받은 내 나이 또래의 그의 아들의 주소와 이름이 적힌 메모 종이를 만지며 들여다보다가 어디선가 많이 익숙한 이름의 얼굴을 떠 올려 본다. 귀국 후 꼭 한번 만나서 그의 부친에 대한 또 다른 이야기들과 아드님 자신의 훗날 이야기들을 들어 보고 싶어 진다. 전쟁의 막바지에 태어난 50대 중반의 우리들은 누구나 그랬듯이 가난과 싸우며 배고픔을 배워 왔고, 전쟁의 후유증이 가져다준 냉전 논리 속에서 이리 발톱을 한 러시아와 별 그려진 중절모의 미국을 선택받으며 이념의 소용돌이를 헤쳐 나와야 했었다. 
인간의 보편적인 진리를 배워야 할 젊은 시절을, 설정된 타도의 대상을 저주하며 누구나 반쯤 독립된 이 땅에서 독립항쟁의 기개를 되살려야 했었고, 스스로의 삶과 인간적인 꿈을 희생하면서 까지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부딪혀 깨어지는 고통을 맛보아야 했었다.
전쟁 후의 사회 전체의 가난 속에서 평등의 개념에는 비교적 눈멀어 있었고, 오늘날과 같이 가난이 사회계층의 개인적인 운명으로 취급되며 자책감에 시달려야 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이념에서 벗어나 있었다. 오직 권력으로부터 획득해야 할 자유를 위하여 정해진 타도 대상을 극복하기에 골몰해야만 했었다. 그 와중에도 평등의 단체적 시각에 눈을 돌린 소위 진보라는 이름의 또 다른 이념투쟁에 덜 익숙한 채 어느새 혼돈을 가져와 한숨 쉬는 오늘의 중년들이 되고 말았다.
스스로의 삶과 피붙이에 대한 회한의 정을 정리하듯이 먼 이국의 땅에서 생의 마지막을 마무리 짓는 느낌을 주는 K노인의 마지막 바람이나 여한을 들어 볼 수는 없었지만,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그가 내게 기울여 준 정감으로 미루어 보아 그의 막내아들에 대한 애틋한 당부를 느낄 수 있었다. 결코 삶이란 정해진 목표와 선택한 이념들에 의해 한 길로 이어질 수는 없을진대.. 과연 그의 바람처럼 그의 후세는 어떤 삶을 꾸리고 있는 것일까. 
과연 우리는 부딪혀 오는 커다란 권력과 힘의 파도 앞에서 어떤 운명을 받아들이며 스스로 자유롭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과연 나 스스로는 오늘 내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지나온 회한들로부터 자유로운 추억을 간직하며 아름다운 과거를 간직하고, 다가올 또 다른 굴레들로부터 자유롭게 미래를 꾸려 나갈 수 있을 것인가..‘자유의 길’로 나아가기 위한 내 걸음들이 밟고 내딛는 내 조국과, 또 다른 인간의 삶을 이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먼 여정의 만남 속에서 나는 진정 인간을 이해하고 참된 자유를 이해할 수 있기를... 비행기는 카리브를 선회하며 또 다른 서남아시아의 사막 위에 닻을 내릴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또 한토막 종착역.. 다음구간 진부령에선..


11월 19일_일_15:00 

 마지막 900봉 전망대에서 잠시 호흡을 가다듬고 윙윙거리는 계곡 아래 서림의 차량 소리를 들으며 마지막 안간힘으로 조침령 고갯길로 밟아 내린다. 공병대 군인들의 삽으로 만들어 낸 이 비포장 고갯길이 쇠나드리 옛 조침령의 전설을 집어삼킨 채 20년 화려한 명성을 날리던 시절을 접을 날도 얼마 남지 않았겠지. 내년에 터널이 개통되면 어느 낭만적인 연인이 있어 애타는 사연을 안고 이 터덜거리는 고갯길을 찾아 나설까.. 간간이 지나치는 승용차 안의 연인들이 부럽기도 하구나..(15:20)  

 3주 전 구룡령에서 넘어오던 조침령 내림길의 화려함은 어느새 사라지고, 겨울 채비를 하는 가지들의 윙윙거림만 휑하니 빈 황톳길에 낙엽을 쓸며 맴돌고 있다. 멀리 점봉도 흐리고, 가칠봉 마루금 기슭에는 빈가지만 빗살을 이루며 하늘을 빗질한다. 20여분의 마지막 황토 내림길이 천근 몸을 굴리며 텅텅거린다.

 방대천 물소리는 지난가을과 다름없건만, 찬 발에 느껴지는 겨울이 매우 시리구나...


2006.11.20  배기호 

조침령 고갯길이 어느새 가을을 지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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