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다섯 번째 헌혈이다. 나는 매년 고난주간에 헌혈을 하여 <피로 회복>을 한다. 피는 생명을 의미할진대 나의 생명인 피를 누군가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 있는 일이다. 그것도 고난주간의 헌혈은 나를 위해 모든 피를 흘려주신 그분을 생각할 때 더욱 의미가 깊고 감사한 일이다.
나에게 헌혈의 시작은 코로나가 준 선물이다. 한창 코로나라는 듣도 보도 못한 기이한 이름의 전염병으로 온 세계가 공포에 질려 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던가. 병원에서 의료진들의 눈물겨운 헌신과 함께 매일 텔레비전 화면에서 보는 당시 질병청장의 의연한 모습으로 그나마 위로를 받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즈음 교회에서 <피!로회복>이라는 프로젝트로 고난주간 헌혈을 독려하였다. 병원에 피가 부족하니 온 성도가 헌혈을 함으로 한 생명이라도 살리자는 취지가 고난주간이어서 더욱 의미 있게 다가왔다. 이름부터 신박한 <피!로회복>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울림을 주었고 나의 발걸음은 어느새 서울역 헌혈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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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30대부터 시도하여 헌혈차에 올라가 간단한 검사를 받으면 매번 저혈압이라는 이유로 퇴짜를 맞았던 터라 몇 번의 헌혈 불가 판정 이후로는 아예 나의 사전에 헌혈이란 없는 걸로 제켜 두고 살아왔다. 그런데 느닷없이 코로나가 왔고 2021년 고난주간에 <피!로회복> 프로젝트가 성사되어 떨리는 마음으로 헌혈차에 올랐는데 놀랍게도 "헌혈 가능"이라는 기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30대에 실패한 헌혈을 60이 넘어 성공하다니! 그날의 감격과 감사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을 만큼 엄청났다. 정말 오래 살고 볼 일이다.
그 이후로 매년 고난주간이 되면 성금요일에 맞추어 헌혈의 집으로 간다. 첫 해부터 서울역 헌혈의 집이 단골 장소가 되었고 여러 일로 서울역을 오고 갈 때마다 한 번씩 인사하듯 바라보고 지나간다. 이젠 떨리지도 않고 헌혈 의자가 마치 비행기 일등석인 듯 안락하여 나태한 자세로 몸에서 피가 빠져나가는 것을 의연하게 바라볼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러던 중 작년에는 새롭게 단장된 광화문 헌혈의 집으로 옮겨가게 되었는데 그곳에서의 특별한 감동을 잊을 수가 없다.
그날도 점심시간 즈음 도착하여 간단한 전자 문진과 손가락 끝 피검사를 마치고 정해준 최신식 헌혈 의자에 앉아 여유 있게 내 피가 흘러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잠시 눈을 돌려 헌혈실 안 전체를 둘러보았을 때 목구멍으로 감격의 울컥함이 솟구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30대쯤 직장인으로 보이는 남성들 서너 명이 내 오른편 헌혈 의자 칸칸마다에서 하나같이 팔을 걷고 피를 뽑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 우리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 소망이 있구나.’하는 뜨거운 마음이 솟아올라왔다.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점심을 빨리 먹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잡담하기에도 모자랄 그 점심시간을 쪼개어 자기 피를 뽑아 누군가에게 주겠다는 저 건장한 청년들! 그들이 왠지 나라를 지켜줄 것 같은 안도감과 고마운 마음에 알지도 못하는 그 젊은이들을 향해 마음으로 박수와 함께 고마움을 담아 미소를 보냈다.
이제 올해 들어 5년째 헌혈이다. 헌혈 가능 나이는 만 16세부터 69세까지이므로 나에게는 앞으로 2년이 남았다. 이 나이에 내 피를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내 피가 건강하고 쓸 만하다는 증거이다. 피를 뽑고 나올 때마다 마치 ‘너의 건강을 보증한다.’라는 증표를 손바닥에 꽉 쥐어주는 것 같다. 나이가 나보다 어린데 고지혈증으로 헌혈할 수 없음을 안타까워하는 친구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친구는 헌혈이 가능한 지금 나의 건강을 부러워하기까지 했다. 누구나 건강을 제일로 생각하고 이를 지키려고 무진 애를 쓰는 마당에, 두 번의 수술을 받고도 살아남은 “암 생존자”(cancer survivor)인 나에게 날마다 좋은 피가 새롭게 만들어지니 새로운 몸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닌가. 살아있음에 대한 감사와 함께 비록 320ml라는 적은 양이라도 누군가에게 줄 수 있음이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피에는 다른 영양소는 물론이지만 철분 함량이 중요하다. 피검사에서 철분 함량이 적으면 헌혈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 철분이 많은 음식은 중고등학교 가정 시간에 배운 대로 돼지고기, 소고기 등 붉은 육류에 많이 포함되어 있다. 그래서 헌혈하는 날은 나에게는 대놓고 소고기 그것도, 한우 안심을 먹기로 한 날이다. 뽑은 피만큼 또 새로운 피가 또 만들어지도록 말이다. 오늘도 헌혈을 마치고 나오는 나의 발걸음은 가볍기 만하다. 320ml의 핏물이 몸에서 빠져나갔으니 그만큼 가벼워졌기도 했겠지만 한우 소고기 안심을 기분 좋게 먹는 날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다. 좋은 피야 또 많이 많이 만들어져라. 단골 고깃집 사장님께 당당하고 우렁차게 주문하는 내 목소리가 맘에 든다.
“저기요, 한우 안심 300그램만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