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원의 보루’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지역의 너른 대지와 신도시 건설 현장, 그리고 쉼 없이 돌아가는 공장 라인마다 우리 노동자들의 땀과 눈물이 배어 있다. 그 한복판에서 노동자의 권익을 사수하고 진보의 가치를 실현하겠다며 세워진 우리의 ‘노조’는 본래 비바람을 막아주는 든든한 버팀목이자, 자본의 횡포에 맞서 투쟁의 불씨를 지피는 화로여야 했다.
그러나 지금, 그 노조 안을 들여다보는 조합원들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다. 노조를 지키고 가꾸어야 할 임원과 사무처의 시선은 더 이상 현장의 거친 숨소리를 향하지 않는다. 투쟁의 조끼보다 안락한 사무실의 의자가 더 익숙해진 그들에게서 우리는 ‘현장성’이라는 노동 운동의 생명력이 거세되어 가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진보적 활동은 ‘피곤한 일’이 되었고, 노동자의 권익을 위한 투쟁은 ‘관리해야 할 리스크’로 전락했다. 험지로 나가기보다는 꽃길만 찾고, 불편한 싸움보다는 매끄러운 타협을 우선시하는 그들의 뒷모습에서, 우리는 이 조직이 과연 노동 운동의 전위 부대인지, 아니면 거대한 관료 조직의 하부 기구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뼈아픈 지점은 노조를 이끄는 이들의 뇌구조가 어느덧 ‘사측의 마인드’로 오염되었다는 사실이다. 노동자의 정당한 요구를 ‘무리한 주장’이라 치부하고, 현장의 갈등을 ‘합리적 경영’의 관점에서 중재하려 드는 태도는 우리가 그토록 경계해온 어용(御用)의 그림자와 무엇이 다른가.
그들이 내뱉는 언어는 더 이상 계급적 단결을 고취하는 선동이 아니다. 효율과 안정을 강조하며, 조직의 안위와 본인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관리자’의 언어다. 더욱이 노조를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위한 ‘징검다리’로 삼으려는 파렴치한 행태는 가관이다. 조합원들이 낸 소중한 조합비와 투쟁의 성과를 자신의 이름값을 높이는 도구로 소모하고, 상급 단체나 지역 정치권의 눈치만 살피는 모습은 노동 운동에 대한 명백한 배신이다.
진보적 활동이 본인들의 안위나 정치적 경로에 방해가 된다면 가차 없이 외면하는 그들에게, 과연 이 노조의 주인인 조합원은 어떤 존재인가. 그저 3년에 한 번 투표해주는 표일 뿐인가, 아니면 자신들의 ‘정치 놀음’을 뒷받침해줄 병풍에 불과한가.
지금 이 순간에도 지역의 곳곳에서는 민주노조의 깃발 아래 새롭게 모여드는 ‘신설 노동조합’들이 있다. 자본의 탄압과 현장의 냉소 속에서도 “노동자답게 살아보자”며 용기를 낸 동지들이다. 또한, 이들의 손을 잡고 노동조합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지회 확대 간부’들이 배움의 갈증을 느끼며 노조를 바라보고 있다.
우리는 두렵다. 이제 막 뿌리를 내리려는 어린 묘목들에게 지금의 노조가 무엇을 가르칠 수 있겠는가. 투쟁의 기술이 아닌 타협의 기술을, 연대의 정신이 아닌 생존의 요령을, 변혁의 철학이 아닌 관료주의의 병폐를 유전(遺傳)시키려 하는가.
“원래 노동 운동은 이렇게 적당히 하는 것”이라는 패배주의적 교훈을 물려준다면, 그 죄는 역사가 엄중히 물을 것이다. 노조가 변하지 않는다면, 새로 들어온 동지들은 노조를 ‘희망의 등대’가 아니라 ‘낡은 구습의 박물관’으로 기억하게 될 것이다. 선배들이 피로 일궈온 민주노조의 정통성이 당신들의 나태함과 기회주의 속에서 무너져 내리고 있음을 직시하라.
우리는 묻는다. 지금의 노조가 보수적인 관변 단체나 사측의 노사협력팀과 다른 점이 무엇인가.
· 현장의 목소리를 소음으로 여기는 오만함이 닮았다.
·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변화를 거부하는 완고함이 닮았다.
· 대의보다는 개인과 정파의 이익을 앞세우는 소아병적 태도가 닮았다.
상대가 강해서 우리가 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 내부가 썩어 문드러지고, 우리 스스로가 우리가 싸우던 괴물을 닮아갈 때 노동 운동은 소멸한다. 진보적 가치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노조, 투쟁의 현장보다 정치적 수사가 난무하는 사무처는 더 이상 노동자의 조직이라 부를 수 없다.
지금 노조를 장악하고 있는 이들은 스스로를 ‘전략가’라 자칭할지 모르나, 현장이 없는 전략은 기만이며 동지가 없는 정치는 사기다. 당신들이 누리는 그 안위는 누군가의 해고와 누군가의 눈물 위에 세워진 것임을 잊지 마라.
이 글은 노조를 파괴하기 위함이 아니라, 죽어가는 노조를 살리기 위한 조합원들의 처절한 비명이다. 지역 노조는 특정 개인이나 소수 간부의 전유물이 아니다. 이곳은 자본의 착취에 맞서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자 했던 수만 노동자들의 공동체다.
우리는 요구한다.
첫째, 노조 임원과 사무처는 지금 당장 ‘정치의 안경’을 벗고 ‘현장의 망원경’을 들어라.
둘째, 신설 노동조합와 간부들에게 ‘타협의 기술’이 아닌 ‘투쟁의 원칙’을 몸소 보여라.
셋째, 본인들의 안위와 직결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가장 낮고 험한 투쟁의 전면에 서라.
만약 노조가 끝내 변하기를 거부하고, 지금처럼 ‘보수화된 관료 조직’의 길을 고집한다면, 조합원들은 더 이상 침묵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든 촛불은 사측뿐만 아니라, 우리 내부를 갉아먹는 암세포를 향해서도 타오를 수 있음을 경고한다.
노조의 깃발이 다시금 현장의 바람에 힘차게 휘날릴 때까지, 우리는 지켜볼 것이며, 기록할 것이며, 끝내 저항할 것이다. '진보'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멈춘 심장을 다시 뛰게 하는 실천임을 증명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