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후들거리는 다리를 진정시키면서 마운드를 향해서 걸어 갔다. 얼마나 잘 던지나 보자는 듯 파란 인조 잔디가 꼿꼿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침을 삼켜봤지만 쿵쿵 뛰는 준혁의 심장은 잦아 들지 않았다. 경기 전 감독으로부터 언질이 없었기 때문에 더 긴장이 되었다.
미리 말했어도 떨리긴 매 한가지였겠지만 갑작스러운 투수 교체였다. 선발 투수가 경기 도중 갑자기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다. 투수 앞 땅볼을 잡으려다 미끄러져 오른손목을 삐었는데 교체 선수가 마땅치 않았던 것이었다. 다행히 9대5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한달 전 연습게임에서 투수를 해 본적이 있지만 정식 경기에서는 처음이었다. 연습게임 때는 부담이 없어서 그런지 공이 빠르게 잘 들어갔다. 기록이 남지 않아 승패에 덜 민감한 연습게임과 실제 경기는 전혀 달랐다. 말 그대로 실제 상황이었다. 심판을 포함한 야구장 안팎의 모든 시선이 투수에게 집중되었다. 시선을 의식할수록 긴장이 더 밀려왔다.
마운드로 올라간 준혁은 애써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포수로부터 공을 건네받았다. 손에 땀이 나 공을 바지에 문지르고는 자세를 잡고 연습투구를 시작했다. 첫 번째 투구는 원 바운드로 포수 미트에 힘없이 기어 들어갔다. 땀 때문에 손에 제대로 힘을 못 줘 공이 미끄러진 듯했다. 투수판 뒤에 있는 로진백을 집어 문질렀다. 땀이 송진가루와 함께 허공으로 날아간 듯 실밥이 뽀송하게 만져졌다.
실밥에 검지, 중지 손가락을 걸치고는 포수를 향해 힘껏 두 번째 공을 던졌다. 중력과 공기의 저항을 이겨내고 힘있게 회전한 공은 강하게 포수 미트에 꽂혔다. 그러나 포수 머리 근처로 가는 높은 볼이었다. 몇 개의 공을 더 던졌으나 스트라이크로 들어가는 공이 거의 없었다. 타고난 강한 어깨로 공에 힘은 있었으나 제구가 불안정했다. 연습투구가 끝나자 심판은 현재 아웃카운트와 주자 상황을 확인시켜줬다.
“원 아웃에 주자 2,3룹니다.”
타자가 배팅박스 안으로 들어와서 가벼운 목례를 주고받았다. 준혁은 왼발을 차올리고는 손을 뒤로 젖혔다가 포수를 향해 공을 던졌다. 타자는 배트를 움직이지 않았다. 공이 타자 앞에서 원 바운드로 포수 미트로 들어갔다. 두 번째 던진 공은 “슝”하며 강하게 날아갔지만 타자 바깥으로 빠지는 볼이었다. 세 번째도 볼로 순식간에 노 스트라이크에 쓰리 볼이 되었다.
이제 스트라이크를 못 넣으면 볼 넷으로 타자가 출루하여 만루가 되는 상황이었다. 긴장을 풀 겸 천천히 로진백을 집어 손가락을 문질렀다. 자세를 가다듬고 4구째를 던졌으나 높게 들어가는 볼이었다. 타자가 1루로 걸어 나가면서 만루가 되었다. 그라운드 안 모든 베이스에 주자가 다 들어찼다. 지저스팀 감독인 포수가 타임을 요청하고는 투수 마운드 쪽으로 걸어 왔다.
“왜 그리 긴장해? 긴장 풀고 편안하게 던져. 몸이 경직되어 있으니까 힘이 들어가 공이 자꾸 빠지잖아. 연습게임 때처럼 하면 돼. 맞아도 상관없어.”
감독의 말대로 안타를 맞아도 된다는 마음으로 힘을 빼고 공을 던졌다. 손에서 공이 떠날 때 느낌이 좋았고 공의 궤적이 포수 가운데를 향하는 것이 보였다. 이번엔 제대로 던진 것 같았다. 공이 타자 근처에 거의 도착할 때쯤 타자의 배트가 리듬을 타기 시작했다. 배트가 공의 궤적과 똑같이 반원을 그리며 달려 나와서는 공을 맞혔다.
“깡!” 배트는 공을 외야로 힘껏 날려 보냈다. 준혁은 멍하니 외야로 힘있게 뻗어가는 공의 포물선을 지켜봤다. “와!” 하는 함성이 들려오자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모든 주자가 홈으로 들어왔고 타자는 천천히 2루까지 갔다. 주자 싹쓸이 2루타를 맞은 것이었다. 상대팀은 순식간에 3점을 따라붙어 9대8이 되었다. 다음 타자를 유격수 앞 땅볼로 아웃을 시켰으나 다시 볼 넷과 안타를 맞았다. 이후 4점을 더 잃어 9대12로 역전을 당한 상태에서 상대팀의 공격이 끝났다.
경기 흐름이 완전히 넘어간 상태에서 지저스팀은 마지막 공격에서 1점을 얻는데 그쳤다. 최종 스코어는 10대12. 지저스팀은 패했고 준혁은 패전투수가 되었다. 본인 때문에 패해서 안타까웠지만 예전처럼 열패감은 들지 않았다. 넘어져도 좌절하지 않고 무릎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 몸에 배어져 있었다. 매 경기 승리와 패배를 반복하면서 체득한 것이었다.
한편으로 ‘투수’라는 새로운 도전 대상이 나타났다는 것에서 설렘과 투지가 살아났다. 고등학교 때 보았던 친구의 부드럽고 강력한 투구 모습. 공이 소용돌이 치듯 맹렬히 회전하여 포수 글러브에 ‘팡’하며 꽂혔을 때 느꼈던 전율. 그것을 자신이 재연한다는 생각에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이날 이후 준혁의 훈련 패턴이 달라졌다. 투수 전문 레슨반으로 옮겼고 러닝과 함께 어깨 근력운동 강화에 집중했다. 홍코치의 지도 아래 투구 동작 하나하나 수정해 나갔다. 빠른 공으로 타자를 꼼짝 못하게 삼진으로 돌려 세우는 모습을 상상하며 훈련에 매진했다.
투수 훈련과 함께 11월 중순에 있는 로스쿨 면접준비에 집중을 했다. 미나의 설득으로 6월 중순부터 로스쿨 1차 시험인 법학적성시험 LEET를 준비했었다. 과외는 대폭 줄이고 야구 외에는 오로지 시험 준비에만 몰두했다. 사법시험 준비할 때 감각이 남아 있어 LEET 성적을 잘 받을 수 있었고, 모교 로스쿨에 응시하게 되었다.
국내 최고 로스쿨이라 경쟁이 치열했지만 자신 있었다. 야구를 계기로 열정으로 흘린 땀은 거짓말을 안 한다는 진리를 믿게 되었다. 죽을 각오로 땀을 흘렸는가를 반문해보면 거기에 답이 있었다. 흘린 땀의 양과 질에 따라 결실이 예측된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강의, 그룹 스터디, 면접 리허설 등 면접준비에 모든 노력을 쏟아 부었다. 로스쿨 면접 당일 대기실 복도로 걸어가는 준혁의 발걸음은 너무나 가벼웠다.
<웅~~~웅웅~~웅~> 12월초 오전 을지로 SS보험사 13층 회의실 테이블에 놓인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깜짝 놀란 미나는 발신자 이름만 확인하고 종료 버튼을 눌렀다. 준혁이었지만 팀 주간회의 중이라 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이 시간에 왜 전화를? 무슨 일이지?’ 갑작스레 전화를 하지 않는 평소 성격으로 봐서 긴급한 전화임에 분명했다. 미나는 회의에 집중하지 못하고 주머니 안에 넣어둔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웅~~~> 주머니 안에서 또 핸드폰이 떨고 있었고 이번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앗, 오늘 로스쿨 발표날.’ 미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빠른 걸음으로 회의실 문 쪽을 향해 걸어 나갔다. 팀장, 팀원들의 시선은 전혀 의식되지 않았다. 회의실 문을 열자 마자 핸드폰 통화 버튼을 눌렀다.
“미나야!” 평소와 다른 들뜬 목소리였다. 순간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아침부터 웬일이야? 나 지금 회의하다 나왔어.” 혹시나 하고 모른 체했으나 준혁은 다급했다.
“나 로스쿨 합격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