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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경선 Sep 13. 2024

나비처럼 날아서 -10

10.

삼성동 코엑스 사거리에서 검정색 차량이 잠실 방면 직진 신호 대기 중이었다. 햇빛이 도망가지 않고 차 앞 유리창에 머물고 있었다. 이경수는 멍하니 전방을 응시하고 있었지만, 까만 선글라스때문에 유리창에 머문 햇살은 보이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초조함이 밀려왔고 머리가 욱신거렸다. 아침 이른 시간 전화 때문에 잠을 설쳐 그런 듯했다. 

“안녕하세요. 송파경찰서 김석현 형삽니다.” 침대에 누워서 받다가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박혜진씨 사건 관련하여 확인할 게 있습니다. 오늘 서에 나와 주셔야겠습니다.”

“저번에 이야기 다 된 것 아닙니까? 저와는 관련이 없다고 말씀드린 것 같은데요.”

“몇 가지 확인해 주셔야 할 게 있습니다. 나와서 직접 해명을 해 주셔야 빨리 끝납니다.”

신호가 바뀌자 탄천을 부드럽게 빠져나가 송파경찰서 방면으로 향했다. 송파경찰서 1층에 주차 후 경찰서 현관 쪽을 살펴보았다. 다행히 기자들이나 방송국 카메라는 보이지 않았다. 언론이 알면 안 된다는 다짐을 경찰이 잘 지킨 듯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모자를 깊게 눌러썼다. 차문을 열고 나가는데 갑자기 코가 실룩거리며 재채기가 나왔다. 환절기에 갑자기 기온 차가 생기면 나타나는 알레르기 비염이었다. 허리를 굽혀 차 안 이리저리 둘러봐도 지르텍은 보이지 않았다. 휴지를 뽑아 코를 길게 풀고는 경찰서로 들어갔다. 

“쉬는 날도 아닌데 감사드립니다.” 3층 강력팀 회의실에서 마주한 남형사의 상투적인 말에 이경수의 답은 퉁명했다. “경찰이 오라면 와야죠.”

“김형사 그러게 내가 뭐랬어. 이경수씨 댁 근처로 가자고 했잖아.” 김형사를 탓하는 듯했지만 시선은 이경수를 향했다. 

“괜찮아요. 오늘은 목동 경기라 여유 있습니다. 어제 저희 팀 선수 만났다고 하던데요.” 

“네 만났죠. 그분들 말로는 이경수씨가 중간에 자리를 비웠다고 하던데요. 꽤 오랫동안요. 저희한테는 숨기고 말도 안 하셨던 것 같은데” 

“숨기다뇨? 저한테 중간에 자리를 비웠냐고 물어보지 않았잖아요. 오래 자리를 비운 것도 아니고 잠깐 밖에 갔다 온 것뿐입니다.”

“잠시가 아니라 50분 넘게 자리를 비우셨습니다. 12시 41분에 나가서 1시32분에 돌아왔던데요.” CCTV를 분석했던 김형사가 자신 있게 몰아붙였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리에...에 에취. 에취. 에취~이.” 이경수는 갑자기 재채기를 하고는 손으로 코를 막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알레르기 비염이 있어서요. 미안한데, 화장지 좀 쓰겠습니다.”

이경수는 급한 지 티슈를 연달아 세 번 빼내어 코를 세게 풀었다.

“한번 시작하면 잘 그치질 않거든요. 보기 안 좋으시겠지만 이해 좀 해주세요. 어디까지 얘기했죠? 맞아. 제가 자리를 비운 시간이 50분이나 됐다고요? 제 기억으로는 그리 길지 않았던 것 같은데요.”

“50분 동안이나 어디서 뭘 하고 왔습니까?”

“사건과 관련 없는 개인적인 일인데 제가 뭘 했는지 꼭 말을 해야 하나요?”

“관련이 있고 없고는 저희가 판단합니다 이경수씨. 지금 그 시간대 알리바이가 되게 중요하게 됐습니다. 이경수씨 자리 비운 시간과 박혜진 사망 시간이 겹쳐요.”

“알리바이라뇨? 제가 혜진이를 어떻게라도 했다는 말입니까? 공교롭게 시간이 겹칠 수도 있는 거지. 식사하다가 야구장 가서 사람을 죽이고 다시 돌아왔다는 게 말이 됩니까?”

“흥분하시면 안 됩니다. 감정 죽이시고 사실관계만 확인해주시면 되는 겁니다. 예민하게 반응하면 시간도 지체되고 좋을 게 없어요.”

“알겠는데요. 의심하듯이 말을 하니까 그러는 거 아닙니까? 자꾸 그러시면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참고인 조사하는 거라고 말씀드렸는데 삐딱하게 나오시네요. 가만히 안 있으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피의자 소환장 발부해서 포토라인 앞에 기자들 두고 해명하게 해 드릴까요?” 

이경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며 얼굴 근육을 긴장시켰다. 침묵이 흘렀다. 팽팽한 분위기에 김형사는 당장 문을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뭐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아무튼 제가 좀 예민했나 봅니다.” 칼자루를 쥔 쪽이 자신이 아니다는 것을 인지한 듯 이경수는 감정을 잡았다. 

“답변만 잘해 주시면 빨리 끝내 드리겠습니다. 중간에 나가 뭐하시다 온 겁니까?”

“정말 개인적인 일이라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면 안 됩니다. 그날 식사 도중 전화가 왔습니다. 최근에 만난 여잔데, 얘기할 게 있다고 잠깐 나오라 하더라고요. 안 갈려고 했는데 전화가 계속 오는 바람에 나가서 만나고 왔던 겁니다.” 

“그 여자분, 누굽니까?”

이경수는 길게 숨을 내쉬며 뜸을 들이다가 말을 했다. “그 여잔 영화배우 김연경입니다. 친구 소개로 몇 번 만났던 사이고요.”

“김연경? <유흥>에서 송강호 여동생으로 나온 배우 아닙니까? 맞아 맞네요. 김연경. 요즘 되게 잘나가는 배운데.” 김형사가 아는 체를 했다.

“연예인과 인연이 많으시네요. 김연경을 어디서 만났나요?” 김형사 말이 길어질까 봐 남형사가 질문을 이었다. 

“잠실야구장 주차장에서 만났습니다. 3루쪽 출입구 건너편 주차장요. 촬영 끝나고 집에 들어가는 길이라 길래 잠시 봤습니다. 알다시피 연예인은 사생활이 노출되면 피곤해지잖아요. 만날 때 주위 시선 신경 쓸 수밖에 없더라고요. 그날도 연경이의 밴 옆에 제 차를 대놓고 밴 안으로 들어가서 만났습니다. 거기서 잠시 얘기 나누고 제 차로 감자탕 집으로 돌아온 겁니다.”

“밴에서 나와 야구장안으로 들어가거나 하지는 않았나요?”

“바로 돌아왔다니까요. 그 시간에 제가 왜 야구장에 들어 갑니까?”

“그날 무슨 옷 입고 있었어요? 여배우 만났을 때요.”

“경기 끝나고 입는 옷은 거의 비슷한데, 아마 트레이닝복 차림이었을 겁니다. 저희 팀 모자에 후드티, 트레이닝 바지를 입었던 것 같은데요.”

“등 쪽에 백넘버 새겨진 후드티 말이죠?”

“네, 구단에서 나눠준 건데 편해서 자주 입는 편입니다. 근데 그걸 어떻게 아세요?” 

“그날 밤 1시쯤 이경수씨를 봤다는 사람이 있어요. 그것도 야구장 안에서요. 청소원이 3루측 선수전용 출입구 앞에서 봤다는대요.” 이경수 같다고 한 진술을 남형사가 과장했다. 

“저를요? 야구장에 들어 가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저를 봤답니까?”

“이경수씨와 똑 같은 복장을 한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피닉스 팀 모자와 등에 32번이 새겨진 후드티를 입은 남자.”

“청소원이 누구를 봤는지 모르겠지만 전 아닙니다. 밴에 있다가 바로 식당으로 갔다니까요. 그리고 피닉스 32번 후드티. 인터넷에서 아무나 살수 있어요. 그 옷을 입은 사람은 다 이경수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흥분하지 마시고 그 얘기는 여기까지 하시죠. 김연경씨한테는 저희가 따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김형사 장갑 좀 줘봐.” 

김형사는 투명 증거물 봉투를 남형사에게 건넸다. 봉투 안에 파란색 야구 장갑 하나가 숨죽이고 있었다. 남형사는 이경수 쪽으로 밀어 보냈다. 

“열어 보지는 마시고 겉으로만 한번 봐주세요.”

“타격할 때 사용하는 배팅 장갑이네요. 메이저리그에서 많이 사용하는 브랜든데요. 근데 한 짝은 어디 가고?”

“사건당일 3루 덕아웃 근처에서 발견했는데, 나머지 한 짝은 아직 못 찾았습니다.”

“3루쪽이라면 우리 팀 선수 중 한 명이 흘리고 갔나 보네요. 가격도 비싸고 국내에 파는 데가 없어서 일반인은 구하기 힘들거든요. 보통 프로야구 선수 개인 오더로 맞춤 제작하는 방식입니다.”

“이경수씨도 같은 브랜드 장갑 가지고 계세요?”

“네. 저도 이 브랜드 가지고 있습...”

이경수가 증거물 봉투를 뒤집어 반대쪽 면을 보면서 말을 하다 말고 멈췄다. 정지된 풍경처럼 봉투 겉면에 손을 대고는 장갑을 바라만 봤다. 

“장갑이 뭐 이상해요? 손목 안쪽 면에 자수로 숫자가 새겨진 거 빼고는 특이한 게 없던데?” 남형사가 말을 하면서 계속 이경수의 표정을 주시했다. 

“그게요, 장갑에 새겨진 번호가 저랑 같은 32번 이네요.”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가 줄어 들었다. 

“그러니까 장갑 주인과 이경수씨는 같은 32번을 사용한다. 이렇게 되는 겁니까?” 예상했던 답이 나오자 남형사는 시나리오대로 질문을 했다. 

“그런가요? 근데 같은 번호가 찍혔다고 주인이 같다는 법이 있나요? 제 장갑은 차 트렁크 안에 있으니 괜한 생각은 하지 말아 주세요. 전 물건 같은 거 흘리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날 양팀 선수 중 32번은 이경수씨가 유일합니다. 장갑이 발견된 곳도 불과 몇 시간전까지 이경수씨가 있었던 자리 아닙니까? 당연히 의심을 할 수밖에 없죠.”

“제 배팅 장갑은 트렁크안에 있다니까요. 지금 당장 확인시켜 드리겠습니다. 한 분만 저랑 같이 다녀 오시죠. 차안에 있는 장갑 확인하고 가져오면 되잖습니까?” 



김형사가 이경수와 같이 나갔다가 20분 뒤에 돌아왔다. 자리에 털썩 앉은 김형사는 테이블 위 증거물 봉투 옆에 장갑 한 짝을 내려 놓았다. 

“트렁크 안에 같은 장갑이 있긴 있었는데 한짝뿐이었습니다. 다른 종류의 장갑은 다 두 짝이었는데 이것만 한짝뿐이더라고요.” 김형사가 말을 하고는 이경수 쪽으로 눈을 돌렸다.

“경기 끝나면 항상 야구 가방 안에 챙겨 넣어 두는데, 이상하게 그 장갑 한 짝만 없네요. 집에 흘렀는지 모르니 찾아보겠습니다.” 이경수는 말을 끝내고는 다시 코를 풀었다.

“잠시만요, 장갑 두 짝이 너무 비슷해요. 크기도 디자인도요. 증거물 장갑은 왼손, 방금 가져온 것은 오른손으로 두 개 합치면 한 켤레가 되고요.”

남형사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증거물 장갑과 이경수가 가져온 장갑을 대조했다.

“이 장갑 두 짝 아무래도 동일한 장갑 같습니다. 크기, 디자인, 표면 마모 정도 등 거의 똑같아 보여요. 과학수사팀에 의뢰해서 성분 분석 해봐야겠습니다. 가져온 장갑 한 짝 저희한테 맡겨 주십시오. 검사 끝나면 돌려 드릴게요. 2,3일이면 될 겁니다.”

이경수가 허락을 하고는 바로 어색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집에 가서 나머지 장갑 한 짝 빨리 찾아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괜히 과학수사팀 바쁘게 할 필요 없잖습니까?” 

바로 남형사의 질문이 이어졌다. “머리 숱이 많고 새까매서 보기가 좋네요. 부럽습니다. 요즘은 개성 있게 염색하는 선수들도 많던데, 혹시 최근에 염색한 적 있으세요?” 

“글쎄요, 없는 것 같은데요.”

“저번 주 토요일 경기 전 훈련 모습입니다. 여기 이경수씨 맞죠? 갈색으로 염색했는데요?”

김형사가 핸드폰에 저장된 사진을 보여주며 말을 하자 남형사가 이어 받았다.

“그럼 사건 발생 당일도 갈색이었다는 말이 되는 겁니다. 수요일 밤이었으니까.”

“아, 맞습니다. 저번 주말까지는 염색 머리였고 이번 주 월요일에 염색을 풀었습니다. 형사님들 만나던 날 오전에요. 죄송합니다. 착각했네요. 근데 제 머리 색깔이 그리 중요한가요?”

“박혜진씨 상의에서 타인의 모발이 검출됐어요. 과학수사팀에 의하면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로 빠진 머리카락이었다고 합니다. 갈색으로 염색을 한 흔적도 보였고요.” 

‘염색을 한 머리카락이라고 했지 갈색이라고 안 했는데.’ 김형사는 고개를 갸웃했다. 

“혜진이 옷에서 발견된 머리카락이 제 거라는 말입니까?”

“이경수씨 거라고 단언은 못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아니라고는 말을 못할 거 같네요. 말이 좀 이상한가요? 결국 감식을 해봐야 한다는 게 저희 입장입니다. 이경수씨가 협조만 해준다면요. DNA 분석을 통해 동일인의 것인지 아닌지 확인만 되면 의혹이 없어지지 않을까 합니다.”

“의혹이라뇨? 전 분명히 그날 야구장안에서 혜진이를 만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게 중요한 것 아닙니까? 만나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제 머리카락이 혜진이 옷에 붙어 있을 수 있나요? 전 DNA 감식 같은 것 할 생각 없습니다.”

남형사는 입을 다문 채 이경수를 똑바로 쳐다봤다. 대화가 끊어지며 무거운 적막이 지배했다. 회의실 안은 아무런 움직임 없이 정지되었다. 공간이 정지되니까 덩달아 시간도 멈췄고 침묵은 길게 늘어졌다. 길어진 침묵의 시간만큼 더 공간이 움직이지 않는 것 같았다. 시간과 공간은 결국 하나였고 그 사이에 침묵이 놓여 있는 형국이었다. 

“알겠습니다. 이경수씨 뜻이 그렇다면 저희도 어쩔 수 없죠. 박혜진씨와는 그냥 고등학교 동창 사이였다고 했죠?” 남형사가 침묵을 깼다.   

“저번에 말씀드렸지만 고등학교 때 친했던 친구였습니다. 혜진이는 대학에, 저는 프로에 오면서 각자 생활에 바쁘다 보니 연락이 끊어졌고요. 그러다 1년전에 우연히 만나게 되어 가끔 안부 전하는 친구, 그게 전부입니다”

“단순 친구 사이였다니 박혜진씨 임신한 것도 몰랐겠네요?”

“임신을 했다고요?”

“뱃속에 3개월 되는 태아가 죽어 있었습니다.”

이경수는 대답 대신 양 손을 허벅지에 대고 문질렀다. 손에 땀이 찬 모양이었다. 곧 이어 조사는 끝났고 이경수는 돌아갔다. 

이경수가 나가자마자 남형사는 라텍스 장갑을 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의실 안 휴지통 앞에 쪼그려 앉더니 뚜껑을 열고 손을 넣었다. 몇 번 뒤지더니 코 푼 휴지 뭉치를 집어 들어 증거물 봉투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이경수가 코 푼 것 아닙니까? 그 더러운 걸 뭐 하시게요?”

“국과수에 보내 DNA 감식해달라 해야겠어. 박혜진 옷에 묻은 모발하고 비교해달라고.”

“구강세포도 아니고 콧물 가지고 어떻게 DNA를 추출합니까?”

“콧물에도 백혈구가 많아서 DNA 추출하는데 아무 문제없어. 문제는 그게 아니고 동의를 구하지 않고 임의로 채취한 거란 말이야.”

“맞네요. 설사 유전자가 일치하더라도 공식적인 증거로 들이밀 수가 없는 거 아닙니까? 본인이 분명히 거절했고, 앞으로도 동의할 리가 없잖아요.”

“일단 감식은 해보고, 이후 일은 결과를 보고 판단해. 배팅 장갑 두 짝도 같은 장갑인지 성분 분석도 의뢰해. 이번주까지는 결과가 나와야 돼. 그래야 다음 주 초에 팀장한테 보고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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