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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경선 Sep 03. 2024

나비처럼 날아서 -1

프롤로그

5월 마지막 날, 동 트기 전 잠실야구장은 연한 먹물 빛으로 물들여져 있었다. 응원으로 들썩였던 관중석은 차분했고 그라운드는 잠에 취한 듯 평온했다.

‘밤새 이슬이 많이 내렸나. 잔디가 축축하네.’

다른 사람들 출근하기 전 새벽에 야구장 곳곳을 둘러보는 게 구장 관리원 서씨의 일상이었다. 잔디 위를 터벅터벅 걸어가며 시설물이나 그라운드 상태를 확인해보고 있었다. 전날 경기의 열기를 식히는 중인 잔디는 지쳤는지 밟으면 힘없이 누워 버렸다.

외야 오른쪽 끝에서 출발해서 1루쪽으로, 다시 홈 베이스 근처까지 왔다. 홈 베이스에 있는 흙을 한줌 쥐어 흘려 보았다. 이슬을 맞아 촉촉한 흙이 작게 뭉텅이 져서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갔다. 바지에 손을 문질러 닦고 3루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3루 덕아웃 위에는 흰색 광고판이 걸려 있었다. 그 아래에 있는 벤치는 잘 보이지 않았다. 어스름한 저녁 편백나무 숲처럼 짙은 갈색이었다.

시선을 덕아웃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훑는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덕아웃 위 상판에 물체 같은 것이 걸려있었다. 사람정도 크기의 형상이 새벽 바람을 받아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눈에 힘을 주고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뭐지? 어제 밤에 안 치우고 갔나?’ 가끔 관중이 던진 물건들이 덕아웃 위에 걸린 채 방치되어 있기도 했다. 두루마리 휴지나 타월, 응원막대기 등 관람석에서 날아온 물건들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과 달리 크기가 컸고 중량감이 있어 보였다.

축 늘어져 있는 모습이 기다란 수염이 덮여 있는 늙은 옥수수 같았다. 긴장된 손으로 모자 챙을 바로잡으며 한 발 한 발 덕아웃 쪽으로 다가갔다. 다가가면 갈수록 늙은 옥수수는 커져갔고 수염은 짧아져갔다. 덕아웃 바로 앞까지 가다가 급정거하듯 멈췄다. 배터리를 뺐을 때 멈춰버린 시계 초침처럼. 미간을 좁히고 고개를 빼서 자세히 보니 사람 같았다. 아니, 흔들리는 사람이었다.

“사, 사람이...”

말이 입 밖으로 나오다가 안으로 잠겨 버렸다.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식은땀이 나며 온 몸이 녹아 내리는 것 같았다. 부정맥으로 심장이 요동쳤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가 가보니 여자였다. 여자의 목에 걸린 스카프가 덕아웃 상판과 연결되어 있었다. 목이 앞으로 꺾여 긴 머리가 얼굴을 덮는 바람에 옥수수 수염처럼 보였던 것이었다. 까만 머리칼이 흰색 블라우스와 대비되면서 공포 영화의 한 장면처럼 괴기스러웠다. 갑자기 소름이 온몸을 감싸 돌았고, 겨울 새벽 냇가 살얼음을 깨고 손을 담그는 것처럼 추웠다.

야구장 그라운드를 앞에 두고 여자가 목이 꺾인 채 매달려 있는 이 상황이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고 단지 멍할 뿐이었다. 쌀쌀한 새벽 공기가 얼굴을 때리자 그제서야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죽었을까?’ 용기를 내어 천천히 손을 뻗어 여자의 몸을 살짝 밀었다. 여자는 미는 방향으로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죽었다는 확신이 들진 않았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제야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이 난 듯 핸드폰을 급히 꺼냈다. 119로 전화 연결이 됐고 기계음이 들렸다. 서씨는 다시 떨려왔고 목이 탔다. 상담원이 연결됐다.

“여기 자, 잠실야구장인데요, 사람이 죽은 것 같아요.”






지류에서

 

  

1.


주말만 되면 중의고등학교로 가는 언덕길은 교회 가는 차들로 붐볐다. 인도가 좁아 뒤에서 오는 차를 피해가며 걸어 올라가기 쉽지 않았다. 준혁이 학교 정문에 도착했을 때 11시 50분이었다. 

‘예배시간에 늦진 않겠다. 다행이야.’ 

교회 예배하러 중의고 강당으로 가는 길이었다. 교회가 건물을 소유하지 않고 학교 강당을 빌려 쓰고 있기 때문이었다. 재정은 탄탄했지만 건물 짓는데 헌금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였다고 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교회는 분위기가 젊고 믿음을 강요하지 않았다.

친절한 미소의 여신도가 나눠주는 교회 주보를 들고 2층 강당으로 들어갔다. 찬송가 합창 후 성가대가 입장했다. 성가대 합창은 애피타이져 같았다. 지중해식 샐러드 같은 합창이 끝난 후 목사님의 시간이 되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다섯 개의 떡과 생선 두 마리. 가난하고 굶주린 이웃에 대한 헌신 이야말로 예수님의 뜻이고 기적이라며 설교는 끝났다. 

광고시간으로 해외 선교활동 소개 및 봉사자 모집 영상이 이어졌고 마지막으로 교회 야구팀 선수 모집 광고가 나왔다. 다양한 연령층의 교인들로 구성된 야구팀 시합장면이 슬라이드 형태로 이어졌다. 정지된 화면의 고딕체 글씨가 준혁의 가슴에 커다랗게 다가와 박혔다.  


초록 그라운드에서 야구를 통한 친목과

선교를 같이할 야구선수를 모집합니다.

나이 불문, 체력 불문입니다.

주님 아래 야구에 관심 있으신 분.

용기를 내셔서 한 걸음에 달려오세요


오래전부터 마음 한 구석에 있었던 ‘야구’라는 단어가 준혁을 흔들어 놓았다. 야구를 한다? 보는 것이 아닌 선수로 뛸 수 있다는 생각만으로 머리가 띵 해졌다.

준혁은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야구부 친구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 있었다. 투수였는데 마운드 위에서 공을 던지는 모습이 아직도 생생했다. 와인드업 자세에서부터 마지막 팔로스로우 동작까지 간결하면서도 물 흐르듯 거침이 없었다. 친구의 손에서 뿌려진 공은 소용돌이처럼 회전을 하며 포수에게 향했다. 순식간에 블랙홀로 빨려 들어가는 행성 같았다. 공이 포수 글러브에 강하게 꽂혀 팡팡 소리가 날 때면 탄성이 절로 나왔다. 

친구의 투구 모습이 떠오르면서 야구에 도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솟구쳤다. 첫눈에 사랑에 빠지듯 한 순간 운명처럼 다가왔다. 가슴이 벅차 올랐다. 예배가 다 끝났지만 여운 때문에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했다. 배웅하는 목사님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나왔다. 터벅터벅 운동장을 빠져나가는데 누군가 뒤에서 어깨를 툭 쳤다.

준혁의 오랜 친구 신창우였다. 박사과정에 있는 창우는 고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만나고 있는 친구였다. 둘은 친한 반면에 서로를 의식하기도 했다. 고등학교에서 운동 할 때도 경쟁했고 성적도 비슷했다. 같은 대학교 법대와 공대로 갈라졌지만 비교하는 주위 시선은 여전했다. 가까웠지만 허물없이 터놓고 지낼 수 있는 친구는 되지 못했다. 평소에 교회에서 마주칠 때에는 잘 지내느냐는 말로 지나쳐왔지만 오늘은 준혁이 말을 걸었다.

“아 창우, 너 원래 2시 예배 아냐? 웬일로 일찍 왔어?” 

“교수님이 오후에 나오라고 해서 예배시간 앞당겼어. 넌 요즘 과외 많이 한다며?”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지만 준혁은 말없이 웃으며 넘겼다. 주변 친구들 이야기 몇 마디 하다가 화제가 서로의 거취로 넘어갔다. 창우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뜬금없는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사법고시는 이제 완전히 접은 거야?”



고등학교 때 소설을 접하면서 검사라는 직업에 대한 호감을 갖게 되었다. 미국 스릴러 작가의 법정 소설은 빼 놓지 않고 읽었다. 검사, 변호사와 배심원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서사가 너무 흥미로웠다. 특히 존 그리샴의 소설은 모두 섭렵했지만 변호사의 시각에서 이야기를 풀어내는 점이 아쉬웠다. 다른 법정 소설도 다를 바 없었다. 방어적일 수밖에 없는 변호사보다 수사, 기소를 통해 적극적으로 정의를 실현하는 검사가 더 끌렸다.

준혁은 수능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국내 최고 대학에 무난히 합격했다. 검사라는 직업적 호기심이 부모님의 기대와 만나면서 자연스레 법학과를 선택하게 되었다. 180cm 넘는 키에 운동으로 다져진 탄탄한 체격, 피부 좋은 하얀 얼굴은 돋보였다. 공부 실력까지 겸비했으니 주위에 항상 여자들이 맴돌았다. 깃털처럼 가벼운 호기심만 가득한 여자들이 대부분이어서 관심을 두지 않았다. 종교 동아리 활동을 했지만 신앙에 매몰된 대학생활을 하고 싶지 않아 금방 시들 해졌다.  

1학년 여름방학 때부터 사법시험 준비를 시작했다. 재학 중에 합격해서 하루 빨리 검사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학교에서는 헌법, 민법, 형법 등 사법시험 과목 중심으로 수강을 했다. 학원과 독서실에서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집중했고 매진했다. 

3학년 겨울에 사법시험 1차에 합격했지만 2차 논술형 시험에서 떨어졌다. 짐을 싸 들고 오대산 중턱에 자리잡은 조그만 암자로 들어갔다. 새벽 잠깐의 참선을 제외한 나머지 시간은 오로지 공부에만 집중했다. 소화가 안될 정도로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하루에 18시간 이상 공부에만 매달렸을 정도로 열심히 준비했다.

결과는 참담했다. 최종 합격자 명단에 민준혁이라는 이름은 없었다. 2번째 패배였고, 다시 학교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복학 후 맞는 4학년 생활은 비 맞은 청바지처럼 무거웠고 꿉꿉했다. 실패를 모르고 살아온 준혁으로서는 견디기 힘든 시련이었다. 졸업 후 도망치듯 군대를 갔고, 전역 후 바로 입시 과외를 시작했다. 잠시만 한다는 게 벌써 1년의 시간이 흘렀다. 꼬박꼬박 입금되는 돈에 중독되어 버린 탓이었다. 매달 과외비는 마약과 같았다. 다른 일을 모색하려 하면 어김없이 매달 말일에 약은 주입되었다. 그러면 다시 약에 취해 한달을 살아가는 무한 반복이었다.



“지나간 이야기해서 뭐하냐. 오늘 야구팀 모집 광고 나오던데 우리 교회 야구팀도 있었어?”

“아. 야구팀. 생긴 지 얼마 안 됐고 나도 거기서 뛰고 있어. 근데 너 주 종목은 농구 아냐?”

준혁은 좋은 신체조건에 승부근성까지 더해 농구에 두각을 나타냈다. 학교 농구 코트에서는 당할 자가 없었다. 주말엔 한강 고수부지 3대3 농구 경기에서 탁월한 실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농구 안 한지가 언젠데 그래. 너야 말로 야구와 인연이 없었던 것 같은데?”

“친한 교회 형님이 팀을 만들어 같이 하자고 해서 한 거야. 1년 좀 넘었나 그래. 너도 들어와. 같이 하자 재밌어.”

창우와 헤어지고 야구팀 감독하고 통화를 했다. 감독은 환영한다고 다음 주 토요일 시합 있는데 와서 구경하라고 했다. 그 뒤 일주일은 길었다. 무료한 과외생활을 하면서 어딘 가에 몰입하여 성취감을 느낄 만한 게 없었다. 야구라는 도전 대상이 나타나면서 잘할 수 있을까 하는 긴장감과 함께 잘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교차했다. 과외 수업을 하는 도중에도 야구장 푸른 잔디가 아른거렸다. 잔디 위에서 유니폼을 입고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며 피식 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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