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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Jun 27. 2022

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

조각 난 마음을 녹여 새로운 형태로 붙여주는 글

글 쓰는 모습은 얼핏 보면 -특히 책상과 주변이 깔끔할수록- 한적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글 쓰는 마음은 대개 한적하지 않다. 의문스럽거나, 슬프거나, 불안정하거나, 고통과 치열하게 싸우는 중일 때의 글쓰기가 즐겁고 기쁜 날의 글쓰기보다 많지 않을까. 


남들에게 좋은 작품을 알리는 글, 취미생활과 관련된 글은 기분 좋은 상태로 쓸 수 있다. 그러나 조각 난 마음을 녹여 새로운 형태로 붙여주는 글, 그래서 인생에 대해 보다 유연한 시각을 갖게 하는 글은 납득할 수 없었던 일을 굳이 돌이키며 써냈을 때 나오는 것 같다. 남들은 그저 잊어버리고 앞만 보라고 할 일을 꾸역꾸역 기억해내며 의미를 찾으려는, 혹은 다른 차원에서라도 이해해 보려는 몸부림은 쇠락한 금광 근처의 하천에서 나 혼자 사금을 채취하려고 계속 채를 들고 흔드는 것과 비슷하다. 그리고 내 방이 여름의 서재가 될 때까지 그곳에서 읽고 쓴 글은 바로 그런 글이었다.  


좋은 글은 독자에게 언어를 주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아픈 마음에는 그것을 세상에 표출할 수 있는 말을, 혼란스러운 감정에는 그것을 뚜렷하게 구분해 줄 ‘감정의 명칭’을 찾으면 고통이 잦아든다. 상황에 적합한 언어가 고통을 ‘다룰 수 있는 문제’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타인의 글에서 내가 할 말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은 결국 글의 저자와 독자 사이에 공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다. 우울이 내 심신을 움켜쥐었을 때 나는 책 읽기를 힘들어했다. 그나마 쉽게 읽을 수 있고, 다시 독서에의 길을 터준 것이 나와 같은 시간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작가들의 진솔한 에세이였다. 이 넓은 세상에 나만 이 문제로 속앓이를 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 자체가 하루, 한 달, 한 해 더 살아볼 엄두를 내게 했다. 그래서 글을 다시 쓸 수 있을 만큼 집중력과 지성,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긴다면 나도 그런 글을 써서 내가 도움받은 만큼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마음에 맞는 문장을 주고 싶었다. ‘할 말’을 나누고 싶었다.  



잔뜩 구겨져서 뭉쳐 있는 우울의 시간을 다림질하고, 다시 해상도를 높여 과거를 기억해내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우울증의 흔한 증상 중 하나는 기억력과 집중력 저하이기 때문이다. 애써 기억해낸 개인사를 글의 의도에 맞게 어디까지 써야 하는지 글과 나의 밀고 당기기도 으레 있는 일이었다. 우울에 너무 취해서 글을 쓰면 자기 연민으로 가득 한 푸념이 될 것이고, 내 얘기를 너무 가리면 누군가와 공감하기에 너무 밋밋해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글이 될 게 뻔했다. 더군다나 에세이는 내가 처음 쓰는 장르의 글이었다. 내 의도가 전달되기에 적절한 나와 글의 거리, 나와 독자의 거리, 나와 세상의 거리를 새롭게 익히느라 많은 시간을 들였다. 


내게 위로를 주던 바로 그런 글들을, 누군가에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일념으로 직접 써 보기까지 오랜 독서의 시간이 있었으며, 또 오랜 필사(筆寫)의 시간도 있었다. 주로 새벽과 아침, 나는 일기를 쓰고, 책을 읽고, 내게 피와 살이 될 문장들을 필사했다. 그 시간이 없었다면 내가 생활하는 방에 새로운 의미가 덧씌워지진 않았을 것이다.


노트북을 여는 것만으로 서재 겸 작업실로 변하는 나의 방은 조금 더 애틋한 공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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