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나 사이의 공간'에는 흐르는
김윤정 작가의 <펜으로 쓰는 춤> 리뷰.
영상 예술과 공연 예술 중에서 한 가지에 더 애정이 쏠리는 이유는 영원성과 순간성 사이에서 어떤 아름다움에 가슴이 반응하느냐의 차이일 것이다. 그것을 영화와 연극으로 나눠봤을 때, 나는 영화파였고 글쓰기 수업에서 만난 내 글벗은 연극파였다. 나는 음향이나 색감, 마스킹 상태가 잘 되어 있는 영화관, 그러니까 영상의 의도를 최대한 살려내는 환경에서 영화 보기를 좋아했다. 심미적인 충격이 충만한 장면에 압도되기를 즐겼고, 오프닝 시퀀스를 지나 같은 장면으로 돌아오면 그 보존된 아름다움을 몇 번이고 음미할 수 있다는 점이 좋았다.
나는 그렇게 내가 생각하는 영화 관람의 장점을 말했는데, 내 글벗은 그다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일단 그는 영화를 꼭 영화관에 가서 봐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고 감명 깊은 순간을 여러 번 재생할 수 있다는 점에도 그다지 마음이 동하지 않는 듯했다. 영상보다는 자기 앞에서 실연되는 배우들의 열연을 보는 게 더 좋다고 했다.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을 사랑하는 것은 돌이켜 보면 내 취향의 시원으로, 어릴 적부터 고미술품이나 유물을 보면 그 앞 떠나기를 싫어하는 나였으니 연극과 영화 중 영화를 선호했던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래도 어릴 적 나는 무대 예술은 끝나는 순간 사라져서 아쉽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물론 지금은 내 앞에서 시시각각 펼쳐지는 연극의 맛을 알아버렸지만, 영화만을 파고들 때도 무용이 들어간 공연은 그 현장성을 더 중시하여 현장에서 관람해야 한다는 관념이 있었다. 무용하는 몸이 관계하는 공간성과 시간성은 영상으로는 다 전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펜으로 쓰는 춤>의 저자이자 오랫동안 무대 위 예술가의 삶을 지켜 온 안무가 김윤정의 글을 읽으며 수많은 예술 장르 중에서 순간의 아름다움을 만들고, 표현하고, 보내주는 공연 예술의 미학에 대해 다시금 사유해 보게 되었다.
시간을 내서 공연 정보를 찾아보고, 예매하고, 그 시간을 비워 놓고 극장까지 찾아가서 공연을 관람하고자 하는 관객들과, 오랜 시간에 걸쳐 계획과 연습의 과정을 거친 작품이 만나는 순간이라니. 그리고 흔적도 없이 사라져 텅 빈 무대만 남는다니, 얼마나 처연하게 아름다운가 말이다. 공연의 감동과 파워풀한 에너지는 여운을 남기며 그냥 사라지는 것이다. p. 14
작가가 사라짐의 처연한 아름다움에 골몰할 수 있는 이유는 세상 모든 존재에 대한 다음 같은 생각에서 왔을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사라지기 위해 존재하기도 한다. p. 14
그에게 사라짐은 아쉽거나 두려운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자연스럽다 못해 아름다운 것이다. 마치 고운 색모래로 만든 정교한 만다라가 완성된 후 사라져야 하는 것처럼. 그러해야 하는 일이고, 그러해야 목적을 다하는 일이다.
안무가 김윤정의 색모래는 어디서 오는가. 그의 공연 소재, 재료들은 그가 일상에서 읽고 보고 듣는 것들에서 온다. 특히 그는 읽음으로써 생겨나는 사유를 중시한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는 것들은 적어지고 모르는 것들이 늘어난다. 너무 신기하고 새롭다. 새로운 세상은 점점 더 나를 비우며 모름의 공간을 늘려준다. p. 38
독서를 통해 얻어진 다양한 지적 정체성의 또 다른 나는 내가 어려움에 처할 때 위로가 되고 든든한 힘이 되어준다. p. 40
예술가에게는 일상의 잔잔한 수면 같은 시간, 혹은 큰 파도 같은 사건, 정체를 잘 알 수 없는 무언가의 빈 자리까지도 창작의 재료가 된다. 그러나 특히 깊은 사유를 주는 독서와 함께 안무가이자 작가 김윤정의 예술 창작에 큰 영향을 주는 것은 여행이라 할 수 있겠다. 작가에게 여행은 새로운 영감의 원천이 되며, 일상을 환기하여 존재의 실존에 대해 다시 고찰할 수 있게 만드는 일종의 도움장치가 된다. 작가는 이 책에서 인도, 아프리카 카보베르데, 멕시코, 파리, 웨일스 등등 세계 여러 곳을 방문한 경험을 들려준다.
여행은 설렘이다 여행은 자기라는 실체를 잊고 다시 태어난 듯 새로운 시간과 공간이 주어지는 것이다. 일상에서 형성된 의식들이 새로운 공기와 섞이는 순간, 기분 좋게 자기 부정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 여행은 일상의 현실로부터 나를 떼어놓을 수 있고, 그래서 가식 없는 자연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p. 141
작가의 젊은 시절, 그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동생의 죽음을 겪었다. 그 후 아버지의 죽음까지 겪은 작가는 모든 존재의 소멸-죽음에 관해 숱하게 고찰하게 되었다. 먼저 떠난 이들에 대한 슬픔과 그리움은 닳지도 줄지도 않지만 그를 변화시킨 게 있다면 죽음관이 삶 그 자체와 서서히 연결된 것일 터이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주변의 죽음들을 마주하며 죽음을 직시하게 되었고, 죽음을 모르고 삶을 산다는 것은 허상이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일 죽으면 오늘의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 결정을 하지 않는다면 그저 일상을 따라 시간이란 물결에 떠밀려 결국 죽음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p. 248
모든 존재의 필연적인 죽음에 대한 관조는 작가가 사라짐의 아름다움을 세세히 느끼는 데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무대에서 춤을 추는 동안 백이 되었다가, 그 온전한 몰입과 합일이 소멸하는 것마저 극의 아름다움이라며 미련 없이 보내주는 자세는 작가와 같은 공연예술가에게 얼마나 중요한가. 그는 여전히 슬프고 그립지만 죽음의 존재를 포용함으로써 매 무대 그 외로움을 승화하고 있는 것이다.
완성된 모래 만다라를 흩트려 없애도, 없애기 직전까지 그것을 만들었다는 사실은 사라지지 않는다.(물론 티베트 불교에서는 그것에조차 집착하지 않아야 하겠지만) 모래 만다라를 만들던 과정의 몰입의 감각, 모래 만다라가 흩어질 때 해소의 감각은 분명히 존재했고 그 감각은 몸과 마음 어딘가에 남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글을 쓰거나 손으로 작은 조형물을 만들 때, 일상을 차지하는 구상 작업에서 직접 기술을 익히고 표현하는 과정에서 느낀 것은 모두 내 몸과 마음에 남는다. 그렇게 체화되어 나 자신이 수명을 다하고 사라질 때까지 나와 한 몸이 되어 남아 있다. 내가 사라질 때까지, 내 주변에 남아 영향을 미칠 나의 편린들마저 세대를 거듭하며 사라질 때까지.
김윤정 작가의 동생은 작가 본인에게 두고두고 영향을 주는 실존주의 철학을 소개하고 갔다. 연극을 공부하며 배웠던 것을 언니에게도 접하게 했다. 비록 이 세상에 '내던져진' 인간이지만 자신의 삶을 기획하며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살아야 한다는 하이데거의 정언을 만나게 했다. 일상의 한 장면 장면, 생각이 가닿는 지점이면 자연인이자 예술가 김윤정의 사고의 기준 중 하나로 발동 되어 그가 깊은 사유를 하도록 도왔다. 그렇게 얻은 깨달음과 아이디어들은 무대 위에서 백(白)이 될 수 있게 춤추는 몸의, 그 몸으로부터 나오는 몸짓의 일부가 되었다.
모든 것은 결국 사라진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것. 어떻게도 부정할 수 없는 말이지만 과정과 과정에서 심신과 하나가 되는 모종의 작용에 대해 생각해 본다. 내던져진 존재들임에도, 페르난두 페소아가 말한 '나와 나 사이에 있는 어떤 공간'에 결국 그런 것들이 흐르고 있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해본다. 그 공간은 육감으로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오감의 영역에 출현했다 들어가기를 반복할 것이다. 부정기적으로, 한 사람의 생애에 걸쳐서. 그리고 '나와 나 사이의 공간'이 존재감을 드러낼 때는 아름다움과 환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 '공간'은 물러날 때 막연한 슬픔과 외로움을 남겨놓을지도 모르겠다. 또다시 일상에 매몰되기 쉬운 인간을 그대로 남겨두고 사라지는 것이니.
그러니 잠시 잊을 수는 있어도 뗄레야 뗄 수 없는 존재의 불안 속에서 어찌 해야 하는가. 필연적인 죽음에 이르기 전까지, 하나의 시작에 반드시 하나의 완성이 있는 무대와 달리 끝 없는 일상을 어찌 살아야하는가. 여기서 다시 김윤정 안무가가 인용해 둔 페르난두 페소아의 문장을 끌어와 본다. 하루의 끝에서, 어쩐지 차분함을 되찾게 해 주는 이 문장을.
“하루여, 흔들리지 않는 네 종말을 향해서 걱정 말고 가라. (…) 이 쓸모없는 오후의 멜랑콜리여.”
-페르난두 페소아, 『불안의 서』의 한 구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