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년 전 연말에 했던 셀프 인터뷰
* 해당 서면 인터뷰는 필자가 한 해를 돌아보며 2021년 12월 31일에 완성한 글로, 글을 올린 날과 다소 시차가 있는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터뷰의 생생함을 위해 연말의 완성본을 그대로 올렸음을 밝혀둡니다.
Q. 오늘 인터뷰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요?
A. 예전부터 아트인사이트에서 공통 주제로 글을 쓰시는 분들이 조금 부러웠어요. 같은 주제로 글을 쓰면 아무래도 해당 글들을 연작 읽듯이 다 읽어보게 되잖아요. 하나의 주제에 이렇게 다양한 생각이 표현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그 글들 사이에서 내 글은 나의 어떤 면을 보여주는지 알 수 있다는 점이 매력적으로 느껴져요. 그래서 공통 주제까지는 아니지만, 연말이면 많은 사람들이 한 해를 돌아보는 글을 쓰니 저도 그 대열(?)에 끼어보고 싶었어요. 저의 1년을 돌아보는 일도 필요했고요. 한 해를 정리하는 글을 지금까지 안 써 본 형식으로 써 보고 싶기도 했습니다.
Q. 그렇군요. 사실은 이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조금 의외였어요. 평소에 자기를 드러내는 걸 어려워하시잖아요.
A. 말씀하신 대로 평소에 저는 주변에 마음을 여는 데 시간이 걸리는 편이고, 어지간해선 먼저 제 얘기를 하지 않아요. 제 얘기를 하는 건 왠지 불안해요. 내 말이 틀린 정보를 담고 있을까 두렵기도 하고 제 인상이 제 언행으로 정해지는 걸 생각하면 더욱 뻣뻣해져요. 조금 더 편하게 말해도 좋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래요.
하지만 글 안에서는 달라요. 글을 쓰며 느낀 건 나를 드러낼 필요가 있을 때 주저하면 글에 그 망설임이 고스란히 들어가더라는 점이에요. 글이 어떤 정보를 요구하는데 쓰는 사람이 주저하면 그 부분이 헛헛한 게 그대로 드러나요. 그게 싫어서 저는 글을 쓸 때 진솔하고 담백해져요. 글에서까지 ‘말 없는 사람’이고 싶지 않아요. 글 안에서 빈 말도 하고 싶지 않구요.
한동안 글 슬럼프가 와서 많이 힘들어했는데, 새로 나간 모임에서 과제로 ‘좋아하는 음식’에 대해 짧은 글을 쓰면서 글쓰기가 좀 풀리는 느낌을 받았어요. 제 추억에 대해 쓰니까 글이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어요. 나에 대해 더 본격적으로 쓰면 글에 대한 초심이, 열정이 되살아나지 않을까? 이 서면 인터뷰에 이런 기대도 좀 있고요.
Q. 그럼 본격적인 질문으로 넘어갈까요? 글쓰기 초심을 언급하셨는데, 한서밀 씨는 인생이나 예술에 대해 특별히 좌우명이 있나요?
A. 콘텐츠 관련 도서에서 처음 접한 나바호(Navajo) 족의 가르침이 제 인생의 좌우명이에요. 바로 ‘인간에게 있어 궁극적 사명은 미를 만들어내고 그 미에 둘러싸인 채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탐미주의인지, 나바호 족에게 아름다움의 소재와 범위는 얼마나 다양했는지 이런 것까진 몰라요. 다만 그들은 ‘미(美)를 사랑하고 예술가를 극진히 대접한 부족’이라고 해요. 그래서 이런 가르침이 돌고 돌아 한국에 사는 저한테까지 온 거 같아요.
가끔 창작 중에 생각이 막히거나 ‘글 한 편 쓰기 위해 이렇게까지 한다고?’ 싶을 때 포스트잇에 적어 붙여 놓은 이 문장을 보며 제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되새기곤 했습니다. 나는 좋아서 이걸 시작했고 내가 만든 아름다움에 둘러싸이고 싶어 글이건 그림이건 하나씩 만들어가는 거라고요. 그래서 글이 잘 써지거나 글을 위한 정보 찾기나 체험을 잘해나가고 있을 때도 이 문장을 떠올리면 즐거움과 뿌듯함이 더 강하게 느껴집니다. 힘들 때건 즐거울 때건 저를 많이 도와주는 문장이에요.
저는 제 인생 자체가 미를 만들어내고 그것에 흠뻑 젖어 사는 것이면 좋겠어요. 다른 사람들의 예술에 빠져 사는 것도 행복하지만 제가 쌓아놓은 제 취향의 아름다움에 둘러싸여서 살고 싶어요. 그런 삶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행복해요. 다른 예술가들의 창작물을 접하며 자극받고 성장하다가도 저 자신의 예술로 돌아오고 싶어요. 일종의 관념적인 집을 짓는 것 같기도 해요. 제 손으로 짓는 제 마음의 집을요.
*(나바호 족과 관련된 내용은 사사키 도시나오, 한석주 역, 『큐레이션의 시대』, 민음사, 2012, p. 11 에서 접하고 인용했습니다.)
Q. 아름다움에 둘러싸이고 흠뻑 빠진 삶을 살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럼 어떤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시나요? 한서밀 씨 자신의 예술은 또 어떤 걸까요?
A. 밝은 빛, 빛 조각, 잘게 부서지는 빛 조각들에서 아름다움을 느껴요. 그리고 전시회장에서건 일상 속에서건 무언가가 서로 부딪히면서 본질을 드러내지만 부서지지는 않는 순간들을 좋아해요. 그것이 음(音)이건 형상을 가진 것이건, 감각적이거나 물리적으로 마찰하며 완전히 깨지지는 않고 자기 자신의 본질을 보여주는 순간.. 그럴 때 아름답다고 느껴요.
묘사가 많이 추상적이죠. 제가 생각하는 아름다움의 이미지를 좀 더 살려서 얘기해볼게요. 저는 썬캐쳐의 가장 아래에 달린 크리스탈 장식에 닿은 빛이 벽과 바닥에 점점이 퍼지는 게 좋아요. 자개모빌의 자개 장식이 저 혼자도 영롱한데 한들거리는 바람에 자기들끼리 부딪히며 카랑카랑한 소리를 내고 또 다르게 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도 좋아해요. 물결끼리 부딪히며 계속 새로운 윤슬을 만들어내는 게 좋고, 그러면서도 빛과 물의 성질은 변하지 않는 그런 심상을 좋아해요.
언어적으로도 시각적으로도 연출이 인상 깊은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에서 한 캐릭터의 아름다움을 두고, ‘그러나 그녀에게는 대리석 계단에 떨어지는 진주알 같은 미소’가 없다고 설명하는 부분이 있어요. 그 캐릭터의 아름다움에 대해선 차치하고, 저는 대리석에 떨어지는 진주알 같은 미소라는 표현 때문에 한동안 그 영화에 푹 빠져 살았어요. 수십 개의 진주알들이 대리석 계단에 떨어지면서 계속 만들어 낼 소리와 반짝임을 상상해보세요. 너무 아름답지 않나요? 실제로는 아름다운 소리가 안 날지 몰라도, 표현에서 촉발되는 아름다움을 상상해 보는 거예요.
이렇게 부딪히며 물성을 드러내지만 본질이 깨지지 않고 감각적으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만들어내는 순간을 좋아합니다. 언젠가 이런 아름다움에 대한 관점을 저만의 이야기로 녹여 보여주고 싶어요.
저만의 예술은 이제 다시 만들어가는 중입니다. 입시미술을 할 때는 학원마다 구축해놓은 패턴에 따라 그림을 그렸고, 대학원에 들어가서는 지도교수님의 가르침에 따라 글을 썼죠. 완전히 제 것은 아니었어요. 그러니까, 저를 온전히 표현할 수 있는 그림과 글이 아니었어요. 입시미술은 따라가기 급급했고, 학술적인 글에서도 제가 드러나긴 하지만 글의 성격 자체가 저를 표현하기 위한 글은 아니잖아요.
좀 지나서 알게 되었는데, 저는 생각보다 자기 표현에 대한 욕구가 강한 사람이었고 그걸 잊은 채로 살아왔던 거예요. 저만의 예술은 현재는 제가 좋아하는 것들을 언어화하는 글쓰기이고, 제가 예전부터 지어 온 몇 편의 이야기들이에요. 죽기 전에 풀어놓고 가고 싶은 이야기들, 몇 년 째 머릿속과 노트에 그려지고 쓰여진 이야기들이 있어요.
한동안 사는 게 제 마음 같지 않아서 잊거나 미뤄두던 것들을 되찾고 다시 제 마음의 중심으로 끌어와 빛을 비춰주고 물을 주며 키우고 있어요. 이렇게 말하면 저 자신이 초라해 보일까 걱정했는데 막상 말로 꺼내고 나니 신기하게도 행복하네요.
Q. 코로나 시국이 한서밀 씨의 문화생활이나 창작에 영향을 많이 미쳤을까요?
A. 아무래도 외부 활동이 확 줄어들었죠. 마스크를 벗고 싶지 않았고… 밖에서 뭘 먹는 일이 부자유스러우니 하루 외출했을 때 하는 일의 반 토막을 겨우 하고 들어와선 코로나는 도대체 언제 끝나나 생각하고요. 그래서 타지에서 열린 흥미로운 전시 같은 걸 보러 가지 못한 아쉬움이 있어요. 사실, 아쉬움이 꽤 커요. 작년에 올해는 영화제에 가보자고 버킷 리스트에 써두기도 했는데… 이것도 내년으로 넘어가는 항목이 되어버렸네요. 아무래도 예술적인 인풋이 줄어드는 느낌입니다.
일정과 일정 사이에 간단한 외식을 할 수 없는 게 얼마나 불편한 일인지 실감하는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지인들과 약속 잡을 때도 뭘 먹는 문제 때문에 참 까다롭고 제가 유별나 보일까봐 걱정되기도 했고요. 친구들과의 약속도 예전에 비해 적게 잡았죠. 제가 집순이긴 하지만 좋아하는 사람들을 오래 못 만나면 자연히 외로움을 느껴요.
외로움과 우울이 글을 쓰게 할 때가 많지만 ‘너무 혼자’인 시간이 오래 되면 창작욕도 말라 비틀어지는 것 같아요.
Q. 그럼 요즘 삶의 낙은 무엇일까요?
A. 좋아하는 아이돌의 노래를 들으면서 운동하는 게 삶의 낙 중 하나입니다. 아이돌에 빠져보긴 처음이라서 제법 생활의 활력소가 됩니다. 아이돌은 소위 ‘떡밥’이라 할 영상이나 sns 소통이 참 많더라고요. 뭔가 새로운 문화생활에 발을 들인 느낌입니다.
그리고 동생과 일상적인 대화부터 서로 속 깊은 얘기를 하는 것 또한 제 삶의 낙이고요. 마침 마음 맞는 친구가 있어서 한 주에 한 번씩 같은 영화를 보고 페이스톡이나 줌으로 같이 영화 얘기를 해요. 친구들이랑 마음껏 만날 수 없어 참 아쉬운 요즘인데, 코로나 시국으로 인해 친구와 영화 얘기를 주기적으로 할 일이 생긴 건 조금 아이러니하네요. 어디 보자…. 와, 5월부터 시작해서 그 친구랑 지금까지 영화 스무 편을 봤네요.
Q. 영화를 좋아하시나봐요. 다소 공상적인 질문인데, 만약 감상한 영화 중 딱 두 편에 개입할 수 있다면, 어느 영화에 어떤 식으로 개입하고 싶나요?
A. 와, 저 이런 질문 좋아해요. 음… 잠시만요. 어떤 영화의 세계관 안에서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은 자주 했는데 영화 스토리에 개입해 보고 싶다는 생각은 많이 안 해 본 거 같아요. 비록 답답해서 가슴 치는 순간이 있었다 해도요.
아, 생각나는 영화가 마침 두 편 있네요. <해리 포터와 불사조 기사단>에서 아바다 케다브라 공격을 받은 시리우스가 그 미지의 기둥 사이로 넘어가기 전에 손을 잡고 끌어당겨서 시신을 잃지 않고 장례를 온전히 치러주고 싶어요.
그리고 나머지 한 편은, 제가 정말 아름다운 영화라고 생각하는 <행복한 라짜로>입니다. 거기서 탄크레디에게 네가 한 식사 초대 약속을 꼭 지키라고 말하고 싶어요. 설령 영화의 결말이 바뀌지 않더라도요.
Q. 그간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하신 글을 보니 음악 관련한 글을 많이 올리셨어요. 글쓰기 소재로 음악을 자주 다루시는 이유가 있나요?
A. 음악은 제 삶에 정말 중요한 요소예요. 20대 초중반에는 독립영화관을 찾아다니며 국내외의 독립영화, 예술영화들을 보는 게 제 일상의 유희이자 제가 성장하는 방식이었다면, 음악은 글쓰기와 더불어서 제 20대 중후반의 주요한 요소가 되어주었습니다.
제가 듣는 음악의 폭이 넓어진 것은 독립영화관을 즐겨 다니던 때부터였습니다. 짐 자무쉬 감독의 <오직 사랑하는 이들만이 살아남는다> 오프닝 시퀀스의 배경음악은 영상과 함께 저를 휘어잡아 영화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했고, 뱀파이어인 주인공 커플이 피를 못 먹어 비실거리면서도 버스킹 가수의 노래를 탐미하며 들을 때 저까지 황홀하게 그 순간에 빠져들었습니다. 생각해보면 그때부터 음악의 힘에 탄복한 것 같아요.
후자의 음악(Yasmine Hamdan의 Hal)에서부터 생소한 언어의 음악을 거부감이나 두려움 없이 듣게 되었습니다. 어떤 노래가 언어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멀어도 충분히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음을 알게 해줬거든요. <가장 따뜻한 색, 블루>의 ost가 여러 나라 가수들의 곡을 찾아 듣는 취미에 아주 쐐기를 박아줬고요. 그 외에도 그 시기 감상했던 다른 영화들의 클라이맥스에 쓰인 곡들 역시 제 마음을 울게 하고, 황홀하게 만들고, 영화의 분위기에 흠뻑 젖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 접한 음악 중 인상 깊었던 곡은 집에 와서 꼭 찾아 들었어요. 유투브 알고리즘의 도움도 쏠쏠하게 받으면서 해당 아티스트의 다른 앨범을 들어보거나 비슷한 분위기의 곡들을 또 찾아 듣곤 했죠. 곡의 장르도 따지지 않고 제 귀에 좋으면 계속 듣는 거예요. 네, 제 청음 취향은 예술영화와 유튜브 알고리즘을 통해 다채로워졌습니다.
그러다 심리적인 문제로 영화를 보기 힘들어진 적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그 시간을 버티게 해 주는 것은 물론이고 달리 ‘생각할 거리를 주는’ 그 자리에 노래가 들어간 것 같아요. 노래 가사나 분위기의 의미 해석을 하며 듣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음악을 좋아하는 마음은 더 깊어졌습니다.
좋아하는 것의 어떤 점이 저를 끌어당겼는지 언어화하길 좋아해서 음악은 자연스레 제 글쓰기에 녹아들었고 때로는 글을 쓰는 동인이 되어줬습니다. 미술작품이나 영화 등의 영상물과 달리 소리로 지나가는, 청각 그 자체인 예술을 즐기다 보니 그 추상적인 아름다움을 글로 옮기는 데 재미를 붙인 거예요. 감각의 언어화라는 재미를요.
어느 순간 제게는 음악과 글쓰기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었고, 그래서 음악 관련 글을 여러 편 올리게 된 것 같아요. 저의 우울을 정리하기 위해 쓴 글이 저 자신을 드러내며 쓰는 글의 첫 시작이나 마찬가지였는데 그런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음악이 거의 매번 큰 역할을 했었거든요. 이제 제게 음악은 생활의 활력소나 분위기 전환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제 삶에 훨씬 더 깊고 큰 의미로 변했습니다.
Q. 그럼 요즘 푹 빠져 있는 노래나 플레이리스트가 있나요?
A. 한동안은 이희문, 이날치 등 퓨전 국악에 빠져 있었다가 요즘은 다시 K-Pop과 유튜브 플레이리스트를 자주 들어요. 더보이즈의 〈MAVERICK〉과 〈Russian Roulette〉, 원어스의 <월하미인>, 신인 아이돌 아이브의 〈ELEVEN〉을 즐겨 듣고 있습니다.
플레이리스트로는 유튜브에서 Sea Pearl이라는 분이 올려 놓으신 <삶의 순간마다>를 정말 좋아해요. 일하고 들어와서 이 플리를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놓고 누워 있으면 행복합니다. 그리고 유투브 플리 제목들을 읽고 있으면 유튜버마다의 개성, 감성이 느껴져서 흥미로워요. 언젠가 저도 플레이리스트 채널을 운영해보고 싶어요.
Q. 올해 가장 큰 변화가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A. 상반기와 하반기에 하나씩 큰 변화가 있었어요. 그리고 둘은 안 이어진 듯 이어져 있지만 인과적인 연결인가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두 가지 일이 상호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올 상반기 가장 큰 변화는 아트인사이트에 다른 분들이 읽어주셨음 하는 글을 제 이름 석 자를 걸고 올리게 된 일입니다. 좋은 글, 퀄리티 있는 글을 써야 한다는 완벽주의가 도져서 부담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그건 결국 제가 마인드 컨트롤을 해야 하는 문제였어요.
아트인사이트의 에디터, 컬쳐리스트로 활동한 지 한 해가 다 되어가는 지금으로선 아트인사이트에 올린 제 글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가끔 제 글이 메인에 걸리거나 많이 읽은 글 코너에 올라올 때면 신기하기도 하고 동기부여도 되었습니다. 결국은 소통을 원해 머리 쥐어 뜯어가며 쓴 글이니까, 많은 분들이 읽어주시면 참 기뻤습니다. 제 목소리를 지면을 통해 세상 어딘가에 남겨두는 일이기도 하여 뿌듯한 한편 글에 대해 진중한 태도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반기에는 체험 프로그램을 직접 짜서 아이들(+가끔 성인 분들)에게 몇 달간 수업을 한 일이 있었어요. 저 혼자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고 뜻이 맞아 모인 여러 선생님들께서 열정적으로 프로그램 기획과 재료 연구, 수업 진행까지 이끌어가 주신 덕분에 저도 끝까지 잘 따라갈 수 있었습니다. 짧은 시간이나마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수업을 할 수 있었어요. 여기서 배운 것도 많고 좋은 분들도 많이 만나고 건강한 소속감을 갖게 되어 좋았습니다.
문제는 작년부터 글 생각만 하고 지내던 저와, 올해 들어 여러 사람들과 협업하고 호흡을 맞춰야 하는 저 사이에서 제가 다소 혼란을 겪은 데 있었어요. 결론적으로는 긍정적인 쪽으로의 변화였지만 변화가 컸던 만큼 혼란도 컸어요. 약간, ‘어어, 내가 변하고 있네. 근데 나 이거 감당할 수 있나? 괜찮나?’ 이런 느낌이었어요. 변화를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데에서 자괴감을 느끼기도 했고요. 그 과정에서 글 슬럼프가 왔었습니다. ‘나’ 자체가 변하고 있는데, ‘글 쓰는 나’ 위에 새로운 일과를 안정적으로 결합하고 시간을 효율적으로 운용하지 못하는 저를 탓하는 데서 온 혼란이랄까요. 포인트를 잘못 잡았던 것 같아요.
그러다 변화는 원래 누구나 힘들고 혼란스러운 것이라는 말을 듣고나서 부담감을 내려놓고 변화의 혼란스러움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어요. 그러니까 좀 더 여유와 감사한 마음이 생겼어요. 밖에 잘 안 나가는 내향인 집순이에게 이렇게 변화할 기회가 생긴 것도 좋은 일이잖아요.
그리고 이 모든 사건과 심정을 지금 이렇게 글로 풀고 있지요. 글은 제게 다시 돌아와 줘서, 제가 새로운 경험들을 기록하고 돌아보게끔 해 줍니다. 그 과정에서 미처 몰랐던 의미를 발견하기도 하고요.
정리하자면, 저를 드러내는 일이 제게 올해의 큰 사건이었고요. 그러면서 얻은 소속감과 변화를 수용하는 마음가짐을 가진 것, 이것들이 올해 저에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입니다.
Q. 내면적으로 크고 깊은 변화를 겪으신 것 같습니다. 그런 변화와 연관하여 올해 깨달은 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A. ‘너무 잘하려고 하지 말고 미리부터 쫄지 말자!’입니다. 주저하다 즐거운 시간을 놓치게 된 적이 많은 것 같아서요. 그리고 자꾸 완벽주의의 나쁜 습관이 올라올 때면 이 말을 속으로 되새깁니다. ‘기본만 하자.’ 초장부터 완벽한 결과물을 욕심내느라 일을 두려워 하지 말고, 차분히 기본을 채워 놓자. 기본이 가장 중요하다. 기본을 다하고 나면 나머지는 자연스럽게 흘러갈 것이다. 이런 마음가짐입니다.
Q. 올해 계획 중에서 이룬 것은 무엇이고 미처 못 이룬 것은 무엇인가요?
A. 이룬 것은 ‘글과 관련된 일로 돈 벌어보기’였어요 친구가 책을 내게 되었는데 그 원고를 읽고 소정의 자문비를 받았습니다. 그 친구의 기획 의도와 실행력, 그리고 주제에 대해 가감 없이 드러내는 솔직함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분량도 분량이지만, 독자에게 전하고 싶은 것을 전하고자 그렇게 글 앞에서 진솔해질 수 있다는 게 멋있었어요. 원래도 글 잘 쓰는 건 알았지만 더욱 남다르게 보였다고 할까요. 그 친구의 노고가 담긴 초고를 처음 보는 행운도 누리고, 좋은 자극도 많이 받았습니다.
미처 못 이룬 것은 제 에세이들을 묶어 독립출판으로 제 책을 내는 것이었어요. 친구의 원고를 읽으면서 내년에는 나도 내 책을 내보자는 생각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돌이켜보니 다른 형태로 이룬 것은 ‘내가 가진 지식으로 강의하기’입니다. 정확히는 강의가 아니라 체험 수업이었지만 문화예술과 관련되어 있었습니다. 수업 프로그램이 끝날 때쯤에서야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의 다른 버전을 하고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원래는 제 버킷리스트에서 시간을 더 길게 두고 이룰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일인데 말이에요. 마치 예상하지 못한 선물을 받은 것 같습니다.
Q. 에세이들을 묶어 책을 내고 싶다 하셨는데 어떤 내용의 글을 쓰셨나요?
A. 우울증과 그 회복 과정에 대한 에세이집을 내고 싶었어요. 성인이 된 후 과제나 보고서 같은 글 빼고 오롯이 나 자신을 보며 진지하게 글 쓴 것도 이 에세이가 시작이었습니다.
지금 일상이 바빠서 에세이 연재는 중지된 상태인데요. 쭉 읽어주신 분들께 죄송하고 저도 이걸 완결내고 싶어서 지금 하는 일이 익숙해진 뒤로 시간을 내어 다시 에세이 쓰기에 돌입하고 싶어요. 그런데 작년의 저와 올해 초의 저, 연말의 제가 많이 달라져서 그 글을 그때의 무드 그대로 다시 쓰긴 힘들고 어렵겠다는 생각도 들어요.
그래도 완결은 내야겠죠. 제 글은 제가 아니면 써줄 사람도, 대신해줄 누군가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대신해주는 누군가가 있어도 그건 진실된 글이 아니겠죠.
Q. 어느덧 2021년이 몇 시간도 남지 않았는데요. 한 해를 돌아보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 하는 바람이 있으신가요?
A. 전 이런 질문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 답하던 말이 있었어요. 친밀한 사람들에겐 직접 말로 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속으로만 하던 말이죠. 저는 늘 우아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 옷도 매끈하고 세련되게 잘 입고, 몸짓도 여유가 있고, 너무 바쁘게 걷지 않고, 시간에 허덕이며 살지 않는 사람이요. 뭔가를 보여줄 때 완전한 걸 보여주고 싶어 동동거리거나 다른 사람의 반응에 일희일비하지 않는, 중심이 꽉 잡힌 그런 사람이요.
근데 이것도 완벽주의의 영향인 것 같아요. 그래서 요즘은 ‘~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의식적으로 줄이려고 해요. 제 자신에게 실망할 것 같으면 ‘그냥 나는 나지, 어쩔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려고 많이 노력해요. 고요하고 매끈한 우아함은 사실 그 뒤에서 훨씬 많이 노력해서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여유가 생겨야 나올 수 있는 것이잖아요. 그만큼 노력을 하지 않고선 그저 저 혼자 만들어낸 ‘이상적인 자아상’일 뿐이죠. 그리고 허상 같은 자아상을 따로 확립해두고 자신의 현재 모습과 비교하기 시작하면 사는 게 괴로워져요. 자꾸 자기를 다그치게 되고 마음이 못나지거든요.
오히려 우아하고 싶다는 생각이 제 마음을 더 해치는 것 같아요. 완벽주의의 불행한 순환인 셈이죠. 이걸 알고 나서는 그냥, 남들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치는지에 휘둘리는 사람만은 되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다른 사람들에게 잘한 걸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을 먹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현재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 된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Q. 그럼 내년을 맞이하는 태도를 물어봐도 될까요? 그리고 내년에 이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 그것도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A. 내년을 맞이하는 태도라… 비록 아마추어지만 글쟁이답게 문장으로 얘기해 볼게요. 한동안 제 마음을 달래주고 일으켜주던 문장은 이자크 디네센의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딜 수 있다’였어요. 한나 아렌트가 자신의 책에 인용한 뒤로 유명해진 문장이죠. 슬픔과 괴로움이 저 자신이 되지 않도록 붙잡고 산 문장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다가 올해부터 제게 스며들기 시작한 문장은 정문정 작가님의 브런치 글에서 읽은, ‘자신의 인생을 두고 자꾸만 나쁜 예언을 하는 걸 그만 두자. (...) 잘 아는 불행과 모르는 행복 사이에서 애써 후자를 고르는 연습을 해야 한다’ 였습니다. 내년에는 낯선 행복을 조금 더 수월하게 택할 수 있는 제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년에 이뤘으면 하는 일은요. 일단 저를 짧게 설명해야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아트인사이트의 첫 번째 공동 저자 프로젝트 도서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는 방식>에 썼듯이 저는 취향 영업러라는 자기소개를 밀고 있습니다. 좋다, 너무 잘 만들었다 싶은 콘텐츠를 주변에 하도 추천하고 다녀서 저를 이렇게 소개한 건데요. 이제는 취향 영업러에 더해 취향 운영러(취향 운영자)가 되고 싶어요. 제 취향을 어떤 형식으로 운영할지, 어떤 방법을 써야 효과적일지, 그걸로 생업까지 삼을 수 있는지를 열심히 고민하며 2022년을 살 거예요. 그리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공부를 하며 지낼 거예요. 어쩌면 제 소망이 제 취향으로 가득한 공간에서 그것을 운영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 뒤로 새로이 즐거운 고민이 시작된 셈입니다. 내년은 작은 규모라도 제가 이 고민에 대한 결과를 내면 또 한 해 잘 살았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해당 인터뷰의 질문에는 제가 지은 것과 지인 분들이 해 준 질문이 섞여 있습니다. 질문 던져주신 지인 분들께 감사의 인사를 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