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적하지만은 않은 글쓰기 후편.
‘내 얘기가 담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처음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어릴 때 죽음에 대한 얘기를 들었을 때처럼 막연히 두려워서가 아니라, 사는 게 무서워졌다가 회복해나가던 뒤로 처음 든 생각이라 의미가 남달랐다.
글을 몇 편 올리고 나서 앞으로 쓰고 싶은 글의 제목과 키워드들을 노트에 써봤다. 임시로 붙이는 제목이긴 했지만 연필 흑심이 종이 위를 빠르게 춤추듯이 돌아다녔다. 앞으로 쓰고 싶은 글 몇 편 정도가 생각나는 게 아니라 카테고리별로 아이디어가 계속 떠올랐다. 그 메모를 보면서 ‘나 오래 살아야겠다’ 소리가 절로 나왔다. 나는 글 쓰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편인데 내가 이렇게 많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으니까.
대학원 논문을 접기로 하고 나왔을 때, 나는 내 안에 굉장히 큰 무언가를 잃은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몸도 대학원을 계속 다녀야 하나 고민하던 때보다 그만둔 이후로 더 아팠다. 대학원에 들인 모든 시간이 다 무가치해진 것 같았고 내 20대가 아까웠다. 내가 정말 논문을 포기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도 많은 시간이 걸렸다.
하루는 정호승 시인의 <산산조각>이라는 시를 읽게 되었다. ‘룸비니에서 사 온 / 흙으로 만든 부처님이 / 마룻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난 상황이 시의 맨 처음 세 줄이다. 화자는 얼른 순간접착제를 꺼내 조각조각 깨진 불상을 붙여보려 하지만, 그렇게 애쓰는 화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처님이 하시는 말씀은 다음과 같다.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지 / 산산조각이 나면 / 산산조각으로 살아갈 수 있지’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는 위로가 될 듯 말 듯했다. 마음이 부서졌을 때도, 그래서 무언가를 포기했을 때도 제로나 마이너스는 아니라는 말 같은데 막상 나는 산산조각으로 살기는 싫었다. 그렇지만 인상 깊은 시라서 아직도 기억이 난다. 참고자료를 필요로 하는 학술적인 글이 아니라, 글의 모든 소스가 나 자신 혹은 내가 일상에서 경험한 것이 되는 에세이를 쓴 지 두 해도 넘자 이 시가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글쓰기가 내 정신을 ‘기워준’* 덕분이다. 글쓰기를 ‘정신의 바느질’*이라는 수단에 대입하는 이 표현은 얼마 전 읽은, 이윤주 작가 본인의 ‘글쓰기’에 대한 에세이집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위즈덤하우스, 2021)라는 책에서 온 것이다. 이 책 초반에서 작가는 출산 이후 키친 테이블 라이팅(kitchen table writing)을 하며 출판사에 글을 투고하는 여성들을 두고 ‘극심한 변화의 한복판에서 해진 마음을 잇고 깁듯이 글을 썼다’고 말한다.(p. 30)
나 또한 내가 그려왔던 인생의 그림이 크게 변한 후로 쓴 글들이 내 정신을 바느질하듯 기워주는 것을 느꼈다. 내 공간에 대한 애정은 결국 삶에 대한 애정이 다시금 고개를 들며 나온 초기 징후 같은 것이었다.
내 경험상 좋은 글을 쓰는 데에 필요한 요소는 자기만의 사유를 할 수 있는 공간과 마감, 그리고 피드백을 믿고 맡길 수 있는 좋은 친구들이다. 그리고 그 전에 기본적으로 문법과 맞춤법, 주제에 맞는 문체 등 글의 형식을 존중하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대학원에서의 글쓰기와 발표가 글과 독자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을 몸에 익게 해주었다. 그것을 에세이는 물론이고 아트인사이트에 기고하는 글을 쓸 때도 실감하게 되었다.
독자에게 의도를 명료하게 전달하기 위해 예리하고 진솔한 문장을 쓰는 것. 너무 긴 문장은 읽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며 끊어주는 것. 발제문 및 소논문의 분량은 한정되어 있는데 다뤄야 할 내용은 많고 깊으니 적확한 단어를 찾아 쓰게 된 것도 요즘의 글쓰기에 톡톡하게 도움이 되고 있다. 약간의 구토감이 들 때까지 글을 읽고 수정하는 ‘퇴고용 체력’은 누가 뭐래도 대학원에서 얻은 값진 능력 중 하나다. 요즘은 토할 것 같을 때까지 글을 퇴고하진 않지만 과거 그 과정에서 생긴 교정, 교열 지식이 지금도 많은 도움이 된다.
과거의 도움을 받고 나니 논문을 포기한 후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시간만 쓰고 결말을 맺지 못했다며 자책했던 날들이 안쓰럽게 느껴졌다. 대학원에서 배운 것은 사라지지 않고 내 글의 지반을 단단히 다져주고 있었다. 이제는 그곳에서 얻은 지식을 다시 꺼내보는 것이 덜 괴롭고, 덜 아프다. 앞서 언급한 시에서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 했던가. 한동안 나는 사금파리 같은 유리 조각들을 웅크린 마음에 둔 채로 계속 베이고 상처 입었는데, 적어도 해가 바뀐 지금은 그렇지 않다. 시간에 날카로운 파편의 끝이 닳아 둥그레졌는지, 아니면 내 마음의 외연이 넓어져 조각에 계속 찔릴 일이 없는 것인지…. 둘 다 이유가 되겠으나 기왕이면 내 마음이 넓고 유연해져서 그런 것이면 좋겠다. 옛 시간의 상처라는 유리 조각들이 유영해도, 마음이라는 공간 자체가 넓어져서 생살 같은 마음의 벽에 조각이 닿아 베일 일이 없는 것으로 말이다.
‘산산조각이 나면 산산조각을 얻을’ 수 있다는 구절은 이제 이해할 수 있는 것 같다. 그래도 산산조각으로 사는 경지까진 이해 못 하겠다. 이건 중년 너머의 시간에서부터 이해할 수 있는 삶의 태도인 걸까? 사실은 미래에서라도 마음 다치는 일은 기껍지 않고, 덜 다치며 살았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게 내 마음대로 될까.
그래서 조각 난 감정이나 기억, 지식들을 ‘잇고 기워내면서’ 살아본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깨진 조각들로 반짝이는 모자이크를 만드는 일이다. 미움이나 절망감 같이 강렬했던 감정 조각들이 흐물흐물해져 색이 살짝 바랜 천 조각 같아졌을 때 그것들을 모아다 기워 보는 일이다. 그 안에 연민이나 공감, 안도감 같은 조각도 모아 같이 기워본다. 색도 다르고 모양도 크기도 다른 낱장의 천들은 모여서 천천히 한 장의 조각보가 된다. 주로 글을 쓰는 과정에서, 이 낱개 조각들이 모여 새로운 작품이 된다. 그것은 글에서 얻은 새로운 가치관이나 인생에 대한 혜안이다. 내가 잘 살려면 계속해야 되는 일이 글쓰기라고 느낀다. 오래 살려면, 내 안에 든 것이 독이 아니고 다른 작품이 되는 쪽이 훨씬 유리하니까.
내 방이 서재로 느껴질 때까지 글쓰기가 단순한 감정의 배출이 아닌, 한 편의 완결성 있는 글을 ‘짓는’ 일이 된 그 순간 이후로 천천히 쌓아 올렸던 삶에 대한 애정을 되새겨본다. 또 한 편 새로운 글을 써내며 감정을 갈무리하고 생각을 정리해본다. 내가 쓰는 글로 희망을 만들어본다. 다음에 다른 글을 쓰면 나는 내 마음을 지켜낼 힘을, 현명함을 조금 더 일굴 수 있을 거라고.
(* 글쓰기에 대해 쓴 정신을 ‘깁다’, ‘정신의 바느질’이라는 표현은 본문에 같이 소개된 이윤주 작가님의 책 『어떻게 쓰지 않을 수 있겠어요』에서 인용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