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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번의 수술, 그리고 다시 재활(2)

다시 걷기까지 꼬박 일 년이란 시간이 필요했다.

by 해피써니

통깁스를 푸는 건 쉬웠다. 단단하게 굳은 깁스를 잘라내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수술한 부위를 꿰맨 실을 빼내는 게 일이었다. 살이 아물면서 살 속에 파묻힌 것처럼 들러붙은 실을 집게로 한 가닥씩 잡아 뜯을 때마다 아이는 너무 괴로워했다. 걸음걸이가 이상해지면서 오른쪽 발모양이 변형이 왔었는데 고관절 수술하면서 같이 수술했다고 했다. 발 등을 여러 군데 절개하고 꿰맨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아이는 절개했던 부위가 빨갛게 부풀어 오르는 켈로이드 피부라서 왼쪽 고관절 부위는 거의 20cm 가까이 뻘겋고 길게 부풀어 올랐다. 처음에는 수술이 잘못된 줄 알고 놀랐었는데, 켈로이드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걸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다. 수술한 지 1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아직도 그 흉터가 색깔만 살짝 연해진 채로 그대로 남아있다.


수술만 하면 다 좋아질 줄 알았지만, 처음엔 쉽게 무릎을 굽히지도 못하는 아이를 보면서 많이 낙담했었다. 발을 땅이 딛지도 못하는 앙상한 다리를 보며 앞이 캄캄했다. 다시 걸을 수는 있는 걸까?


깁스를 풀고 난 후, 아이는 전혀 걷질 못했다. 원래도 가늘었던 다리는 정말 뼈만 남은 것처럼 앙상해져 있었다. 다리에 힘을 전혀 줄 수 없어 아이를 세우려고 겨드랑이를 받쳐주면 주저앉았다. 처음에는 깁스했던 형태 그대로 펴진 다리가 구부러지지 않아서 매일 다리 구부렸던 펴는 운동을 시켰다. 다리가 구부려져야 의자도 앉을 수 있는데 한동안 다리를 못 구부려서 골절 환자들이 타고 다니는 휠체어(다리를 받쳐주는)를 대여할 수밖에 없었다. 일반 휠체어는 사회복지관이나 보건소 등에서 무료 대여할 수 있지만, 다리 받쳐주는 것까지 달린 휠체어는 없었다. 검색 끝에 유상으로 휠체어 대여해 주는 사이트를 찾았다. 물리치료 선생님이 수술환자들이 많이 사용하는 무릎 구부리는 운동 기계도 있다는 정보를 주셔서 그것도 검색 끝에 찾아 내 꽤 비싼 금액을 지불하고 매일 몇 번씩 운동을 했던 기억이 있다. 아이는 대여한 휠체어를 타고 집 안에서도 다니다가 몇 주 후에는 조금씩 다리를 구부리고 앉을 수 있게 되면서 물리치료를 다시 시작했다.


물리치료실에서 처음에는 5분, 10분씩 발을 땅에 딛고 서 있는 훈련부터 시작했다. 서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걷는 연습도 시작했다. 혼자서 못 걸어 워커를 잡고 걸었다. 나중에는 워커를 잡고 혼자서 등, 하교를 할 수 있게 되었다. 꼬박 1년 걸렸다.

5학년 때 아빠와 같이 제주도도 다녀왔으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많이 좋아졌던 것 같다. 평지는 혼자서도 잘 다니지만, 계단이 문제였다. 그나마 계단을 올라갈 때는 손잡이 잡고 혼자서 올라가지만, 내려올 때는 불안해서 꼭 옆 사람의 도움을 받아 내려왔다.


6학년이 되고 한참 지났을 때, 국민연금 공단에서 연락이 왔다. 장애 판정을 다시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성장기 아이들은 몇 년에 한 번씩 심사를 통해 다시 판정을 내린다. 자라면서 좋아지는 경우가 많아서겠지....


연금 공단 직원이 집으로 방문했다. 직원이 아이의 상태를 영상으로 찍어서 가져가 의사들이 진단을 내린다고 했다. 난 근무 시간이라 할머니, 아이, 활동보조 선생님이 계셨다. 할머니와 활동 보조 선생님은 '아이가 혼자 걷는 걸 잘 못한다, 옷도 혼자 잘 못 입는다며 아직까지 도움이 많이 필요하다'라고 열심히 말했는데, 아이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못한다고 했다며 보란 듯이 씩씩하게 걷고, 계단도 혼자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는 것이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상황이었다. 장애 판정을 받아야 계속 활동 보조 선생님 이용 시간을 지원받을 수 있었고, 그래야 계속 치료를 다닐 수 있는데 아이는 그런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는 할 수 있다!'를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할머니와 활동 보조 선생님은 애간장을 태우며 그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모든 상황은 녹화가 되었고, 아이는 혼자서 옷도 입고, 밥도 먹고, 학교도 혼자 다니고 있다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결국, 뇌병변 3급에서 뇌병변 5급으로 장애 판정이 나왔다.

이의 신청도 해봤지만, 소용없었다. 활동 보조 선생님 이용 지원도 끊기고, 자부담으로 사람을 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기에 '장애인 이동지원 차량'을 이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할머니가 같이 동행했지만, 동생들도 학교 갔다가 집에 오면 봐줘야 하기 때문에 나중에는 혼자서 다니게 되었다. 내가 미리 차량 예약만 해주면, 학교에서 차를 기다렸다가 타고, 차비도 스스로 결제하고, 치료실에 도착해서도 꿈이든 카드로 치료비 결제까지 하면서 다녔다.


처음엔 '좀 잘해서 급수 떨어지지 않게 했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돌아보면 아이를 위한 더 좋은 결과였다고 생각한다.


이 아이를 키우면서 어렸을 때부터 갖고 있던 목표는 '아이의 독립'이었다. 여느 건강한 아이들과 달리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부분들이 많다 보니 아이가 자꾸 옆에 있는 사람들을 의지하게 되었다. 자꾸 이걸 당연하게 여기는 아이가 염려스러웠다. 내가 이 아이를 평생 책임질 수 없다면 내가 없이도 이 아이가 잘 살아갈 수 있도록 20살이 되면 독립할 수 있도록 키우자고 결심했다. 그래서 학교도 일부러 혼자 보내고, 치료도 과감하게 혼자 가보라고 했다. 혼자서 씩씩하게 치료 다니면서 주변 어른들의 칭찬 속에 더욱 의기양양해지면 씩씩하게 잘 다녔다. 그렇게 아이는 조금씩 성장했다.


6학년 졸업을 하고, 다리에 박혀있던 철심을 뽑는 수술을 하기로 했다. 의사 선생님은 간단한 수술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셨다. 수술한 지 3년이 되었으니 철심을 뽑는 건 당연한 절차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생각지 못한 변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결국, 아이는 한번 더 수술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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