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가의 역류 효과(washback effect)란 평가가 학습과 교수의 과정에 미치는 영향을 의미한다. 평가의 결과와 피드백이 다음 학습에 긍정적 혹은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교육 용어이다. 영어 성경 암송 대회 심사를 마치고 이 단어가 왜이리 머릿속에 오래 맴돌았을까.대회의 취지와 목적에 맞는 수행의 결과를 기대했는데, 평가 기준 하나에 매몰된 패턴으로 질주하는 아이들의 모습에 많이 안타까웠기 때문이지 싶다.'어떻게' 보다는 '무엇을'에 초점을 맞춘 현실이 안타까운 결과로 연결된 현장을 보았다.
작년 이맘때쯤이다.주일 학교 선생님께서 노회에서 주최하는 어린이 종합대회에 아들의 참여를 독려하신다.
"성경 암송 대회 나가보면 어때요?"
코로나 시기에 멈춰 섰던 대면 대회가 아들의 초등 첫해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1, 2 학년들은 한글 암송 대회에 참여가 가능하다. 아들은 한글로 대회 참여를, 엄마인 나에게는 영어 성경 암송 대회 심사를 해달라는의뢰를 덧붙이신다. 휴일을 반납해야 한다는 점을 제외한다면학교에서의 영어 말하기 대회 심사와 크게 다를 점은 없어 보인다. 아들이 대회에 나가겠다고 하면동행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할 만했다.
"아들, 성경 암송 대회 한번 나가볼래?"
"음... 엄마가 심사한다고 하면 해볼게요."
참여 여부의 선택권을 아들에게 쥐어 주려 했는데 도리어 엄마의 결정권에 무게를 더하는 역전의 상황을 만들어버리다니.어떻게 할지 망설이다가 아들의 대회 참여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심사를 하기로 했다.'둘이 함께 하는여행이 되겠네.' 하는꿈을 꾸며 대회 날을 기다렸다.그런데 반전이 있다.아들이 아파버리는 바람에홀로 덩그러니심사장에 앉게된 외로운 여정, 으흑.올해 역시 어찌어찌 아들은 대회 불참, 엄마는 심사, 나 홀로 2년째다.
장소는 하남이다. 전국 대회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참여하는 학생들의 열기가 뜨겁다. 지역 대회와 다르게 한 부문에 심사 위원도 여러 명이다. 초등학교 3~4학년에 해당하는 초등부 심사를 맡았다. 아들 만한, 아니 아들보다 더 조그마한 귀여운어린이들이 올망졸망 모여 앉았다. 멀리 전라도에서 왔다는 아이는 의상도 심상치 않다.꽃단장을 하고 설익은 표정으로 차례를 기다리는 얼굴들에긴장감이 돈다. 두 명의 심사 위원 앞에서 그동안 갈고닦은 영어 성경 암송 실력을 발휘하는 장, 모두 떨지 말고 잘하렴!
과연 전국 대회다. 첫 번째 주자부터'떨지 말고'는 순진한 기우였음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타이머가 울리자마자 따발총처럼 영어를 쏟아 내는 아이들의 암송 속도에 맞춰 성경 구절을 훑어 내려가는 심사의 눈동자가 분주해지기 시작한다.몇 명째 동일하게 영어인지 일본어인지 모를정도로 발음이 뭉개져버리는 속사포 발화의 빠르기를 맞추자니 살짝피로감이 몰려온다.속도전도 아니고 아이들은 왜 이리 급하게 단어들을 내뱉고 있는 걸까. 보통의 범주 보다 1~2분이나 더 빠르게 수행을 마치는 아이도 있다.
이 모든 것이 시간제한을 걸어놓은 탓이다.지역 대회와 다르게 전국 대회는 치열함이 더해져서 일관된 패턴으로 발화의 속도가 경쟁적으로 올라간다. 대본이 없으면 무슨 소린지 구별도 안 되는 기계적인 내뱉음이 당연한 훈련이 되어버린이유는 결국, 시간제한이라는 평가 요소 때문이었다(심사기준을 당일에 받았다). 과업 완성도와 유창성을 결합하여 시간이라는 기준을 제시한 의도가 왜곡된결과를 낳았다. 옆에 앉아 계셨던 교수님 역시 같은 불편함이 있었던모양이다. 속도전에서 자유했던 아이(물론 시간 안에 딱 맞춰 끝냈다)를 동일하게 대상감으로 지목한 심사 결과에 이심전심이 실렸다.
마지막 주자의 암송을 마무리하고, 전체 심사평 한 마디를 했다(개별 심사평은 금지되었다고 한다. 심사평과 다른 결과에 대한 학부모들의 불만 사례가 있었기에 민원을 막기 위해서란다). 결과와 상관없이 엄마가, 선생님이 하라는 데로 놀고 싶은 마음을 참아가며 그 많은 성경구절을 매일 같이 조그마한 머리에 집어넣으며 되뇌었던 애씀에 큰 치하를 해주고 싶었다.
"친구들, 너무 수고 많았아요. 15명 모두가 이렇게 많은 성경 구절을 한글도 아닌, 영어로 다 암송을 해내는 걸 보고 선생님은 많이 놀라고 감동했어요. 오늘처럼 많은 말씀들이 생활 속에서 풍성히 흘러넘치는 은혜가 있길 바라요. 선생님은 어쩔 수 없이 심사를 해서 등수를 나누어야 하지만 여러분이 그동안 대회를 위해 준비한 노력과 오늘 친구들의 수행을 얌전하게 들어준 태도 모두 대상감이에요. 진짜예요. 알겠죠? 열심히 준비한 나와 옆의 친구들을 위해서 우리 서로 박수 쳐줄까요? 너무 고생 많았어요."
심사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한 아이가 교회 커피숍에 앉아있다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옆에 있던 엄마가 여기 아는 사람이 누가 있냐는 듯 의아한 표정으로 두리번 거린다. 지역 대회 때부터 봤던 아이다. 여러 번 보니 반가웠던 모양이다. 불현듯 이렇듯 귀엽고도 예쁜 아이들이 어른들이 펼쳐놓은 평가, 대회라는 경쟁 시스템 안에서 소모되고 있는 건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든다.
'개인 심사평 없나요? 아이가 어떻게 했는지 멀리서 왔는데 한 마디 해주시면 좋을 텐데요.' 하는 학부모님도 계셨다. 성경을 잘 암송하고 마음에 새기면 다라고 생각했던 나의 안일한 태도가 무색하게 어머니들은 이를 영어 대회로인지하고 계셨다. 맞다. 하지만, 맞지 않는 것 같다.평일이라 아빠가 휴가까지 내서 먼 길을 달려오는데 암송을 하지 않고 오는 아이는 없었고 모든 아이들이 열심이었다. 이를 심사한다는 것 자체가 개인적으로 버거운 하루였다.모든 아이들에게 상을 준다는 게 큰 위안이었다. 그래서, 불편했던 마음을 담아 진행단에 빼먹지 않고 한 마디를 건네고 왔다.
"다음부터는 시간제한이라는 평가 조건에 손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빼거나 시간을 넉넉하게 주는 쪽으로요."
속도에서 자유로운, 그래서 아이들에게 짐을 좀 덜어주고 싶은 마음이다. 얘들아, 너희들은 모두 대상감이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