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사진작가 브레송은 일상의 절묘한 찰나를 포착해 내기로 유명하다. 자연스러움이 묻어난 사실주의 포토저널리즘의 대가에게 순간의 의미는 남달랐다.그에게 결정적인 순간이 아닌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피사체를 기가 막힌 솜씨로 사진에 담아낸 것은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 아니었을까. 켜켜이 쌓여 묻혀 버릴 수 있는 삶의 순간들을잽싸게 낚아채어 인화지에 옮겨담는 예민한 감각으로그는무수한 불멸의 장면을 남겼다.
실수투성이 빨간 머리 앤에게 아직 아무 실수도 저지르지 않은내일은 큰 위안이었다. 무엇인가 의도하고 계획하다 보면 실수는 옵션처럼 따라온다. 정함이 있기에 틀 밖으로 튕겨나가는 이탈의 조각들은당연한 부산물이리라.무엇인가를 많이 하려해도실수가 생긴다. 하나씩 순차적으로 매듭짓고 다른 일로 넘어가야 하지만, 삶의 패턴은 선형적이지 않다. 동시다발적으로 멀티태스킹을 하다 보면 의례히 구멍이 나기 마련이다. 실수를 때우고 나면 마음이 힘들어져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을 꿈꾸기도 하지만 여백의 시간이 오면 또 마음이 편치 않은 것이 인생의 반복 사이클이다.계획이 중하건 가볍건, 일이 많건 적건간에 '해야 한다'로규정짓지 않아야 무탈한 날이 올 것 같다. 문득, 무실수는 어쩌면무계획, 무의도로 경계를 긋지 않는 것에서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워낙 실수가 많은 지라 아무것도 담지 않은 백지상태의 멍 때림으로 한 번쯤은 실수 없는 깨끗한 날을 맞이하길바라던 참이었다.마침남편이 아무 생각 없이 여행한번 해보자고 한다.아무것도없는무색, 무취, 무미의 일정이라니. 무형의 길에서 만나는 일상과조우할 수 있는 기회다.이리저리 여행의 모양을 만들어 내려는 에너지도,틀어질지 모르는 일정에 발을 동동거릴소모전도,핫스폿에서 호들갑스럽게 명장면을 찍어 남기려는 의무감도 모두 제로다. 애씀의비용을 쏟아붓지 않아도 되니본전은 뽑겠다는 심산으로 따라나선다. 달고 짜고 맵고 쓴 그어떤 자극도 배제되었다.그렇기에결정적인 그 무엇도 없는 맹맹한 일상의 맛을 보기로 작정했다.그저맑은 농도이기만을 바라며.
가장 먼저 발길이 닿은 곳은강원도인제에 있는<기적의 도서관>이다. 경기도를 벗어나기 직전까지 떨어지는 빗방울로 인해 '맞는 선택이었을까?' 하며 들었던 의문이 무색하게 이곳은 뽀송뽀송하다. 축축한 경기도를 넘어가니 기적처럼 물기 없는 땅이 기다리고 있다. 이 좁디좁은 땅덩이 안에서 변주의 폭이 큰 날씨들이 지루함을 걷어낸다. 도서관은한적함, 푸르름, 널찍함을 품고 있다. 무작위의 시간 속에 우리를 풀어놓으려던 여행 테마에 딱 들어맞는다. 자연스럽게 늘어진다. 그토록바라던 일상이다. <기적의 도서관>은감칠맛이라는기적의 한 꼬집을 일상에 뿌려준다. 남편은, 이곳으로 배치된 군 인력들이 "인제 가면 언제 오나..."를 부르며 휴전선 전방근무에 대한 곡을 하곤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들 녀석이 듣고 있다가 곡소리를 내며 신나게 따라 부른다. 나중에자신을 향한 노래가 될 수도 있을 텐데.젖은 땅이 마르듯세상이 변하기를 바랄 뿐이다. 아들이 장성하여 군대를 갈 때쯤은 징집이 아닌 모집이 되길엄마가 빌어주마.
다음은 바다, 고성을 향해 출발한다. 동해 바다는 빗물을 머금었다.묵직함이차올랐다.한갓진 고요함도 함께다. 우리 가족의 존재만으로도정적에서 깨어나는 듯한 자연, 하늘에서 비를 흩뿌려 준 이유가 있었구나. 비를 뚫고 온 무모한 자들에게 일상 탈출의 품을 내어주는 넉넉함이라니!기분 좋은 착각으로 독점된 공간을 누린다. 하늘과 바다의 경계가 없는 푸르름, 그 담백한 맛 한 꼬집이 한 켜의 시간 안으로 뿌려진다.
이번엔 속초다. 야시장의 활기를 느끼는 시간이다.잔잔한 표면 위에 넘실대는삶의물결이 인다. 마침, 같은 무모함으로 해수욕을 위해 강원도까지 건너온 지인 가족이 있다. 생동하는 시장의 기운에 떠밀려 아들은 난생처음 순댓국도 먹었다. 쌍따봉을 날리며 맛있게 배를 채운다. 다시 젖은 땅,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의식이 해체되어버린 엄마와 다르게 말똥말똥하다. 맑은정신으로자연의 선물을기대하였던 걸까.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사슴벌레를 찾아내는 쾌거를 이룬다. 대낮같이 환한 도시의 밤에서는 꽁꽁 숨어있던 야행성 곤충이 깜깜한 강원도의 야생에서는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들 인생 일대의 기다리고 기다리던첫 발견이다.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순간들이 차곡차곡쌓여 깨끗하고 꽉 찬 하루가 만들어진다.
찰나라는 시간 한 켜의 무게는 어느 정도일까? 순간이 그렇게 결정적일 수 있을까?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테레자가 토마시를 만나는장면을더듬어 본다. 우연히 테레자의 마을에 치료가 힘든 편도선 환자가 발생했고(1), 우연히 토마시가 일하던 병원의 과장이 호출을 받았고(2), 우연히 과장이 좌골 신경통으로 움직일 수 없어서 토마시를 그 마을로 보냈고(3), 우연히 토마시는 열차 시간이 붕떠서 한 시간을 때워야 했고(4), 우연히 토마시는 마을에 있는 다섯 개의 호텔 가운데 테레자가 일하는 호텔에 들렀고(5), 우연히 테레자가 그날 당번이어서 토마시의 테이블을 담당했다(6).
여섯 번의 우연이다. 한 순간이라도 비켜갔다면 둘은 만날 수 없었다. 연속된 우연의 집합이 운명을 만들어 냈다.물론, 실수의 순간 역시또 다른 우연이 된다.어찌 보면삐끗거림도숙명이다. 실수 없이 맑았던 나의 하루는실수의 무게에서 벗어나길 바란 결괏값이었던 것처럼. 모든 찰나는 결정적인 중량을 지닌다.결국,순간이 삶을 조형하고 찰나의 합이 운명이 된다.모든 순간은 결정적이다.
한적한 어느 시골 마을에 카페 하나 차리고 글을 쓰면 딱이라며지인 가족은 아야진 근처의 동네 마을로 우리를 이끌었다. 셔터를 누르듯 눈에 담은 그 순간이 나의 미래를 어떻게 결정할지는 모른다. 먼 훗날,강원도 어딘가에나의 삶이포개어 진다면 아마 오늘의여행도 결정적 순간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