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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동건 Jan 05. 2024

죽음과 죽음, 삶의 의미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뛰고, 또 뛰었다. 멈춰 서서 숨을 고르지 않았다. 10분쯤 전속력으로 뛰니 몸이 말을 듣지 않고 다리에 쥐가 나 그대로 엎어졌다. 호흡도 못하는 채로 이러니 정말 죽을 듯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생이 이어지고 있다.     


이따금 죽음을 바라게 된 것은 언젤까. 쓸쓸히 죽어가던 노견을 발견하고 간호해 주던 시간부터다. 개들은 자신이 죽을 때가 되면 집을 나간다고 했던가. 목줄에 주인의 전화번호까지 쓰여 있던 그 녀석. 12월 이십 하고도 며칠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지금의 나처럼 개는 헐떡이고 있었다. 뛰지 않고 가만히 있었지만 계속해서 헐떡였다. 무언가에 쫓기는 것처럼. 아마 죽음이었겠지. 조심스레 맥을 안고 집으로 왔다. 겨울에 쓸쓸히 길거리에서 죽게 놔두고 싶지 않았다.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냥 그러고 싶었을 뿐. 이름도 지어줬다. 매가리가 없어서 맥이다. 주인에게는 연락하지 않았다. 개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싶었다거나 하는 건 다 변명이다. 그러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랬다. 주인에게 연락해 개를 데리고 있노라 말할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내가 맥의 마지막을 함께해주고 싶었다.     


맥은 며칠을 버텨냈다. 숨소리는 거칠어지다가 약해졌고, 약간씩 몸을 움직이며 밥을 먹다가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물조차 마시지 않았다. 죽음이 턱 끝까지 차올라 언제라도 삼킬 기세로 주시하고 있었다. 맥도 그 사실을 알았고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도 너무나 확연히 알 수 있었다. 맥은 죽는다. 맥은 죽음의 순간 나를 바라보았다. 나를 통해 이전의 주인을 겹쳐보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내 내 눈을 피하고,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으로 몸을 옮긴 뒤 멈췄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끝난 태엽 인형처럼.      


생이 끝나기 전에도 맥은 움직이지 않았다. 아주 자세히 보아야 배가 약간씩 오르락내리락하며 얕은 호흡이 있음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소변도 대변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생명이 꺼지는 순간은 너무나 명확했다. 갓난아이라도 맥이 지금, 이 순간, 더 이상 숨 쉬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죽음은 그러한 것이었다.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언제나 우리에게 다가올 수 있는 성질의 것. 맥은 내게 죽음을 알려주었다. 철학적인 무엇, 생에 대한 무엇이 아닌 죽음 그 자체. 무엇이 죽음인가. 내게는 맥이 죽음이다.    

  

맥은 죽음 이후에도 죽음이었다. 개의 사체는 매장하는 것이 불법이다. 야산이나 심지어 사유지에도 개를 묻을 수 없다. 사체는 일반 쓰레기로 버리거나, 동물 병원에 맡기거나, 화장해야만 한다. 그러나 반려로 일생을 함께하던 가족을 일반 쓰레기로 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만무할 터. 대부분 반려동물 전문 장례업체의 도움을 받아 화장을 진행한다. 그러나 내게는 그럴 돈도, 의지도 없었다. 맥은 냄새나지 않도록 여러 방부제와 함께 몇 겹으로 싸 종량제 봉투로 버려졌다. 맥이 존재했다는 증거는 전국에서 몰려 들어오는 쓰레기들과 함께 섞였다.      


난 맥과 무엇이 다를까. 종? 사고? 운? 내 죽음은 맥과 다를까. 내 죽음 이후 또한 맥과 무엇이 다를까. 죽은 건 나인가 맥인가. 죽어있는 건 나인가 맥인가.     


알 수 없는 생각들이 끝없이 이어졌고 머릿속은 혼란스러워졌다. 맥이 죽던 순간 생명의 존엄은 없어졌고 종량제 봉투로 그를 내버리던 순간에 철학과 윤리, 도덕, 사회 규범은 빛을 잃었다. 아니, 빛을 잃은 건 나다. 규범은 80억의 사람들 속에서 여전히 제 몫을 다하고 있다. 난 전혀 모르던 어느 개의 죽음 앞에서 조용히 무너졌다. 그리곤 다시 세우지 않았다. 그것은 맥에 대한 모독이므로. 생을 끝내지도 않았다. 맥과 다시 만나기엔 답을 찾지 못했으므로.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무섭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돌보던 노견, 맥이므로.      


죽을 때 무엇도 가져가지 못한다고 했던가. 그러나 죽음은, 맥은, 관찰자에게 수많은 의미를 남겼다. 죽음 자체에 대한 것도 있지만 그 이전에 했던 크고 작은 행동들이 의미를 만들어냈다. 생은 죽음을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죽음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자신만의 의미를 창출하기 위해 살아간다. 나의 목격자들과 남겨진 자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말로 남기는 게 아니었다. 삶으로 보여야 한다. 죽음으로써 세상이 변하는 것이 아니다. 죽기 전까지 내가 보낸 일생을 세상이 보아줌으로써 비로소 세상은 변한다. 죽음 이후에 내가 어떻게 다루어지느냐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다. 남겨진 이들의 편안한 마음을 위한 것이다. 내 이후 거취까지 신경 쓰게 해서는 죽어서도 면이 서지 않겠지. 적어도 내 장례식에 대한 비용 정도는 남겨두고 떠나야겠다.     

맥은 내 친구가 되었고 새로운 철학이, 삶의 태도가 되었다. 난 이전만큼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삶을 사랑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여전히 숨 쉬고 있다. 가슴은 대놓고 움직이며 숨을 쉬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고, 대소변 잘 가리며 소화 활동이 활발히 일어남을 만천하에 알린다.      


난 맥을 잊지 못한다. 죽음과 함께 한다. 인간을 사랑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의 삶은 훨씬 편안해졌다. 사소한 것은 사소한 채로, 큰 것도 큰 채로 남겨둔다. 내게 화를 내거나 탓하는 이들도 거기에 둔다. 다만 내가 남기고 싶은 말이 무엇인지, 세상을 어떻게 변화시키고 싶은지, 그것을 찾기 위해 살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 산다. 죽음은 삶의 의미를 부여했다. 나를 소위 말하는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다. 철이 들었다는 건 이런 느낌일까. 마음 한편에 죽음을 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었던 건가, 성숙한 사람이란 건. 아니면 내가 이상한 걸까.      


알 수 없었다. 알 방법도 없다. 아니, 방법은 있겠지. 그러나 맥이 원치 않을 것이다. 맥이 원치 않는다면 나도 원치 않는다. 나와 6일을 함께한 맥이 떠난 겨울이 왔다. 죽음의 계절이 돌아왔다. 하얗게 덮인 세상 속에서 가장 따뜻하게 지내는 우리를 보며 맥은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었을까. 죽어가는 자신의 몸뚱이를 이끌고 평생을 지내던 이를 뒤로하고 골방으로 스스로 들어간 맥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알 수 없다. 알 방법도 없다.      

맥은 떠나지 않고 내게 남아있다.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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