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evan shim Feb 09. 2024

인류, 자연에서 인공 생태계로

(너무 많이 가지마소)


고대인과 현대인 얼마나 다른가 


고대 원시인을 보면 인공적 가미가 없는 자연적 산물로 보인다. 현대와 완전히 다른 무의 상태에 놓여있는 그들에게 실상 생활 조건을 바꾸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에 널리 보이는 자연적 산물인 풀과 짐승 그리고 주위 환경처럼 인간의 터치가 없는 상태로 보인다. 그리고 한없는 세월이 흘렀다. 인류는 드디어 21세기에 와 있다. 현대 우리가 고대의 윈시인을 보는 인식과 지금 인간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에 어떤 간극이 있을까. 원시인을 연상할 때 현대 우리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다고 느낄 것이다. 인류학적으로 그들이 우리와 동질의 호모사피언스 조상인데 과연 우리 할아버지를 볼 때 갖는 동질감을 가질까 궁금해진다. 


유인원을 연상할 때처럼 가장 먼저 떠오르는 감정은 기괴함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원시인이 과연 나의 할아버지 같은 조상이라고? 정말이야 하는 감정이 든다. 솔직히 그들을 나의 조상이라고 인정하기가 어쩐지 이질감을 느낄 것이다. 그들이 풍기는 소위 자연적이란 의미를 현대인이 어찌 느낄까.  아마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 양측을 포괄하는 정도로 생각된다. 천칭에 올려놓고 측정을 못하니 어느 쪽으로 더 편향되었는지 잘 알 수 없다. 솔직해지면 아마 선선히 나의 조상임을 인정하기가 조금 부끄러운 면도 많을 듯하다. 


유사한 회고를 어느 글에서 읽은 일이 있다. 부끄러운 부모를 외면했다는 아이의 이야기이다. 다 큰 이후에 느끼는 반성과 회한의 스토리였다. 자랑스럽지 못한 부끄러운 부모님을 모른 체했던 아이의 감정은 어쩌면 이해가 된다. 가까운 어릴 적 우리 사회가 비참한 시절에 그리했는데 하물며 고대 원시인은 나와 전혀 관계없는 타 종족으로 인식하고 살아왔다. 아마 다른 행성에 사는 인류로 인식해 왔다. 


지금은 풍요의 시절이다. 스스로 창조한 지구상 인류세는 지구 존속 연대기 중 가장 완성도 높은 성공시대이다. 물론 일부의 빈곤은 있지만 세상의 다수 인종은 물자가 넘치고 과학 기술의 정점을 만끽하는 시대에 진입했다. 최근 내가 하는 지식공유모임에서 수만 년간 인류의 생존을 가능하게 했던 빵의 이야기를 했던 일이 있었다. 석기시대부터 밀을 재배하는 법을 터득하고 토기를 만들고 죽과 빵을 만들어 가며 힘든 생존을 이어가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우연한 현상을 통해 창조적 인지를 발달시키고 생활 여건을 점차 발전시키는 창조력을 발휘하였다.  


인류는 석기시대부터 다른 짐승들과 달랐다. 짐승들은 주어진 환경에 완벽히 적응해서 생존해 왔다. 짐승들은 주어진 생존 궤도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사람들은 달랐다. 스스로의 환경을 만들고 진화해 온 성공 사례였다. 불을 발명하고 도구를 만들고 척박한 환경을 스스로에게 적합하게 조정할 줄 알게 되었다. 밀과 벼를 재배하여 힘든 사냥과 채집 환경을 대체했고 식량문제를 해결하게 되었다. 


지금 우리가 처한 모습은 우리의 조상 때부터 하나 둘 바뀐 변화의 노정에서 그 근원을 찾아야 한다. 주어진 대로 받아들여 순응하는 자연산이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인간은 환경을 거슬리기도 하고 환경을 바꾸기까지 했다. 인류는 스스로의 생각과 예지로 세상을 이끌어 왔다. 





AI  가 그린 고대 원시인 생활상



누가 더 강한가? 똑똑한 자, 적응하는 자


환경을 인류에게 맞게 바꾸는 작업은 오직 인류만 해온 것이다. 이것만 해도 위대한 업적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생각이 환경에만 머문다면 인간이 이룬 진정한 변화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다. 그들은 환경을 바꾼 이후에 무엇을 했을까. 그들은 인간의 육신까지도 스스로 바꾸었다. 고대인들이 가진 초기 볼품없는 체격조건을 점차 발달시켰다. 키를 크게 만들고 몸무게를 늘리는 등의 육체를 변화시켰다. 외적 변화 못지않게 내부의 변화도 있었다. 도구를 쓰며 발달한 두뇌 발달로 뇌의 용량이 커졌다. 이렇게 만든 이유는 지구상에 존재하며 생존을 하는데 가장 적합하게 진화를 하기 위함이다. 


생각을 펼치다 보니 종의 기원을 쓴 찰스 다윈이 한 명언이 떠오른다. 지구상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종은 똑똑한 종이 아니란다. 세상 변화에 잘 적응한 종이라고 명확하게 밝혔다. 한때 지구상에서 우세종이라고 했던 많은 종들이 지구상에 소멸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다윈의 이론대로 환경 변화에 자기 자신을 적응치 못한 업보로 그 종들이 소멸했다고 본다. 한 시절 지배종이었던 공룡이 그랬고 매머드가 그 대표적 소멸종이 되었다. 인류 외에 소수의 다른 종들이 진화를 하여 여태까지 존재한 사례는 더러 보인다. 


옛날 대양주를 갔을 때 키위라는 새의 이야기를 여행 가이드에게서 들었다. 키위새가 살던 시절에 지역적으로 고립된 환경에서 키위새는 그들에게 가장 중요한 식량확보가 쉬었다. 전혀 먹이를 구하는 노력을 하지 않아도 지천에 먹을 것이 많았다. 힘들게 무거운 몸을 이륙하여 날갯짓하고 먹이를 찾고 사냥하는 방식이 불필요하게 되었다. 거기다 주위에 어떤 천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만의 천국이었다. 오랜 기간 환경 적응은 마침내 그들의 몸 형태중 날개가 아예 퇴화되었다. 그래서 지금은 아주 작은 날개의 흔적만 남아있다.




이제 현대 인간은 과거 생존에 필요해서 체격을 바꾼 이상의 신체 개조를 하게 되었다. 이집트 파라오 시대에도 인간의 기본 욕구 중 하나인 미의 추구는 있어 왔다. 성경에도 나온 유대인들의 할례 등이 있어 왔다. 그 정도는 인공의 작용이 아닌 자연적인 수준의 미적 개조로 볼 수 있었다. 드디어 현대 인간은 생활하는 거주환경을 바꾸는 수준을 넘어 신체를 변화하는 인공의 시대에까지 도달했다고 보아도 틀림이 없다. 소위 플라스틱 시술로 통하는 후천적 변형이고 몸의 왜곡에 가까운 수준까지 근접하고 있다. 내돈내산의 몸이 아니다.


타임머신을 타고 거꾸로 가서 고대의 원시인에게 우리를 보이면 “너는 누구냐” 하며 외계인이라고 놀랄지 모르는 수준에 와있다. “제가 당신의 후손입니다” 해도 전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 나올지 우려스럽다. 원시인을 조상으로 인정하기를 부끄럽게 생각했던 우리가 이제는 반대로 그들이 우리를 부끄러워하는 세태가 될 수도 있다. 생존을 위한 진화는 두 날의 검이다. 환경을 거슬러서 소멸을 당할 정도로 가서는 안 된다. 인류가 근래까지 잘 생존해 온 것은 강해서가 아니고 적응을 잘한 것이라는 다윈 님 말씀을 다시 되새겨야 하겠다. 인류세라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기던 때에 인류가 그 시점에 소멸해서는 작명을 한 학자가 민망해진다.


                     

매거진의 이전글 고대의 빵 이야기(1)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